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호 무브먼트 투게더 Ⅰ] 2014 한국교회 교단총회 참관 후기

▲ 사진: 교회개혁실천연대 제공

올해도 역시 총회 첫날, 출입을 저지당했다. 참관단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에서 안수받은 목사도 있고, 소속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집사도 있었으나, 늘 그렇듯 불순하고 불온한 목적을 가진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 왜 출입이 저지되어야 하는지 항변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밀쳐지기도 하고, 멱살을 잡히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여성 안수나 세습 반대와 같이 민감한 사안에 대한,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피켓이라도 들면, 피켓 사수 작전도 빈틈없이 짜야 한다. 언제 또 나의 옆구리로 비수 같은 우산이나 막대기 따위가 날아와 ‘문제의’ 피켓을 부서뜨릴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총대들에게 조심스럽게 우리의 생각을 설명해간다. 총대들의 불편한 시선이 우리들의 면전으로 쏟아지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총회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린다.

위상에 걸맞은 책임을…
교단의 최고 결의기구인 총회는 그 지위에 걸맞은 위상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교회들이 교인총회에서 제직자를 선출하고 한 해 살림을 평가하고 계획하듯이, 교회의 광대회의체 성격을 가진 교단도 매년 가을 정기총회를 통해 교단의 주요 현안을 검토하고 결의한다. 총회는 소속 지교회와 노회, 소속 신학교 및 산하기관의 운영을 감찰, 감독하고, 헌법을 제정, 개정할 수 있으며, 각종 의안을 처리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교회를 바르게 이끌고 선도할 책임 또한 그만큼 크다.

적게는 600명에서 많게는 1,60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의 총대들이 모여, 4~5일 동안 주요 현안을 다룬다. 회무 처리 기간에 발생한 교통비와 숙박비, 식비 등의 부대비용은 소속된 교회들이 낸 상회비로 충당한다. 간혹 교단 내에서 막강한 성도 수를 자랑하는 대형교회에서 총회를 치르게 되면, 막대한 수의 신도를 투입해 봉사단을 꾸리고, 총대들에게 끼니마다 만찬이 제공되는 등 ‘서비스’의 질이 월등히 높아지기도 한다. ‘성공적인 총회 개최’를 위해 ‘헌신’한 공로에 대한 치적은 고스란히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에게 돌아간다. 

고질적 부패와 소모적 정쟁을 일삼는 국회 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많은 시민(단체)들이 국회와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감시하면서, 유권자의 힘으로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그러나 우리의 교단들은 그 누구의 감시와 통제도 받지 않는다.

한국 교단 중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는 합동 총회는 소속된 교회만 1만 1천 개가 넘고, 목회자는 3만 명, 교인 수는 285만 명에 달한다. 1년에 100억 원이 훨씬 넘는 예산을 집행하지만, 소속 교회와 교인들은 총회에서 어떠한 현안이 다뤄졌으며, 무엇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합동 총회는 ‘노래주점 출입 사건’ 등 구설에 휘말릴 때마다 용역을 동원하여 총회 출입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언론을 통제해왔다. 2012년에는 황규철 총무가 회의석상에서 가스총을 들고 총대들을 위협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그러나 총회는 황 총무에게 한 번도 총회 파행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심지어 연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4억 원을 받아 챙겨도, 약속이나 한 듯 총회 임원들과 총대들은 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교단 언론들 또한 잠잠하기만 하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총회는 여전히 교회와 교인들 위에 군림하며, 자리다툼과 규모 경쟁이라는 욕망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교단들의 총회 운영이 그 책임과 권한에 걸맞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으며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추어 교회의 역할을 선도할 수 있는 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요구들이 있었다. 소모적이고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오늘의 총회 현실을 보고 있자면, 과연 한국교회의 건강한 내일을 설계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선교적 비전을 창출할 수 있을지 회의감만 커진다.

‘여성’은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
《교회와 제2의 성》은 제2바티칸 공의회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1965년 9월에 내가 그 축제에 가지 못했었더라면 저술되지 않았을 것이다. … 한 달 동안 방문했던 로마에서의 매일 매일은 놀라운 것이었다. … 나는 기자 신분증을 빌려서 주요한 회의 중 하나를 보러 성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갔다. 언론인들에게 지정된 구역에 앉아서 나는 멀리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무리를 보았다. 크림슨 빨강색의 노인 남성들이었다. 대성당의 또 다른 구역에 ‘청중들’이 있었다. 소수의 가톨릭 여성집단이었는데 대다수가 머리에 베일을 쓰고 길고 검은색 옷을 입은 수녀들이었다. 거만하게 보이는 화려한 색깔의 ‘교회의 왕자들’의 복장과 초라하고 자기격하적 태도와 침울한 의상을 입은 소수의 여성들의 대조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이었다. … 연설문들이 회의에서 읽혀졌으나 모두 남성의 목소리들이었고, 연로한 빨간 옷의 남자들이 푸념하는 소리였다. 소수의 여성들, 수녀들은 유순하게 앉아서 … 문서들이 읽혀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 여성 청중들은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것에 대한 고마움을 반복해서 표현했다.
- 매리 댈리, 《교회와 제2의 성》(여성신문사), 262~264쪽■

매리 댈리가 묘사한 1965년의 가톨릭 공의회의 모습과 오늘의 교회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 그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회의장 안에 남성 교회지도자가 있다면, 회의장 밖에는 봉사하는 여성 헌신자가 있다. 다만 그들은 단출한 검은색 의상이 아닌, ‘화려한’ 형형색색의 한복을 맞춰 입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교회의 특별 행사 때 왜 양복을 입은 남성, 한복을 입은 여성을 보게 되는 걸까? 언어가 그러하듯 의복은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역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여성 교인은 순종적이고 전통적인 모습으로 남아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무의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참관 기간 내내 총회에 상주하면서 겪는 불편은 한둘이 아니겠으나, 특히 여성 참관자들이 호소하는 불편은 여성 전용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일이다. 총회장 안에 여성이 존재한다는 걸 크게 염두에 두지 않으니 굳이 여성 화장실이 필요 없는 것이다.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일부 교단의 시대착오적 발상은 한국교회 내에서 여성의 위상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교회의 절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여성은, 합동 총회를 비롯한 일부 교단에서 여전히 회원의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최근 총신대 운영이사회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과정에 ‘노회 추천 목사후보생만 입학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헌의안을 통과시켜, 여성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결정을 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비록 철회되기는 했으나, 이 계기를 통해 총신대 여학우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30명의 여학우가 스스로 입장을 정리한 문건을 배포하고, 자신들도 당당한 총신대의 일원임을 밝혔다. 이들의 선배들은 졸업 후 전도사와 선교사(때론 사모)로 활동하는데, 선교 현장에서 성례권이 없는 여성 선교자들의 목회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 세례나 성찬을 집례하려면, 성례권이 있는 남성 선교사나 목사들을 사역지로 불러야 한다. 여성 사역자들이 장기적으로 할 수 없는 이유다.

매년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 보장 제도를 마련해달라는 헌의들이 올라오지만, 절대다수의 남성 총대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노회에서 알아서 하라고 떠넘기거나 결론 나지 않을 ‘연구 과제’로 남기면 그만이다.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총회, 체질 개선이 먼저다
총회는 일반적으로 노회에서 동수로 파견된 목사와 장로만으로 구성된다. 목사는 교회의 공동의회를 통해 청빙 되고, 장로는 공동의회에서 선출되어, 노회를 거쳐 총회 회원이 되는 대의제의 대표로서 위상을 가진다. 문제는 이들이 임기에 제한이 없는 종신직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여성과 청년들은 소외되고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는 전문적 선교역량을 가진 이들도 배제된다. 일반적인 교인들의 필요와 현실을 반영하기보다는 목사와 장로의 이해관계와 정치관, 신앙체계가 반영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들에게, 당신들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지를 알려주는 일은 얼마나 불순하고 불온한 일이겠는가.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지난 10년간 주요 교단의 총회를 참관하며,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발언 기회가 편중되지 않고 원칙대로 부여되고 있는지, 총회장이 고압적인 태도로 총대들을 대하지 않는지, 성차별적이고 비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는지, 총대들은 총회 참석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 등 총회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생물학적 성을 ‘여성’으로 부여받았다는 이유로, 임직 헌금이 강요되는 현재의 교회에서 장로가 되기를 포기한 이유로, 담임목사를 보좌하도록 선택된 부교역자라는 이유로, 교회 정치를 책임지기에는 너무 젊다는 이유로, 총회장 안으로 들어설 수 없는 이들과 함께….

이들은 교회 앞에서 피켓시위로 의견을 전달하고, 점잖기만 할 줄 알았던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기록한다. 그렇게 교단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오늘의 교회를 증언한다. 성공지상주의의 가치를 숭배하며 엄청난 힘과 권력을 소유해온 한국교회가 교회 안팎으로 그 힘을 어떻게 남용해왔는지,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훼손했는지, 오늘의 교단 현실을 보며 스스로 각성하여야 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불의한 교회 권력에 짱돌을 날릴 수 있도록, 맷집을 키우자 다짐한다. 

2015년에 장로교 총회는 100회를 맞이한다. 교회 간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교회의 몰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태도로 인해 공신력은 바닥을 치고 있다. 교황의 방한으로 가톨릭의 세가 높아갈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교황이 보여준 참된 교회가 가져야 할 가치 실현에 동참할 의사는 없다. 물량을 앞세운 각종 행사와 이벤트가 즐비할 것이고, 100회라는 숫자가 주는 성취감에 취해 현실의 불안은 망각될 것이다. 자축보다는 각성이 답이다. 더 이상의 해답은 없다.  

■ 2014년 교단총회 참관 결과보고서는 교회개혁실천연대 홈페이지(protest2002.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애희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