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네팔 어린이 노동자들 돌보는 바보들꽃 강선규 대표

   
▲ 카트만두에서 5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산악지대의 꾸리마을. 170여 가구 중 9명이 사망했고 1300여 명 전원이 집을 잃었다. 바보들꽃은 계획했던 양철지붕 공급을 5월 13일에 진행했다. (사진: 바보들꽃 제공)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나라” 네팔에 지난 4월 25일 강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언론은 매일 집계되는 피해 상황과 사망자·부상자 수를 앞다퉈 보도하느라, 구호단체들은 긴급구호 캠페인을 벌이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구호품 배분이 정치인의 고향에 집중된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 네팔 NGO단체 대표가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밝힌 얘기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가공한 자연재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지만, 특히 부모를 잃은 아동들의 경우 그 슬픔과 고통에 더해 당장 ‘생존’의 위기 앞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국제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은 이번 네팔 대지진의 전체 피해주민 810만 명 중 아동이 40%에 달하는 320만 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네팔의 대참사에 더욱 애를 태우는 국내 NGO가 있다. 네팔 어린이 노동자의 교육을 지원하고 삶을 돌보는 ‘바보들꽃’(대표 강선규)이 그들이다. 그저 ‘후원금’을 보내고 ‘학용품’을 지원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동노동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네팔에서 생계를 위해 ‘돌을 깨는 노동’을 해야 하는 어린이 노동자들의 교육을 위해 네팔어로 된 책을 펴내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지원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이들처럼’ 뛰놀며 자라도록 전인격적으로 보살핀다. 바보들꽃이 현재 돌보는 80명은 적은 수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고 굴곡진 80개의 세계다. 결코 가벼울 리 없다. 그나마 돌 깨는 기계가 속속 유입되어 그 일도 계속하기 어려워 졌는데, 이번 대지진으로 상황은 더 어두워졌다. 지난 5월 초 서울 창천동 카페바인에서 바보들꽃 강선규 대표(50)를 만났다.

- 바보들꽃을 설립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들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해달라.
실제 일을 한 지는 20년이 넘었고, 현재 주력하는 일은 네팔 어린이 노동자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돕는 일과 출판이다. 학교에 갈 수 있게 힘쓰고, 그 아이들을 위한 교육 교재를 만들고, 읽을 만한 네팔어 어린이책을 펴내고 있다. 네팔에 설립한 출판사 메로사티(내 친구)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을 쪼개어 내는 중이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제3세계 빈곤아동들에게 진정한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의 전기도 몇 권 작업을 마쳐간다. 그렇게 ‘세상의 아름다운 책들’ ‘세상의 아름다운 사람들’ 시리즈를 기획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
애초 외국인 노동자 쉼터를 운영하면서 이주노동자의 인권 관련 일을 했다. 외국인노동자에게도 법이 명시하는 대로 산재 보상을 적용하라고 요구하는 긴 과정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열아홉 살에 한국 와서 오른손가락 네 개를 잃은 네팔 여성 먼주 타파 씨와 연이 닿았다. 그가 네팔로 돌아가서 노동조합 지폰트(GEFONT)에서 어린이 노동자 분야 일을 맡으면서 함께 일을 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네팔 관련 NGO 활동은 대부분 기아문제 해결이나 긴급구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타파 씨에게 ‘어린이 노동자 학교 보내기’ 프로젝트로 국제노동기구(ILO)에 사업 지원을 요청해 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프로젝트가 통과되어 ILO가 200명의 어린이 노동자에게 재정 지원을 했으나, 네팔 왕정이 무너지기 직전으로 접어들면서 내전 상황이 심화됐다. 결국 1년 만에 지원이 끊겼다. 타 구호 단체들도 네팔을 빠져나가는 분위기였다. 아이들 사정은 더 안 좋아졌는데 지원이 끊긴 거다. 우리라도 그 일을 조금이라도 이어받아야겠다는 생각에 2005년 네팔로 가서 현지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 네팔 정국이 더 불안정해진 시기에 현지 실태조사라… 무섭지 않았나?
글쎄, 평소 공포영화도 못 보고, 밤에 어두운 골목길은 못 다니는데, 죽음은 안 무서운 것 같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지 않나. 네팔 어린이들 만나러 다니고 학교 몇 명 더 보낸다고 세상이 확 변할 일도 아니고, 네팔이 급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때 그 일이 하나님이 우리(바보들꽃)에게 주신 일이었다. 그 일을 위해 자꾸 움직이라 하시는 것 같고, 그러려면 현장을 모르고서 무턱대고 할 수는 없으니까 간 거다. 거기 갔을 때 무슨 큰일이 나진 않았다. 내전 상황이 심하니까 총 든 사람들이 계속 검문을 하는 통에 차에서 내렸다 타기를 반복하고, 도로 사정이 극도로 나빠서 몸이 힘들고, 길가 낭떠러지에 걸쳐진 차들을 목격하는 정도였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그런 상황에서 학교에 보낼 아이들은 어떻게 모았나?
세계 각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다가 산재보상도 못 받고 귀향한 산업재해자 자녀와, 15세 이하 불가촉천민 어린이 노동자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아이들이 마을 단위로 몰려 있어서 활동가 한 명이 한 지역을 책임지는 식이었다. 25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80명이 되었다. 네팔에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지만, 현실적으로 교복값은 물론 부대비용을 댈 수 없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다. 부모 입장에서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노동 시간을 빼앗기는 학교 보내기 자체를 꺼리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도 공부 생각이 들 수 없다. 그냥 학비 지원하고 학교 가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다. 엄마나 아빠가 아파서 약값을 벌어야 해서 학교에 갈 수 없거나, 찾아가 보면 부모님이 이주노동 가고 없어서 자기들끼리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부모님 약값을 지원하고, 아이들 밥부터 먹인다. 동생이 태어나서 분유값을 벌어야 하는 아이에게 동생이야 어찌되든 학교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땐 먼저 동생을 먹여야 한다. 부모와 아이를 설득하고, 필요를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계속 격려하고,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하기에 일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난다.

-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겠다. 비교적 쉬운 다른 일도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어린이들에게, 특히 교육에 집중을 하는가?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도 어린이다. 우리가 네팔에서 하는 일을 ‘희망의 언덕’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다. 네팔은 출생이 차별의 근거가 되는 문화가 여전하다. 카스트(caste) 제도가 공식적으론 없어졌지만 자기 성만 밝혀도 그 계급을 알 수 있고 사람들 의식에도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누군가는 문화라고 말할 테지만,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약자가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구조를 그저 문화적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바보들꽃의 아이들도, 하위계층 아이들은 늘 자기보다 상위계층 아이들에게 기본적으로 기가 죽는다. 똑같이 가난해도 천민계층 아이들은 브라만(승려) 계급 아이들 앞에서 절로 움츠러든다. 동의할 수 없다. 외부인인 내가 말하기는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교육이 중요하다.     

- 학교에 다니게 된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변화되는 게 보이는가?
학교 수준을 우리나라 상황에 비춰 생각하면 안 된다. 네팔은 지역 학교에 교사도 거의 없고, 학교 간다고 해도 말 그대로 ‘놀다 온다.’ 생각이 자랄 수 있는 교육은 어려운 현실이다. 학교 가는 시간만큼이라도 아이들이 노동에서 해방되어 아이답게 놀 수 있는 게 좋고, 그게 우리 일의 우선되는 목표다. 거기에 더해, 아이들 생각이 자라나는 교육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읽고 생각하고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평생 취약한 노동자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는 분명히 다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지 2년 만에 어린이 노동자 캠프를 기획했는데, 재정과 인력 사정으로 3년에 한 번씩 연다. 카트만두에서 첫 회를 열었는데 교육적 효과가 정말 좋았다. 학교를 왜 가야 하는지 모르던 아이들이 학교 가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됐다. 자기 상황을 객관화해서 볼 줄도 알게 되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보였다. 

- ‘어린이 노동자 캠프’를, 그것도 네팔 현지에서 진행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캠프는 모든 어린이가 대상이지만, 가정부로 일하는 아이들은 주인이 안 보내줘서 못 오는 경우가 많고, 교사가 지역 버스로 열두 시간 걸리는 곳으로 데리러 가고 데려다줘야 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쉽지는 않았다. 변변한 옷도 없고 신발도 없고. 그러면 옷과 신발부터 사 입히고 신겼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 교재도 캠프를 통해서 필요를 깨닫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캠프를 한두 회 거치면서 기본적인 교육 교재가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매번 새롭게 프로그램을 짜는 것은 무리였다. 1회로 끝내기엔 아까운 프로그램들이기도 해서 교재 만들기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기획했다. 작년 1월 열린 3회 캠프에서 네팔어로 출간된 첫 교재를 사용했고, 55명 정도 아이들이 참여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어떤 내용이 교재에 담기나?
실질적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어린이 노동자의 권리를 담고, 그동안 만나온 네팔 노동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예시로 들어간다. 네팔 활동가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한편, 주로 한국 활동가들이 기획회의를 하고 콘셉트를 잡아서 내용을 채운다. 그리고 그림으로 전달할지, 노래로 전달할지, 아니면 다른 새로운 방식이 있는지 가능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한다. 그 다음엔 교재 실습 주간을 가진다. 유아교육 및 초등교육 선생님들이 자원봉사자로 와서 그 내용을 갖고 모의 수업을 하는 거다. 선생님이 수업 상황에서 해야 할 말까지 다 기록해둔다. 네팔 선생님들 스스로 이런 식의 수업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수업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 

이 교재는 시리즈로 계속 내고 있고, 다섯 번째 교재를 마무리 중에 있다. 네팔어로 나온 첫 교재는 이미 현지에서 활발하게 사용된다. 현지 교회나 아동, 여성 단체들이 세미나를 요구해온다. 상황이 비슷한 제3세계권 아이들에게도 유용해서 비슷한 일을 하는 활동가들이 우리 교재에 호응한다. 현지 출판사 메로사티에서 네팔어로 된 좋은 아동도서도 계속해서 출간할 거다. 이전에 네팔을 방문할 때면 아이들에게 책을 나눠주곤 했는데 네팔엔 지금까지 출판된 어린이 책이 천 종이 못되니, 계속 나눠줄 책이 없더라. 내용이 검증되지 않은 책도 많다. 영어 번역서들은 싸고 많지만, 영어를 읽고 쓰는 계층은 상류층이니 우리 아이들, 어린이 노동자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게다가 독서 훈련 자체도 되어 있지 않고. 네팔은 그래도 모국어가 있는 나라인데, 자긍심과 민족성이 녹아 있는 네팔 아동 문학서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모하게 뛰어들었다. 네팔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권장되는 상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네팔인들이 자꾸만 자기 언어를 잃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 네팔어로 교재와 어린이책을 만드는 일이 수월치 않겠다.
정말 쉽지 않다. 아동도서는 저작권이 소멸한 고전들 중에서 선별해서 펴낸다. 한국어로 만드는 교재는 네팔어 직번역이 어려워서 중간에 영어 번역 단계를 거친다. 그래도 반드시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네팔 아이들이 스스로 고국의 좋은 변화를 위해서 일을 하게 되는 것, 그게 바보들꽃의 소망이다. 최근에는 양질의 교육을 위해 네팔 현지에 교사대학을 준비하려고 한다. 처음엔 기숙학교를 생각했는데, 스터디 모임을 진행하면서 한 지역에 고정된 학교를 세우는 일보다는 좋은 교사를 양성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고 나면 우리 프로그램으로 열악한 지역 학교들과 협력해서 ‘이동식 학교’를 열 구상을 하고 있다.

- 천천히, 정성스럽게 일한다는 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우리 일하는 방식이 품도 돈도 많이 든다. 아이들을 학교 보낸다는 것은 활동가가 지속적으로 아이들 가정을 방문하고, 그렇게 파악한 그들 형편에 반응하는 일이다. 기본권을 누릴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환경에 따라서 지원하는 비용도 다 다르니. 일률적인 1대1 결연 맺기는 적절하지 않다. 시간이 걸리고, 계속 지켜보는 게 중요하다. 일을 크게 벌이려 했다면 처음부터 매스컴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고, 학교 다니는 데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는 식으로 지원해서 더 많은 아이들, 수백 명의 대상자를 모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럼 활동가 한 명으로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유의미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부에 보여주기엔 좋을 수 있지만, 그러면 아이들의 ‘삶’에 접근할 수는 없을 거다. 절대로, 돈만 푸는 식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 원칙이다. 가능한 한 매스컴에도 나가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이 직접 보기는 어렵다고 하여, 그들의 상황을 우리 맘대로 언론에 노출할 수는 없다. 우리 단체도 유명해지고 인지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부패할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염려도 있고.

- 듣다 보니 왜 이름이 ‘바보’들꽃인지 짐작이 간다.
바보스럽게 일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에서 따온 이름이다. 기독교단체는 아니지만 일하는 사람이 다 기독교인이고, 일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이다. 예수도 바보처럼 살았다고 생각하므로, ‘바보’에다 연약한 듯 강한 들꽃의 이미지를 붙여서 이름이 탄생했다. 

   
▲ 작년 1월 제3회 캠프 때. 실내 수업 때(우)와 히말라야 산맥이 눈 앞에 보이는 곳으로 소풍갔던 날. 네팔에 살아도 지역에 따라 히말라야를 처음 보는 아이들도 많다.(사진: 바보들꽃 제공)

- 그럼 함께 일하는 바보‘들꽃’은 모두 몇 송이인가?(웃음)
나를 포함해서 한국의 상근 활동가 세 명, 네팔 현지인 네 명, 이렇게 일곱이다. 한국의 활동가는 도마와 요한인데, 지금까지 일궈온 운동의 결과로 자기 평생 먹고 살 길을 마련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늘 일이 어느 정도 갈피가 잡혀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철저히 뒤로 빠져나와 또 다른 필요를 찾아서 새 일을 만든다. 이렇게 얘기하면 두 사람은 난리 나겠지만, 일생을 바쳐 타인을 위해 살려고 태어난 사람들 같다. 존경하고, 사랑한다. 나는 그런 그들을 돕는 사람일 뿐이다. 그게 내 역할이고 내 일이다. 바보들꽃에서 나는 얼굴마담일 뿐이고, 그래서 지금 이러고 인터뷰 중인 거다.(웃음)

네팔 활동가들 중 디야는 우리가 돌본 어린이 노동자 출신이다. 소망하던 일을 직접 보게 된 첫 번째 케이스다. 처음 현지에서 아이들을 모집할 때 온 가정부 어린이였는데, 눈에 띄었다. 기자가 되고 싶어 했는데, 비교적 공부를 잘하긴 했어도 어릴 때부터 영국식 교복 입고 영어로 공부한 상류층 아이들을 뛰어넘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네팔에서 기자라는 직업은 실력이 있어도 연줄 없이는 불가능하다. 

네팔의 학제는 10학년이 지나면 한국의 수능과 비슷한 시험을 치고 12학년까지 칼리지를 다닌다. 이후에 유니버시티를 가는데, 디야는 11학년부터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서 인턴으로 참여했고, 유니버시티에 입학하면서 정식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더불어 감사한 건,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없는데 우리 아이들 중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아이들이 꽤 있다는 거다. 네팔은 기독교 인구가 3% 정도이고, 선교사님들이 활발히 활동하신다. 티벳 불교도 있지만 힌두교가 지배적이다. 

- NGO로서 바보들꽃의 후원 현황은 어떤가?
바보들꽃에는 상근 활동가들 외에 비상근 자원봉사자들도 수없이 많다. 책에 그림 작업을 하는 분도 계속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데, 이제야 겨우 말도 안 되는 실비를 드리기 시작했다. 후원자 관리라는 걸 거의 안 한다고 보면 되고, 1~2년에 한 번씩 후원자의 밤을 열지만 후원금에 대해서도 ‘믿고 보내주시면 잘 쓰겠다’고 하는 정도다. 이렇게 불친절한데도 탄탄한 지지와 관심, 후원을 지속해주신다. CMS 구좌를 튼 지 1년 반 정도 지났는데, 후원자가 많아졌다. 150명이 넘는다.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돈을 잘 사용하고 정말 필요한 일을 하려고 세심하게 노력을 기울이긴 하는데, 두렵다.

- 많아졌다고 해서 정말 엄청난 규모인줄 알았다. 그 정도 후원으로는 어렵지 않나?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일할 수 있는 정도로만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늘 채워진다. 네팔 현지 활동가들 임금은 제대로 나가고, 국내 활동가 둘은 정말 최저생계비에 가까운 급여를 받는다. 나는 쭉 무급이었는데, 동료 활동가들이 “그것도 안 받으면 일 못 시킨다”고 성화여서 교통비를 지원받는다. 내가 고용인인데 실제로는 ‘을’이다.(웃음)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현지 필요에 맞춰 유동적으로 일하는 바보들꽃의 특성상 우리를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이렇다 소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에 네팔 대지진 이후 후원자들로부터 정말 전화가 많이 왔다. 현지 사정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아서 이례적으로 후원자레터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후원자들이 먼저 요청해 와서 긴급구호 계좌도 열었는데, 목표액도 홍보도 없이 상당한 후원금이 모였다. 후원자들과 우리 아이들의 관계 밀착도가 높아서라고 본다.

지진으로 현지 활동가들의 집도 무너졌다. 바보들꽃이 돌보는 아이들 중 부모를 잃거나 죽은 아이가 없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랄까. 혹여 집이 무너졌다 해도, 지난날의 삶에 비해 당장 ‘엄청난 비극은 아니다.’ 1996년 발발한 독재왕정과 마오주의 반군 간의 내전으로 10년간 피를 뿌린 나라가 네팔이다. 지난 4월 25일에 이어, 5월 12일 오후 12시 50분 규모 7.3의 강진이 또 발생했다. 지진은 멈추더라도 네팔인들, 특히 어린이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그들’의 일은 바보들꽃에게는 결코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 없다. 

- 네팔 대지진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캠프도 열고, 오랫동안 아이들과 만나온 지역이라 그 아픔이 피부로 와 닿았을 것 같다.
우리 안에도 함께 지진이 났다. 처음엔 현지 활동가들과 도움 주시는 선교사님과 통화하면서 상황을 파악했는데,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상황이 되었을지 다 알겠으니까…. 그곳에 서면 중세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박타푸르나 파탄 지역도 다 무너졌다. 아이들 신변 파악하느라 전화 연락을 하다가 잠깐 전화가 끊겼을 때는 정말 암담했다. 특히 벽돌공장 아이들 상황이 파악 안 되었을 때는 발만 동동거렸다. 네팔 대지진은 우리에겐 (단순히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람의 얼굴, 아이들의 얼굴로 다가오는 일이다. 고통스럽다. 현지 활동가인 수다와 디야의 집도 무너져서 교회 건물과 텐트에서 기거하고 있고, 아직 여진 가능성도 있다. 사람들은 계속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지난 월요일(5월 4일) 동료 활동가 요한이 네팔로 향하면서 약과 긴급한 물품들을 챙겨 갔고, 나도 6월 1일에 들어간다.

- 이번 지진 이후로 어떤 변화가 닥칠까?
일단 바보들꽃 아이들은 정말 ‘가진 게 없어서 잃은 것도 별로 없다’는 말이 꼭 맞는 상황이다. 월세로 살던 집이 무너져서 새 거처를 구해야 하는데 들어갈 집은 없으니 고생이 더 심해지긴 했다. 우리 활동 방향을 포함하여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거다. 어차피, 하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새로운 필요를 보여주시면 그때 그때 반응하는 게 우리 방식이니까. 그런데, 어린이 노동자를 비롯하여 더 넓은 계층의 네팔 사람들이 대지진 이전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말이다.

네팔은 히말라야와 카트만두를 제외하면 사실상 관광수입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앞서 박타푸르나 파탄 공원 이야기도 했지만 이번 지진으로 네팔의 유적지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네팔 정부는 도로를 비롯하여 무너진 기반 시설들을 복구할 수 없으리라는 게 가장 걱정이다. 그나마 인도로 통하는 도로가 막히지 않아서 계속 식량이나 공산품은 들어갈 수 있겠지만, 외부인들이 네팔의 지진을 잊어갈 때쯤 그들의 일상은 훨씬 더 힘들어질 거다.

- 후원자들이 보낸 긴급구호금은 어떻게 사용할 계획인가?
네팔 사람들이 그런다. 이번 대지진에 신나서 떠드는 건 기자들, 배불러지는 건 정부일 거고, 구호금품은 제대로 분배가 안 될 거라고. 재난에서 긴급구호는 필수적이지만, 정말 긴급하게, 단기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네팔에 들어간 요한이 바보들꽃 아이들의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필요한 조처를 취한 후에 그곳에서 요청이 들어온 산간마을을 긴급히 방문했다. 카트만두에서 5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서 산악지대를 올라야 하는 꾸리 마을이다. 일반 지프차로 길이 끊긴 곳까지 가보려다가 실패하고 산악용 특수 지프차를 수배해서 다시 찾아간 거다. 170여 가구 중 9명이 사망했고 1,300여 명 전원이 집을 잃고 길에 나앉았다. 기둥에 묶은 텐트 천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매일 비가 오고 있어서 비바람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한다. 피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면 질병으로 2차 피해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요한이 모든 집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본격적인 우기(6월)로 돌입하기 전에 양철판을 공급하기로 했다. 한 집에 10장 정도씩 공급하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도 매일 비가 와서 일이 급해졌다. 지진 성금으로 모인 돈은 바보들꽃 아이들보다는 지진 피해가 극심한 네팔 산간지역에 사용될 거다.

- 앞서 자신을 “얼굴마담”일 뿐이라고 했지만 역할이 참 많아 보인다. 그 역할을 다 해내는 동력은 어디서 나오나?
글쎄, 나는 특별히 하는 게 없어서…. 그냥 늘 질문하면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하나님이 내게 성경 전체를 대표하는 말씀으로 주셨던 마태복음 6장 33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구절에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계속 묻고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 명령 자체는 거시적이지만, 내 삶에서는 그때마다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구현하려고 했다. 남편의 미국 유학 시절에는 거기서 베이비시터나 데이케어센터에서 하는 일이 그랬다. (베이비시터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일이라 아기 돌보며 돈 받는 게 늘 미안했다.) 성경공부나 소그룹 모임을 계속했고, 집에 워낙 사람이 자주 와서 “모텔 선교하는 집밥 아줌마”라는 우스개를 들을 정도였다. 귀국해서는 카페에서 커피 내리고 밥도 하고, 번역도 했고. 요즘은 공동체 마을 만들기도 중요한 일이다. 사람 만나서 이야기 듣고 함께 고민해주는 게 내 본업 같다. 온갖 일을 해오긴 했는데, 뭐 뾰족하게 잘하는 건 없으니 전문분야가 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저 ‘과로사 할 백수’라고 말한다.(웃음)

   
▲ ⓒ복음과상황 이범진

- 마태복음 6장 33절이 ‘어떻게’ 평생의 말씀으로 주어진 건가?
어떻게인지는 나도 설명할 길이 없다. 어릴 때 열세 번이던 제사를 대학생 때는 아홉 번까지 지내던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찍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성실히 다녔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불의를 못 참는 성정을 지니신 평등주의자 아버지 덕이기도 하다. 고3 말 즈음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대속자 이상으로, 나의 구주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 이상으로 생각하게 된 거다. 이후 본격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말씀이 나에게 엄청난 두드림을 줬다. 그 때부터 구입하는 모든 책에 그 구절을 적어 놓을 정도로. 내 삶을 규정짓는 명령으로 들렸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인지 고민하면서 살아왔다.

- 그럼 청년 시절은 어땠나? 사회학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내가 83학번이니까 딱 386세대의 가운데 학번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고등학생이었다. 나이 쉰이 넘었으니 이제 386은 아니지만 민주화 투쟁이 격렬할 때 학교를 다녔다. 고민이 많고 마음이 복잡했다. 학과 특성상 감옥에 갇히는 친구들도 많았고, 데모도 일상적이었다. 폭력적인 진압에 대응하느라 시위도 과격했다. 다 부수어 던져서 학교에 남아나는 보도블럭이 없었고, 화염병이 날라 다니고, 목숨 잃은 이들도 있었다. 가슴 아픈 시대였다. 지금의 나라면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그 시위를 같이 하지 못했다. 처음 예수님을 친근하게 알고 전공보다 성경을 더 절실히 대하던 때였고, 사회학과 기독학생회 모임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사회학의 틀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회학을 공부해선지 보수적인 신앙관은 처음부터 아니었지만, 지금 하고도 달랐다.

- “조금 다른 선택”이라는 건…?
지금의 나라면 화염병을 던지지는 못해도,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을 것 같다. 그때 그러지를 못해서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끄럽고, 참 어렵다. 학교를 오가면서, 학생회관 앞을 지나면서 데모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민주화 투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치는 저들만큼 내 인생 전체를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빚을 졌다. 이 시점에서 빚 졌다 말하는 자체가 자기변명처럼 들리기도 하고, 실제 자기변명도 맞다. 학창시절 4년 내내 그 상황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87년 ‘서울의 봄’이 있었는데, 내 몸이 현장에 있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다.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시위의 양상도 변하는 맥락과 맞물렸다. 그러니 난 희생한 것이 없다. 요즘 다시 정국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앞서 내가 빚진 분들이 온몸으로 감당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참 괴롭다.

- 당시 경험들이 지금의 삶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마음이 아프고, 지금도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묻는다. 네팔에서는 아이들을 봐도 절대 울지 않는다. 내 눈물이 너무 값싸게 느껴져서. 근데 귀국하는 길이면 한 번씩 눈물을 쏟는다. 하나님 왜…, 왜 이 아이들은 여기서 태어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원망 섞인 질문이 올라와서. 우리 집도 형편이 어려웠고, 형제는 2대 독자인 오빠와 나 둘이었지만, 나는 정말 평등하게, 잘 보호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한국도 아니고, 네팔에서 여자아이로 나서 규정되는 삶, 카스트로 규정되는 삶을 사는 건 정말 다르다. 그 아이들은 거기 태어나서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현실을 보는 게 참 힘든 거다. 그래서 네팔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런 상황을 나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에게 계속 묻는다.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냐고.  

“신이시여!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고 싶으면 힘들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만은 제 품으로 꼭 돌아오게 주세요!” 한국의 네팔 이주노동자 범 라우티가 쓴 아동 문학 《돌 깨는 아이들》의 한 장면. 정부군과 반군에게 납치당한 어린 자식들을 기다리는 꼬끌리가 신께 기도를 올리는 순간, 그녀의 기도를 읽으며 문득 묻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고통받는 ‘꼬끌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겠지요.’ 그 물음은 이내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나는 우리 안의 ‘꼬끌리’들의 신음소리에 정말 귀 기울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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