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호 사람과 상황] ‘생활밀착형 정치’로 아파트 개혁 나선 3人

   
▲전 국민의 70%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는 공동주택(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 회장을 맡은 고상환 사무처장(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가운데)과 남기업 소장(토지+자유 연구소, 오른쪽),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 하석범 목사(땅빛교회, 왼쪽)를 만났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제20대 총선을 전후로 정치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SNS에는 논객들의 정치 평론이 범람하고, 정치인 뉴스가 연예인 뉴스만큼 공유되고 퍼졌다. 빅데이터를 분석한 최재원 다음소프트 이사에 따르면, 이번 20대 총선은 2012년 19대 총선과 비교했을 때 정치 관심도가 두 배 이상(2.68배) 상승했다. 총선 이후에도 사람들은 정치 뉴스에 공감, 동의, 이의 등을 표현, 정치 이야기를 보태고 있다.

그리고 복상에서는 국회의사당이 아닌, 생활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분투하는 이들을 만났다. 우리 주변, 우리 살갗과 닿는 곳에서 정치 운동을 벌이는 이야기를 듣고 ‘생활밀착형 정치’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의 활동 무대(?)는 아파트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는 공동주택(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 회장을 맡은 고상환 사무처장(기독연구원 느헤미야)과 남기업 소장(토지+자유 연구소),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 하석범 목사(땅빛교회)를 만났다. (하 목사는 2014년 1월호 ‘편들고 싶은 사람’에, 남 소장은 2014년 10월호 ‘사람과 상황’에 심층 인터뷰가 실려 있다.) 

‘관리비 0원’ ‘공사비 부풀리기’ ‘재개발 이권 다툼’ 등 아파트 비리는 심각한 현실이다. 전국 17개 광역 시·도 및 기초 지방자치단체 합동으로 2015년 10월부터 3개월간 합동감사를 진행한 결과, 전국 429개 단지 중 312개 단지(72%)에서 총 1,255건의 비위 또는 부적정 사례가 적발됐다. 이런 결과에 대해, 세 사람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입을 모았다. 자치(自治)라는 핑계로 불법과 비리가 거의 모든 아파트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 아파트 생활과 관련, 근황을 들려 달라.

▲ 하석범 목사 "최근엔 동대표 3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몇몇 분들한테는 욕도 많이 먹었는데 목회 현장이라 여기고 의미 있게 일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하석범 : 1년 전부터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아파트 역사상 처음으로 공청회도 열고, 후보연설과 토론 등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선거가 잘 치러지게 하는 역할 외에도 동대표 해임이나 아파트 관리 규약 개정 등 할 일이 아주 많다. 주택법이나 관리 규약 등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공부하다 보니 할 일들도 많고 바로 잡을 일도 많더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최근엔 동대표 3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몇몇 분들한테는 욕도 많이 먹었는데 목회 현장이라 여기고 의미 있게 일하고 있다. 

남기업 : 입주자대표 회장이 되어 작년 10월 16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었는데, 12월 12일 입주자대표회의 감사(동대표)가 정기회의 때 나에 대한 해임 요청을 했다. 이유는 ‘회의록을 공개했다’ ‘(대낮) 공사 현장에 나와 보지 않았다’ 등이었다. 아파트 입주자 10%의 해임 동의를 얻어 선관위에 제출한 게 올해 1월 4일이다. 2월 초 해임투표가 시작되었는데 ‘해임 반대’ 결과가 나와 부결되었다. 그들은 이 결과를 무효처리하고 다시 2차 해임투표를 진행했는데, 무효처리 명분이 ‘남기업이 투표 과정에서 피케팅을 하고 문자메시지를 돌렸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3월 9일에 법원으로부터 2차 해임투표를 중지하라는 내용의 가처분신청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입후보 서류를 이메일로 접수’했기 때문에 선거 결과가 무효라고 우겼다. 다시 시비를 가리려 법원으로 갔더니 판사가 왜 지난번에 내린 판결 안 따르고 또 가져왔느냐고 짜증을 내더라. 결국 3월 30일 해임투표를 더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선거관리위원 7명 중 4명이 나의 해임에 동의했는데 그중 한 명은 2월 말에 이사를 간 상태임에도 3월에 두 번이나 회의에 참석했다. 무자격자가 회의에 참석하면서까지 나를 쫓아내려고 한 거다. 이제는 해임투표를 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 같다. 나를 해임하려는 이들은 회의에 참석해 여전히 나를 조롱하고 모욕을 준다. 내가 18기 회장인데, 15명 동대표 중 10명이 17기 동대표를 했던 분들이다. 회장 선거에 나왔다가 나에게 진 이전 회장(17기)과 그들이 똘똘 뭉쳐 나를 내보내려고 한다. 

고상환 : 나는 아내가 먼저 동대표를 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그걸 이어받게 되었다. 세습이다.(웃음) 처음에는 입주자대표회의 이사로 시작을 했는데, 어쩌다가 회장이 됐다. 300세대가 사는 시골의 작은 아파트 단지다. 사실 관리주체가 건강하면 입주자대표는 할 일이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관리사무소 직원들 근무환경은 열악하고 관리소장들은 직원들 월급도 떼어먹고, 보통은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수도 검침을 하면 그걸 직원들에게 시키고 N분의 1로 수당을 주는데, 일하지도 않은 관리소장이 그 수당을 챙겨간다. 회장이 된 후 서류도 챙겨서 보고 더 관심을 기울이자 크고 작은 비리들이 보이더라. 대외적으로는 관리소장님 연세가 많아서 교체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비리 문제가 있었다. 더 젊은 관리소장님으로 교체되었고, 필요 이상으로 책정된 관리소장 인건비를 낮추고 그 금액으로 직원들 월급을 올려줬다. 예전에는 초등학교 운영위원도 해봤고, 지금 도서관운영위원도 하고 있다. 앞으로 새마을금고 이사도 해볼까 한다. 이런 일들을 맡다 보니까 지역사회를 더 잘 알게 되고 변화를 이끄는 일에 쓰임 받는 것 같아서 좋다.

― 하석범 목사님, 남기업 소장님 두 분의 공통점은 사안을 투명하게 공개하려다가 핍박이 시작된 점인 것 같다.
기업 : 나에 대한 해임이 거론된 시점이 내가 회의록을 공개한 때부터였다. 내 상식에선 입주자들의 알권리를 위해서 당연히 회의 내용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주자 중에는 결과뿐 아니라 토론 내용도 궁금한 분들이 있을 거 아닌가. 그런데 동대표들 중 일부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회의록 공개를 반대했다. 그렇게 사생활이 보호되고 싶은 사람이 왜 공적인 직책을 맡았는지 모르겠더라. 아파트 공금 몇십 억 원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이지 결정하는 회의인데, 사생활 보호가 우선되어야 하겠나. 동대표들 중 공적인 마인드가 약한 분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다.

석범 : 공감한다. 입주자대표 선거가 있을 때 내가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시도한 게 공청회 개최였다. 아프리카TV로 생중계하고, 주민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객관적인 자료와 공약 등이 공유되면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동안 ‘어둠’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부터 폭언과 협박을 들어야 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일을 진행하니까 1년 넘게 나를 쫓아내려고 했다. 여전히 방해하는 분들이 있으나, 나는 재밌게 즐기면서 하고 있다. 많은 입주자들의 지지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 그분들이 폭언과 협박까지 일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남기업 소장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 이들이라 회의 내내 야유와 조롱, 모욕을 준다. 3개월 내내 시달리다 보니 회의 때 평정심을 찾기가 힘들더라. 큰소리가 나오고, 욕이 나오고…. 회의 전날에는 마음이 불안해 잠도 잘 안 온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기업 : 한 달에 한 번씩 회의하는 데 너무 힘들다. 열다섯 명 정도가 모이는데 그중 상식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네 명 정도? 그분들은 다 조용한 분들이다. 다른 분들은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 이들이라 회의 내내 야유와 조롱, 모욕을 준다. 3개월 내내 시달리다 보니 회의 때 평정심을 찾기가 힘들더라. 큰소리가 나오고, 욕이 나오고…. 회의 전날에는 마음이 불안해 잠도 잘 안 온다. 

상환 : 남 소장님이 입주자대표회의 들어와서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게 싫은 거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가 박탈되는 것 아니겠나. 정상적인 절차로 선출된 입주자대표 회장에게 딴죽을 거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서로 나눠 가지던 카르텔이 그만큼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다.

기업 :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꺼내자면, 내가 18기 회장인데 16기 동대표 중 한 명이 내 동서였다. 당시 아파트 페인트 공사를 할 때의 부정을 덮으려고 내가 18기 회장으로 나왔다는 게 나를 쫓아내려는 이들의 주장이다. 페인트 공사 서류를 보면 이상한 부분도 있다. 법적 책임은 애매해도 도의적 책임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내가 수원시 감사를 받자고 했다. 불법적인 부분이 드러나면 법적 절차를 밟자고 제안했다. 거절하더라. 과거 자기네들이 저지른 일까지 다 발각될까 봐 그런 것 같다. 감사를 추진하려면 주민 10분의 3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주민들 직접 만나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고 감사를 추진하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감사보고서가 나오면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할 계획이다.

상환 : 몰상식이 관행이 되어 있는 곳도 많다. 시골에서는 마을 이장 뽑으면서 그 공고를 노인회장이 낸다. 노인 회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동대표가 왜 관여하느냐’며 되레 기분 나빠 하더라. 통장이나 반장이 공고를 내는 게 맞는 거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목소리 크거나 힘 있는 사람이 이긴다. 국회가 어쩌고저쩌고, 민주주의 어쩌네 하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더 취약하다.

―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라고 하면 교양 있는 분들이 모일 것 같은데 아닌가? 하석범 목사님의 경우, 명예훼손으로 동대표를 형사 고소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동대표 33명을 검찰에 고발했고.
석범 : 33명의 업무상 횡령죄가 파악되었다. 처음엔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했고, 한 달 보름 정도의 시간을 드렸다. 그런데 오리발을 내밀고, 법규 위반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더라. 10여만 원의 횡령금만 반환하면 되는 거였으나 끝까지 버티더라. 그래서 고발했다. 형법을 통하고 국가기관에 고발하지 않으면 자체적으로 해결되기는 매우 어려운 구조이다. 일 처리 과정에서 동대표 몇 사람에게 폭언과 협박을 듣기도 했다. 조폭 같은 사람들도 있다. 내가 목사라고 우습게 보는 거였나 싶더라. 어느 동대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주민들 앞에서 공개 사과시키고 유튜브 영상으로 공개했다. 그리고는 사퇴시켰다. 민주주의 장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외부 감사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비리들도 참 많다. 그 틈은 결국 깨어있는 시민, ‘깨시민’들이 메꾸어야 한다.

― 보통 어떤 분들이 동대표를 하는지?
기업 :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직업이 있는 사람은 동대표를 안 하려고 한다. 바쁘지 않나. 보통은 은퇴해서 시간이 좀 있고 심심한 분들이 한다. 동대표가 되면 관리사무소에서 극진히 대접해주기도 하고. 한 번 동대표를 하면 계속 ‘대표님’으로 불린다. 그런 분들로 동대표가 구성되니까 관리소장은 그런 분들 기분 맞춰주면서….

석범 : 우리 아파트도 그렇다. 그래서 주민들을 계속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민들 중 부지런한 사람들이 국토교통부 등에 정보공개 요청하면 알아볼 수 있는 게 많다. 누군가 해주면 좋겠지만, 자기가 하기엔 귀찮은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기업 : 난감한 게, 정치 돌아가는 거랑 비슷하다. 여야가 싸우고 그러니까 정치혐오 현상이 벌어지지 않나. 우리 아파트도 ‘남기업 자른다’고 서로 싸우니까 아파트가 뭔가 시끄러운 것 같고, 오히려 사람들이 아파트 일을 기피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다.

석범 : 대다수 동대표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선동하는 몇 사람이 분위기 흐리고 판을 만든다.

―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한 동대표들과 아파트 비리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겠다.

   
▲ 고상환 사무처장 "돈이 있는 곳에 사람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나. 업자들, 관리소장, 입주자대표 등 나눠 먹을 생각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상환 : 외부 감사도 용역관리 업체와 밀착해서 원하는 대로 숫자만 맞춰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빈틈이 많다. 그러나 입주자 중 세입자가 많으면 그분들은 정말 관심이 없다. 관리소장들은 동대표에게만 잘하면 된다. 내가 회장이 되어서 서류들을 보니 사소한 것들도 너무 안 지켜지더라. 비리가 적지 않았다. 보통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는 업체가 최소 20개는 넘는다. 최근에는 야시장까지 열리지 않나. 그 업체들만 관리해도 ‘떡고물’이 떨어진다. 리베이트(소개료)가 만연하다. 누가 마음먹고 달려들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는다. 아파트의 숨겨진 이권 중 하나가 장기수선충당금이다. 주요 시설의 교체 및 보수에 필요한 금액을 모아놓는데, 승강기 교체하는데 몇억 원 이상이 든다. 통상 리베이트가 10~20%이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나. 업자들, 관리소장, 입주자대표 등 나눠 먹을 생각하고 있다.

석범 : 업체 계약을 앞두고 업체에서 동대표들에게 와인도 돌리고 배도 돌리고 했다. 그런 것 받으면 안 된다. 정보공개 요청해서 대상자들 알아내고, 다시는 받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OK’ 하면 해결될 일을, 잘못이 없다고 또 우긴다. 온라인카페에 터뜨려 버렸다. 이슈가 터져야 정신을 차린다. 나는 동대표들 44명에 관한 데이터를 만들어 놨다. 사소한 것은 대화로 풀고, 공익을 심하게 훼손했을 때는 공개한다. 눈치 있는 분들은 이제 조심한다. 남 소장님도 공개 온라인카페를 하나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주민을 등에 업고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 입주자대표회의에 일반 입주자가 참관할 수 있나?
기업 : 지난번 회의 때 10명 정도가 참관하러 왔다. 나를 쫓아내려는 이들은 상당히 불편해하는 것 같더라.(그래도 야유와 조롱은 계속되었지만) 입주자대표회의는 누구나 참관할 수 있다. 미리 신청하는 절차가 있다. 기자님들도 한번 가봐라. 가관일 거다. 참관을 싫어하는 동대표들의 공통 특징은, 세월호 이야기 싫어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거 싫어하는 거더라. 우리 아파트 단지는 1,600여 세대가 산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다 보면, 투명한 아파트 운영을 바라는 주민들이 더 나설 것이다.

석범 : 주민들이 몇 명이라도 조를 구성해서 주기적으로 회의에 참석하기만 해도, 아파트 운영 방식이 훨씬 깨끗해질 거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몇 사람이라도 참여하면, 분명 달라진다.

상환 : 교회와 비슷하다. 교인들이 공동의회나 제직회 같은 데 잘 참여 안 한다. 자연스럽게 당회장과 장로들이 더 쉽게 교회 재정을 주무른다. 그렇게 권력과 물질을 나눠 갖기 쉬운 구조가 탄생하는 거다. 우리 사회도 똑같이 굴러간다. 우리 아파트는 300세대라서 두 분 아파트보다 규모가 작은 편인데도 1년 예산이 10억 원이 넘어간다. ‘한 사람’이 관심 두지 않으면 그냥 새나가는 돈이 많다. 어느 누군가가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해서, 자기 집만 전기세와 수도세 0원 나오게 해달라고 하고 거래하면 그게 얼마든지 가능한 현실이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세 분 모두, 일상에 뿌리내리고 민주주의에 관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석범 : 많은 사람들이 4년에 한 번, 5년에 한 번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 저마다의 논리로 투표하면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듯 착각하는 것 같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2년에 한 번 반짝 투표하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듯 착시효과가 있다. 그러나 매일 일상에서 여러 정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주민들이 이를 비판적으로 책임감 있게 바라볼 때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것이다. 마을에서 먼저 민주주의를 맛보고 경험하지 않으면, 국회 정치도 지금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기업 : 오히려 국회보다 못한 것 같다.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내가 줄곧 연구한 분야가 토지정의와 경제정의였는데 정작 내가 사는 마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 않았나 싶었다. 사회를 변화시키겠다고 힘줘 이야기했으나 마을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갈등에 무관심했다. 마을에 들어와 회의에 참여해 보니, 국회보다 더 엉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환 :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현장들이 참 많다. 학교, 아파트, 지자체 등이 결국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비리의 소굴이 된다. 비리의 일상화 현상이 가속화된다. 남 소장님이나 하 목사님처럼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분투해야 한다고 본다. 순리대로만 하면 된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민주주의 회의대로만 하면 된다. 물론 아주 비정상적인 질서 속에 들어가 ‘상식’을 외쳐야 하기에 남 소장님처럼 많은 핍박이 있겠지만….

석범 : 우리 아파트는 5,500세대가 넘는다. 한 세대에서 1천 원씩 모여도 5백만 원이 넘는다. 마트에서 장 보고 계산할 때 ‘봉툿값 50원’이라는 말에, 돈 아끼려고 채소 담는 봉지에 물품 담아가는 분들이 정작 아파트 공금이 쓰이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서구사회는 초등학교 때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하니까 마을 자치도 잘 이뤄지는데 우리는 개념 이해도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민주적인 자치 문화를 만들어 보려고 검찰 고발도 진행하고 하는 거다. 마을신문을 만들어서 청소년들도 ‘1일 기자’로 참여하게 하려고 한다. 청소년 기자들이 학교에서 봉사 점수도 받을 수 있게 추진할 계획이다. 현대인들은 아무리 강요해도 안 한다. ‘먹이’를 만들어서 끌어들여야 한다.

   
▲ KBS <취재파일K> "입주자 대표가 뭐길래" 편에서 남기업 소장.

기업 : 목사님은 계속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일단 살아남기에 급급하다.(웃음)

석범 : 무조건 살아남으셔야 한다. 책임이 막중하다. 대다수 아파트가 처한 뒤틀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대표’라 생각하고, 좋은 이정표로 남으셔야 한다.

상환 : 그렇다. 꼭 버티셔야 한다. 입주자대표회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공금이 사적으로 유용되고, 공동체는 파괴된다. 두 분 모두 유의미한 일을 하고 계시기에 존경스럽다. 하 목사님 경우도 참 특별하다. 보통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은 노인들이 많이 한다. 주로 관리소장이 시키는 일 하는데, 집집이 찬성/반대 투표용지에 도장 받는 일 같은 거다. 선관위 활동비가 나오기 때문에, 노인들이 알바 수당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 목사님은 제대로 하지 않나. 목회자들이 아파트 선관위원장 많이 했으면 좋겠다.

석범 : 아파트 온라인 카페에서 활동하다가 ‘선관위원장’ 해달라고 해서 맡았는데, 처음 회의 때 가서는 놀랐다. 나를 머슴 대하듯 하더라. 청문회도 했다. 두 번째 모임부터 ‘삼권분립’ 등 이야기하며 따졌다. 한두 달 지나니까 ‘이 사람은 좀 다르구나’ 다들 감지하시더라.(웃음) 나한테 선관위원장 맡아달라고 했던 분들은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환 : ‘기독교 정치운동’이 다른 게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뜬구름만 잡아왔던 게 아닌가 한다. 생활에 밀착한 데서부터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바닥부터 정치를 이해해야 그게 오랜 기간 쌓여서 국회 정치도 개혁이 된다. 갑자기 대스타가 등장해서 비례대표가 돼 국회의원 된다고 어떤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나. 마을에서부터 이장, 통장, 반장 하다가 시의원이 되는 구조가 되어야 우리사회에 건강한 정치가 깃들지 않겠나.

   
▲ 전국 429개 단지 중 312개 단지(72%)에서 총 1,255건의 비위 또는 부적정 사례가 적발됐다.

― 왜 이런 일을 하시나?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이런 활동을 하는 데 영향을 끼쳤나?
석범 :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육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고 호흡하는 공간은 바로 마을이다. 이 공간에서 신앙 행위가 이뤄진다. 나는 이 공간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겐 이것이 목회이고 신앙이고 삶이다. 예수께서 세속 공간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되심을 보여주었듯, 우리도 성육신으로 이 공간을 점유하는 게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에겐 선교이자 전도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주민들 용어로 호흡하면서 소통하고 있다. 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용어들 다 빼고 마을, 학교, 직장에서 세속의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의 영역에서 성육신을 고민하고 구현하는 것, 그것이 일상의 민주주의이면서 동시에 신앙 아닐까.

상환 : 예전에 김동호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했다. 평일에 교회 나오지 말고 통장, 동장 하라고. 그게 더 가치 있다고. 기독교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입주자대표회의에 가서 중심만 잡고 있어도 마을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 목사님처럼, 중심 잘 잡고 가니까 아파트가 바뀌지 않나. 한 사람만 중심을 잡고 있어도 그 공동체는 썩지 않는다.

기업 : 3월 말쯤인가 정말 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다 지난 고난주간에 묵상을 하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는 것이다. 평소 강의할 때나 이야기하던 것이 실제 내 삶에서 체험이 되니까 이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되더라. 내가 겪는 고난이 십자가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거라는 생각에 감사했다. 나 같은 사람도 십자가를 질 수 있구나, 눈물이 나더라. 물론, 이런 깨달음과 감사 때문에 기존의 어려움이 쉽게 상쇄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난의 의미를 알았기에 ‘끝까지 가보자’ 하는 신념이 생겼다. 내가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저들이 가장 바라는 일 아니겠나.

― ‘공동체’에 관한 고민과 닿아있는 것 같다.
기업 : 지금은 아파트가 하나의 마을이지 않나. 나라 전체를 확 바꾸기는 어렵지만, 아파트 내에서는 열심히 하면 현실적인 성과가 나온다. 주민들이 모여서 여론을 만들면, 뭔가가 이루어진다. 이런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는 사회를 기대하고 있다.

 

석범 : 국민 70%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만 2만여 명이 산다. 도시 안에서 어떻게 마을운동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이전에 벙커원교회에서 ‘목사 아닌 목사’로 사역하면서, 비종교/타종교인들과 뒤섞여 ‘교회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다면, 지금은 마을을 대상으로 또 하나의 목회를 하고 있다. ‘하나님되심’이 어떻게 2만여 명이 사는 마을에서 이루어지는가 고민하고 실험하며 살고 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상환 : 사실, 아파트가 죽은 공동체 아닌가. 기독교인들이 시골로 가고 거기서 공동체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의 아파트 공동체를 살리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몇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할 수 있다. 도서관도 만들고 공부 모임도 만들 수 있다. 집에서 안 쓰는 물건 나누기도 하고. 경비원들의 최저생계비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야간근무수당도 챙겨 드리기 위해 토론하고, 어떻게든 부당해고는 막아주는 그런 공동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경비원들 중에  어려운 분들이 정말 많다. 정말 박봉인데, 용역회사에서 10~20%씩 가져간다. 기독교인들 맨날 ‘낮은 자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데, 경비실 아저씨들에게 밥 한 끼, 선물 하나 사드리는 것부터 시작해라. 불법적으로 유출되는 공금 막아서, 우리에게 주어진 예산 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런 분들 껴안는 방법을 모색해보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관리비 명세가 나오면 꼼꼼하게 살펴보고, 다른 아파트 관리비랑 비교해보고, 이상한 게 발견되면 관리소나 동대표에게 말하고, 개선이 안 되면 시청에 민원제기하면 된다. 자기 현실에 뿌리박아서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그게 정치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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