[285호 커버스토리]
다시 ‘하나님의 뜻’ 이슈
지난 7월 1일 아베 내각이 평화헌법 9조의 집단적 자위권을 재해석하면서, 일본은 67년 만에 처음으로 전쟁에 발을 들일 여지를 만들었다. 하루 뒤, 마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암시하듯 미국의 환영 논평이 뒤를 이었다. 절묘한 시점인지 곧이어 중국의 시진핑 주석까지 한국을 다녀갔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시계가 100년 전 구한말로 되돌아간 듯 불안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한반도 주변 동북아에 전쟁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것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시선을 갖고 오늘의 한반도 정세를 파악하면 아주 심각한 상황처럼 인식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일 간 외교정책의 방향이 단순히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불행 중 다행이다. 모두를 파멸로 몰아갈 극단적인 전쟁보다는 21세기 현 질서에는 큰 변화 없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방향으로 정세가 움직일 거라 전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경술국치 이후 104년이란 시간이 만들어낸 한반도 역사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 녹아있다. 그리고 고난의 역사 한가운데 회색지대 없는 흑/백의 세계처럼 양편 모두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명확히 그려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번 가해자는 영원한 가해자이고 피해자 또한 영원한 피해자로 존재할 수 있을까? 홀로코스트 대학살 이후 60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팔레스타인 역사가 증언하는 이스라엘의 잔인한 학살과 야만적인 폭력성은 끔찍하다. 이런 문제는 과연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일까? 월남전 이야기를 조금만 파헤쳐보아도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곧바로 맞닥뜨리게 된다. 6·25와 미군정, 심지어 오늘의 미군부대 주변 역사를 살짝만 들춰봐도 전쟁이 남긴 잔인한 폭력과 그 상처는 현재 시제로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