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호 사람과상황] 절망사회 속 청춘·대학의 ‘민낯’ 들춰낸 사회학자 오찬호

   
▲ ⓒ복음과상황 오지은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2013년에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에서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임을 포착했다. 책에서 그는 사회구조 문제로 겪는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도리어 경쟁의 패자를 차별하고 멸시하는 우리 사회 20대의 모습을 담아냈다. 책에 담긴 내용은 2007년부터 전국의 11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직접 대학생들을 만나고 소통한 결과물이다. ‘괴물이 된 20대’들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꼰대가 쓴 20대 비판’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천 장이 넘는 학생들의 에세이와 면담 기록, 강의와 격 없는 대화를 오가며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20대가 피해자라는 것과 위로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올해 봄 출간된 《진격의 대학교》에서는 뼛속까지 기업의 노예로 전락한 한국 대학교의 민낯을 파헤쳤다. 첫 번째 쓴 책의 ‘배경’을 분석한 셈이다. 오찬호 박사는 “오늘날의 대학이 ‘죽은 시민’을 길러내고 있다”고 했는데, 대학이 ‘돈이면 무엇이든 하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그를 직접 만나 절망의 시대, 암울한 사회가 된 원인을 더 자세히 들어보았다.

― ‘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을 그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내고 적잖은 비판을 받았나 보다. 1년 반 만에 나온 두 번째 책 《진격의 대학교》 서문에 그에 대한 반박이 있던데.
첫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무엇보다 ‘일부의 이야기를 전체로 일반화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9년 정도 11개 대학을 다니며 강의해왔다. 해가 갈수록 대학생들과의 소통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평등의 개념을 말하면 학생들은 나를 낯설게 본다. 최대한 수위를 낮춰 말하는데도 나를 초현실주의자로 보는 학생들이 늘었다. ‘일부’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최근에 더욱 증가하고 깊어지는 추세임을 지적하고 싶었다. 

― ‘괴물이 된 20대’의 모습, 어떤 것들인가?
‘인서울’ 대학생 10여 명과 <내 깡패 같은 애인>이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적이 있다. 20대 후반의 지방대 출신 여주인공이 서울에 올라와 어렵게 취업에 성공하고 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다. ‘차별받는 약자’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좋은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인서울’과 ‘지방’대학교 졸업생들이 서류전형에서 차별을 받는 것은 불평등하지 않냐 얘기했더니, 학생들 표정이 싸늘했다. “그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 대다수이고, 심지어 “우리가 지방대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 받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KTX 여승무원, 쌍용차 파업, 시간강사 자살, 교내 환경미화원 문제 등 ‘차별받는 약자’에 관해 20대들이 갖고 있는 입장이 다 이런 식이다. 전반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  

― 《진격의 대학교》 서문을 보면, 그렇게 경쟁에 최적화된 대학생들이 2045년에 청와대 회의실을 꿰차고 앉아 긴급회의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2045년에 UN이 한국을 두고 부동의 ‘자살률 1위’ 타이틀에 문제제기를 하자 청와대에서 정부 관료들이 회의하는 장면을 상상으로 썼다. UN의 문제제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회의를 이어가다가 대통령이 회의 자료를 툭 던지며 마무리 발언을 이렇게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 않소? 자기가 죽겠다는 걸, 사회가 책임질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그냥 이번 주에 다들 교회 가셔서 기도나 열심히 하는 걸로 하지요. 그건 그렇고, 거참, UN도 빨갱이 소굴이 다 됐네요. 이럴 때, 우리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거 다들 아시죠?”

그 상상 장면을 두고 사실상 지금의 모습과 똑같다고 평한 사람도 있었다. 윗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비판의식이 살아 있어선 안 되니까 높은 자리로 갈수록 ‘생각과 공감능력 없는’ 사람들만 앉아있게 될 것이다. 

― 《진격의 대학교》에선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을 그린다.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한 대학의 모습을 파헤치는데, ‘괴물이 된 20대’들이 왜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인 듯하다.
그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는 20대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그렸는데, 사실상 ‘가해자’ 측면이 더 부각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진격의 대학교》를 보면 20대는 역시 ‘피해자’다. 사실 첫 번째 책도 20대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려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20대를 몰아붙이는 책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어서 아쉬웠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책을 쓰기로 한 동기가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반응하지 않는 학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라고 했는데.
MB정부의 민간인 사찰, 국정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의 조직적 대선 개입에 대해 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게 충격이었다.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무관심하다. 이들이 민주주의에 그만큼 노출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이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서다. ‘죽은 시민’만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는 사건에는 관심이 없지만, “너 요즘 살찐 것 같다”는 말에는 깜짝 놀라서 그 어렵다는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그러니 권력 중심부에서는 ‘민주주의를 훼손해도 세상이 안 뒤집어지는구나’ 하면서, 더 기고만장해졌다. 국정원의 (민간인) 해킹 사건 같은 일들이 아무리 세상에 드러나도, 북한 싫어해주고 좌파 미워해주면 정권 유지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 않나. 

― 책에서 영어를 숭배하는 대학의 모습을 비판했다. 그것이 불평등의 간격을 더 벌려놓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가구의 월 평균소득이 100만 원 증가하면 자녀의 토익 점수는 21점씩 높아진다. 다른 과목들에 비해 상승폭이 큰 편이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거다. 서울 강남권과 비강남권의 영어유치원 진학 비율이 20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 이 비율이 수능시험 때까지 이어진다. 또한 가계 소득이 월 500만 원 이상인 가구의 학생은 31.4%가 어학연수 등 해외를 경험하지만, 200만 원 이하인 가구의 학생은 15.7%다.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런데 대학은 이것을 불평등으로 이해하지 않고 개인의 팔자로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대학은 오히려 영어 변별력을 높이겠다며 독보적인 영어 실력자를 뽑는 추세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대기업에 무난하게 입사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지금 대학은 영어를 숭배하고,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한다. ‘무공감’의 대학생들을 양산하고 ‘비판’에 대해서는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이라 간주한다. 효율성을 최고의 논리로 아는 학생들을 내보내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니 비극적이게도 30년 후 그들이 청와대 회의실에 앉아 있지 않겠나. 

― 대학 서열과 학자금 대출자 비율이 정확하게 정비례한다. 상위권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일수록 대출을 덜 받는다. 결국 집안이 부유한 학생일수록 더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간다는 의미 아닌가?
이제 엄연한 사실이다. 못사는 집 애들은 상대적으로 서열이 낮은 대학으로 간다. 그리고 대다수가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생활은 더 안 좋아진다. 악순환이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 손낙구는 서울대 합격률이 그들이 사는 아파트 가격과 상관 있다는 걸 밝혀낸 바 있다. 일반고 학생 중 70%가 서울의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출신이다. 해가 갈수록 쏠림 현상은 더 심해지고, 부의 대물림 현상도 가속화되고 있다. 그뿐 아니다. 학자금대출을 해주는 대부업체들도 대학 서열을 매기고 이에 따라 대출 금리도 다르게 적용하는 세상이 왔다.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세상이 아니다. 대니얼 리그리는 《나쁜 사회: 평등이라는 거짓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산다.”

― 불평등이 지속되면 계급 불평등에 따라 신체 조건(키, 몸무게 등)까지 달라지는 상황까지 가는 것도 시간 문제일 거 같다.
자본이 완벽하게 승리한 현장을 보고 있다. 처음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위기를 맞으면서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하고 그러다가 다시 신자유주의가 들어왔다. 그때 우리는 IMF라는 최악의 위기를 자본주의 수술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연착륙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사회가 준 기회를 놓쳤다. 돈의 완벽한 승리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신자유주의 영향을 받은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유럽은 우리보다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고, 미국의 경우는 우리만큼 심각하다. 그러나 미국은 사회적으로 ‘금수저를 문 사람들’에게 책임의식을 갖게 하는 정서가 있다. 명문대 들어간 학생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동시에 그들에겐 책임의식을 안겨준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부채의식을 느끼게 하는 기본적인 교양이 있는 거다. 상속 비율도 굉장히 낮고.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여전히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건데 너네가 왜 참견하냐?” 하는 수준 아닌가.

― 맘몬(돈)과 맞서는 것은 신앙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나도 가톨릭 신자다. 믿는 사람들이 반성해야 한다. 이 사회가 왜 이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엉망진창이 되었는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런 세상을 만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고, 이런 잘못된 질서와 구조를 깨기 위해 예수처럼 나서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 서강대에는 ‘포스코 프란치스코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건물 지으라고 139억 원을 기부한 대기업 이름을 갖다 붙였다. 그 이름이 참 묘하다. 물질의 유혹을 가장 멀리한 천주교 성인의 이름이자, 역대 교황 중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라 불리는 교황의 이름 앞에 대기업의 이름을 붙였다.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헷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신앙인들이 더 정확하게 알았으면 하는 개념이 있나?
평등에 대해 오해하는 건 대학생뿐이 아니다. 교회도 평등을 오해하는 게 여전하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고 하는 요청은 ‘일확천금을 달라’는 게 아니다. 한국 땅의 비정규직들은 인간 존엄성을 침해받고 있기 때문에, 존엄성의 침해를 막아달라는 요청이다. 그런데 그걸 공산주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교회에는 특히 많다. 강한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걸 좀 깼으면 좋겠는데….

― 대학에서도 ‘비판’을 불필요한 것으로 가르치는 판에, 교회에서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당연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사회인 건 맞다. 이미 각종 지표들은 이 사회의 침몰을 예고하고 있는데도, 사회는 별 문제가 없고 개인이 문제라는 인식이 강하다. 주민 모임 같은 곳에서 내가 사교육에 관해 문제제기를 했더니 “그럼 당신이 국회의원 나가라”며 비꼬더라.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의견이 모이고 그 의견이 공감을 얻어 정책으로 반영되면서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간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데 의견 내는 사람을 사회에서 싫어하니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아무도 개인을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다. 교회 십자가는 많아지는데 자본의 횡포는 왜 더욱 강화되는지 깊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 대학 강사이면서 대학을 비판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밥줄’이 끊길 수도 있지 않나.
밥줄 끊기는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강의와 책 쓰는 일 둘 다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올까봐 두렵다. 내가 지금의 대학구조 안에 더 깊이 들어가면, 예를 들어 내가 정규직 교수가 되면 그 안에서 더욱 잘 생활할 사람이라는 게 두렵다는 의미다. 나는 나를 안다. 대학 생리에 최적화된 사람이 될 거다. 그러면 지금보다 안정적으로 살 수는 있겠지만, 강의도 제대로 못하게 되고 책도 안 쓰게 될 거다. 그 스트레스를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풀게 될 거다. 그렇게 될까봐 두렵다.   

― 자녀 교육에 관한 고민은 없나?
8살 딸과 20개월 된 아들이 있다. 요즘 엄마들과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스마트’라는 용어가 있다. 학원 빨리 다녀서 영어단어 몇 개 또래들보다 먼저 안다는 의미다. 돈 들여서 빨리 공부시켜서 ‘스마트’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거다. 상상력이나 창의력 같은 것들도 중요한데, 그런 점이 출중한 아이는 그저 ‘독특한 아이’로 치부된다. 딸이 여섯 살 때였는데, 그 나이엔 영어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 친구들이 넌 그것도 못하느냐고 놀리고 그랬나보다. 그런데도 딸은 잘하는 친구들에게 “우와! 난 알파벳도 모르는데” 했다. 그 얘기 듣고 같이 웃었다.

― 그런 일에 계속 웃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힘들어지지 않을까?
내가 죄 짓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일례로 4년 전에 내 수업을 듣던 대학생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수업 못 듣겠다”고 하더라. 공무원 시험이 뭔가? 의심 없이 외우는 식의 시험공부를 해왔는데, 계속 의심해야 하고 명확한 답은 없는 그런 수업을 들어야 하니 못하겠다는 거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했다. 그때도 내가 죄 짓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래 애들에 비해서 영어실력이 뒤처지는 딸아이를 보면서 부모로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도 ‘외국에 나가야 하나’였다.(웃음) 강의할 때는 ‘자본으로 스마트함을 사는’ 현실을 비판하지만, 이론과 달리 개인의 현실은 또 이렇게 힘든 거다. 우리 아이들이 나를 통해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가지면 좋겠지만, 그렇게만 키우다가는 이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 거 알기에 가능한 한 평범한 길을 벗어나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 언행불일치의 유혹에 항상 노출되겠다.
우리 사회가 자꾸 언행이 불일치되도록 만든다. 앞으로 더더욱 언행일치는 어려워질 거다. 괴리감도 그만큼 더 커질 것이고. 공교육과 사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꼭 대안학교에 아이를 보낼 필요는 없다. 대안적 삶을 결심하지 못하더라도, 보통의 삶이어도 공정한 사회를 위한 ‘언’(言)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행’(行)이 잘못되었다고 ‘언’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오히려 그럴수록 바른 ‘언’을 거듭해야 행동이 따라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아니겠나.

―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어려운 형편임에도 순수학문에 뜻을 두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 특별히 조언해주는 내용이 있나?
난 알바를 정말 많이 했다. 석박사 과정 6년 간 신문배달을 해서 지금도 서대문구 창천동, 동교동 쪽 번지수는 거의 다 꿰고 있다. 시간 강사 때도 강의를 최대한 많이 해서 버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권장할 수는 없다. 개개인의 상황을 모르는데 나처럼 하라고 권하는 건 위험한 거다. 자칫 개인의 ‘열정’ 문제로만 비쳐질 수도 있고. 어쨌든 생활의 어려움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다. 다만,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 돈이 안 벌어지는데도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신이 보시기에도 좋은 일일 것이다.

― 〈조선일보〉에서 올해초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이 ‘달관세대’의 모티브가 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한국어판 해제를 쓰기도 했다.
그 책 저자의 큰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다소 파괴력이 약했던 책이다. 현재 일본은 사회적 불신이 높아져 나름의 행복을 찾는 개인들이 늘어났다. 일본은 최저임금 수준이 우리보다 높고, 저가 상품도 많아서 ‘프리터족’(필요한 돈이 모일 때까지만 일하고 쉽게 일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으로 살아가는 게 사실상 가능하다. 일본이라 가능한 이야기를, 〈조선일보〉 식으로 가공해 ‘달관세대’를 만들었다. 절망의 상황을 두고 절망적이라고 말하는 청년들이 오히려 떼를 쓰는 양 보이게 만들어버렸다.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너는 왜 달관을 못하냐?” 식의 말이나 하게 만들었다. 심각하다. 지금 사회는 우리 청년들을 더 조여 오고 있다. 생존하는 게 효도인 세상에 살고 있다.

― 20대들의 저항이 간간히 보인다.
자본주의의 폭력이 너무 심하니까 눌린 자들이 폭발하는 거지 연대나 공동체로서의 의미 있는 저항은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아직 정상적인 논쟁의 장도 형성되지 않았다.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반응하는 학생들은 많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속마음까지 변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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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들이 꼭 봤으면 하는 책이 있나?
박완서 씨의 《도둑맞은 가난》을 읽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아주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우리 일상에서 어떻게 미묘한 차별 의식이 생기는지를 매우 잘 그렸다.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1년 여간 덴마크와 스웨덴에 거주하면서 쓴 《신 없는 사회》도 읽어봤으면 좋겠다. 아주 좋은 책이다. 비종교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오히려) 더 도덕적이고 빈곤이 없고 복지에 힘쓰는 사회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책이다.

― 책에 ‘먹먹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더라.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하루가 지났는데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 뉴스를 보면서 배 안에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음. 어떻게 내가 이렇게 무기력할 수 있을까. 앞으로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걸 느꼈을 때 먹먹했다. 자본이 완벽하게 승리한 우리 사회는, 잘 살고자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더욱 지치게 하고 옥죈다. 자살률은 줄지 않는다.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것들이 전혀 ‘해결’을 해주지 못한다. 더 악전고투가 이어지는 현실이다. 취업 3종 세트(학벌·학점·토익)가 이제는 9종 세트(어학연수·자격증·공모전 입상·인턴 경력·사회봉사·성형수술)가 되었다. 과거에는 내 집 마련에 15년 걸린다고 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이젠 59년 걸린다고 하니까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는 비판하기가 어려워진다.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배는 기울어져가고 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사회가 개선될 것 같진 않아서 드는 먹먹함이 커져간다. 

― 대안 없이 문제만 지적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문제제기한 것을 문제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대안 아닐까? 가령 달달한 케이크를 많이 먹는 것이 건강을 해친다면, 그것을 ‘먹지 않으면’ 되듯이. 경쟁에 최적화되고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낭만적인 대안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공동체? 연대? 이런 긍정적인 대안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고, 현실을 그렇게 만든 요인을 더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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