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스무 살의 인문학]

▲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뒤로 지금까지 저를 따라다닌 질문은 '지금 이 시대에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림: 철학 분야의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모범상인 '철학 반스타'의 이미지 ⓒAntonu/위키미디어코먼스)

모든 대학생들이 모두 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 무슨 과를 가면 좋을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문과에서 전공은 안 중요해. 어차피 모든 대학생이 다 영문학과지, 뭐.”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대학에 와서 보니 아버지가 옳았습니다. 도서관에 앉으면 같은 책상에 앉은 대학생들의 전공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 같이 각종 영어 교재를 붙들고 있으니까요.

철학과에 입학하고 가장 크게 놀랐던 건, 적잖은 동기들이 대학에서 처음 들은 수업이 철학이 아닌 경영학이더라는 것입니다. 아예 경영학과로 전과할 생각을 갖고 철학과에 온 친구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지요. 이 충격을 간직한 채 대학원 수업을 위해 (제가 속한 문과대학은 너무 협소하여 대학원 수업을 진행할 충분한 자리가 없어서) 넓고 쾌적한, 그리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경영대를 찾은 저는 아버지의 말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모든 대학생이 다 경영학과구나.’

인문학이 빠진 사회, 인문학에 빠진 나
“뭐 전공하니?” “나중에 뭐 할 거야?”
대학생들에게는 참 익숙한,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두 질문. 그러나 인문학도들에게 이 두 질문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질문 사이에 학문을 죽이는 우리 시대의 인문학에 대한 조롱의 담론이 건재한 것을 말입니다. 인문학 학과들을 통폐합하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 시대에서 너는 무슨 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걸로 무엇을 할 거냐?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제가 곧 죽어도 철학과에 가서 죽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봄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책장에서 집어들었던 날의 날씨까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거든요. 인간은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전자 번식을 위한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도킨스의 주장이 담긴 이 책을 저는 심장으로 읽었습니다.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상식을 깨고, 통념을 짓밟고, 관점을 뒤흔든 이 책을 소화하지 못 하고 반박하지 못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았거든요.

이를 시작으로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의 모든 저작을 다 읽었습니다. 나아가 에드워드 윌슨,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 스티븐 제이 굴드, 프랜시스 콜린스, 찰스 다윈의 책들에 코를 박고 읽었어요. 수학을 잘 했다면 생물학과로 방향을 정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할 정도로 당시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생물학 환원주의와 그 반박에 미쳐있었고, 지금도 그 분야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쫑긋해집니다. 그런데 하도 그쪽 공부를 하다 보니, 갈증을 느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세상은 이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데….

역설적이게도, 저는 그렇게 인문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인문학이 심도 있게 다루는 주제들을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으로 여기는 생물학자의 글에서 목마름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 독서 식단에 편식은 드물었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종교, 예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읽으려고 노력했고,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고 생각하여 닥치는 대로 읽어댔습니다. 인문학이 빠진 사회에서, 인문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 주제들의 밑바탕부터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만학의 왕이라는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꼭 철학과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주팔자 보는 법을 배우느냐, 취업 안 될 텐데 어떻게 하려는 거냐…. 이런 말들이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 아예 신경을 쓸 것도 없었지만, 철학과 커트라인이 가장 낮으니까 성적 맞춰서 넣느냐는 억울한 오해와, 학과가 통폐합되면 어쩌려고 그런 곳에 지원하느냐는 비아냥 섞인 걱정에는 답답해서 쉽게 대거리할 수도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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