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호 커버스토리]

나는 소위 ‘모태 신앙인’이다. 모계로만 3대째 신앙을 지켜 온 가정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신앙적인 분위기 안에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우리 동네에 강력한 은사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직장을 잡아 이사 온 남자 집사가 그 은사 운동의 진원지였다. 그에게서 방언과 신유와 축사의 은사가 강력하게 일어났고, 동네 아낙들이 그 집사에게 몰려들었다. 밤이 되면 거의 매일 동네 어느 집에선가 그 집사가 인도하는 기도회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온갖 신비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내 어머니는 그 모임의 중심에 계셨다. 3대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남편이 초등학교 교사였던 까닭에 머슴을 두고 농사일을 돌보아야 했다. 어머니가 끼니마다 먹여야 하는 입이 스물이 넘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은사 운동에서 숨통을 찾으셨다. 낮에는 진이 빠지도록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 가족의 밥상을 차려 놓고는 기도회로 모이는 집으로 달려가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삶의 짐을 질 만한 영적 힘을 얻었고, 덤으로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다. 어머니는 홀로 기도할 때도 자주 방언을 하셨는데, 그분의 방언은 발꼬임이 아니라 분명한 언어로 들렸다. 

어머니는 당신의 믿음을 네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셨다. 3대째 여성들로만 이어져 내려 온 믿음을 다음 대에서는 남성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하셨다. 남편의 전도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들들을 위해서도 땀 흘려 기도하셨다. 새벽마다 아들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로 인해 새벽에 자주 잠에서 깨어났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의 기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자는 척하다가 다시 잠에 들곤 했다.

어머니는 기도회와 부흥회에 나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도시로 전학 갈 준비를 하던 형은 아버지의 경계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내 아래의 두 동생은 데리고 다니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어머니가 선택한 대상이 나였다. 어머니에게 끌려 가기는 했지만, 싫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기도회나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기하기도 했고, 어른들의 ‘뜨거운’ 기도를 받는 것도 왠지 좋았다. 신유, 축사, 입신 같은 현상들을 일상의 일처럼 보고 자랐고, 나도 어머니처럼 기도의 용사가 되고 싶었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은사 운동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나도 형을 따라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유학을 간 도시에는 고모가 시집 가서 살고 있었는데, 고모를 따라 나간 교회에서도 은사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날 방탕한 삶을 살았던 담임목사가 극적인 회심을 하고 나서 성령 운동에 심취했다. 당시에 유명하다는 부흥사들을 불러 한 해에 서너 차례 부흥회를 열었다. 나는 학업에 지장이 없는 한 열심히 집회에 참석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신앙적인 전환을 경험했고, ‘주의 종’으로 나를 드리겠다는 서원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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