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해결 위한 ‘정의기억재단’ 설립 추진 중인 한국염 정대협 공동대표

   
▲ ⓒ복음과상황 이범진

지난 3월 3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만난 한일 정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에 대한 ‘12·28 한일합의’의 온전한 이행을 재확인했다. 12·28 합의 내용에는 한국정부가 위안부 지원 목적의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정부가 10억 엔 예산을 출연하기로 되어 있다. 양국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을 확인했고, 한국정부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해결 의사를 표명했다. 합의 내용은 발표 직후부터 ‘굴욕협상’ 논란을 일으켰다. 25년째 이어오던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는 ‘12·28 한일합의’ 반대 집회로 진행됐다. 위안부 피해 당사자 할머니들은 정부 협상 타결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고, 대학생들은 위안부 대학생 대책위를 꾸려 소녀상 지키기 농성에 돌입했다. 개신교 단체 중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감리교시국대책위원회 측이 규탄의 목소리를 냈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도 종단 차원에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일본에서는 12·28 합의 하루 만에 여당 의원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군이나 관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합의 내용과 배치되는 ‘망언 릴레이’였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에서도 한일합의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한국 정부는 “합의 이행이 중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현재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 중 29명을 포함하여 유족, 생존자 가족 등 41명이 ‘12·28 한일 합의’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다. 합의 내용에 있는 재단 설립은 추진되지 않고 있다. 8월 이후에 후속 조치가 나올 가능성만 거론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초 한국염(67)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공동대표를 만나 12·28 합의 내용을 다시 짚어보았다. 한국염 목사는 한국교회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오고 있다.

― 최근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만나 위안부 합의의 온전한 이행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12·28 합의’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일본 측 표명 내용을 보면,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기재되어 있다. 군이 관여했고 일본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지만, 어떤 식으로 관여했으며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합의 발표 이후 아베 총리가 “위안부 강제연행한 적 없다”라고 발언하지 않았나. 사죄에 관하여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언급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후 아베는 “더 이상의 사죄는 없다”라고까지 했다. 범죄에 관한, (피해자는 배제되고) 가해자 스스로 결정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사죄란 있을 수 없다. ‘불가역적’(되돌릴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아시아연대회의가, (자꾸만 말이 바뀌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 국가와 군의 책임 하에 강제연행을 한 것을 분명히 밝히는 조건하에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의 사죄를 요구하는 맥락해서 사용했던 단어다.

― 재단 출연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이 12·28 합의 내용에 있는 위안부 재단 출연금 10억 엔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의 이전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그러니 ‘굴욕합의’인 거다. 이번 합의가 제대로라면 일본 총리가 소녀상 앞에서 사죄 의식이라도 해야 할 판에, 일본 측이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오는 걸로 보아서는 양국이 합의할 때 분명 소녀상 철거 이야기가 나왔을 거다. 한국 정부가 재단을 만들고 일본이 돈을 주는 방식이다. 일단 우리나라 국고가 들어가는데다가 재단을 계속 운영해야 하는데, 사후 관리 책임을 왜 피해국이 떠안는가? 돈의 성격도 문제다. 과거 1995년 무라야마 내각 때 설립됐던, 민간 기부금 성격이 강했던 아시아여성기금과 차이가 없다. 배상금이 아니고, 위로금인 셈이다. 액수가 주요 사안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쓰나미 피해 때 우리나라 국민이 성금 모금해서 지원한 돈이 445억 원 정도였다. 그런데, 배상금도 아닌 100억 원 받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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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12·28 합의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에만 좋은 일 시켜줬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고, 미국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추진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군사 동맹이 효율적으로 작동되어야 하니까 역사문제로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풀려야 했을 거다. 특히 중국과 붙어 있는 한국은 미국 입장에서는 군사적인 ‘교두보’ 역할이 되어야 하는 거고. 이런 분석 글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는 길은 곧 동북아의 평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사안이다. 정대협운동이 근원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야만 속에서 여성, 약자에 대한 폭력이 잔혹하게 발생한다. 죽을 때까지 싸우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거다. 한국 정부도 결코 모를 리 없다.

― 식민지 해방 70년이 흐른 아직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게다가 이번 한일 합의로 도리어 해결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 때 이미 끝난 문제라는 식이지만, 당시엔 일본위안부문제는 글자로도 안 들어갔다.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정부가 아무것도 안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여성단체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노태우 대통령 이후로 정부가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 김영삼 정부 때 처음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의 길이 열렸고, 김대중 정부 때 민간기금인 아시아여성평화국민기금 대신 정부 세금으로 지원금을 지원했으며, 노무현 정부 때는 한국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의 중요성을 요구했다. 이명박 정부도 헌법재판소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있고 나서는 노다 요시히코 당시 일본 총리와 논의를 시작했다. 한 일이 없는 건 박근혜 대통령이다. 오히려 12·28 한일 합의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최근 피해자 할머니들과,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할머니들은 가족들이 대리로 해서 12·28 한일 합의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 JTBC <뉴스룸> 갈무리

― 일본 정부의 돈이 아닌, 국민이 세우는 ‘정의기억재단’ 설립을 위한 100억 모금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진척 상황이 어떤가?
사실 12.28 한일 합의 이후 정대협으로 ‘왜 가만히 있냐’는 전화들이 빗발치고 워낙 반응이 뜨거워서 3월 말로 100억 원이 모일 줄 알았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 당장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도 일본군위안부 기록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역사를 재구성하고 기록해놓기 위해서는 정말 시급한 작업이다. 우리가 역사교과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 사업 안에 소녀상 확대 안도 들어가 있다. 이번 협상에서 소녀상 문제가 부각됐었는데, 일본 대사관 앞의 상징적인 소녀상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런데 지역마다 단체마다 개별적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소녀상 세우기 열기는 시급한 일의 순서 면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있다.

―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과 여성인권을 위해 일해오셨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없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 건 사실 한국교회의 여성들이었다. 지금 정대협의 초석을 놓은 것도 그렇다. 1984년 8월 일본 방문을 앞둔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국교회여성연합회(한교여연)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가 공동으로 한·일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와, 기생관광 문제, 한국의 원폭 피해자와 사할린 교포에 관한 문제를 의제로 삼으라고 건의하면서 “여자정신대에 대하여 일본은 사죄하여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여자정신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이 문서는 군위안부 문제를 성 착취로 규정하고 일본에 사죄를 촉구한 첫 공식 문서였다. 한교여연 내 정신대 문제 답사팀이 생겨서 조사위원들이 일본 내 조사활동을 벌이기도 했고, 그 활동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연대 다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교회 전체로 영향이 퍼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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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인가? 위안부 문제는 소위 진보든 보수든 교회가 함께할 수 있는 ‘민족의 과제’가 아닌가?
당시엔 민족 문제로 인식되지 못했다. 처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교회로 가져가서 호소했을 때 교회는 위안부를 창녀 취급했다. 우리도 천대를 많이 받았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수난으로 인한 여성의 수난 문제로 보지 않았다. 전쟁 상황에서 약자(여성)가 폭력을 당하는 문제로 보지 않았다. ‘정조 이데올로기’로 접근했고, 교회가 굉장히 배타적으로 대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 가져가기 위해 서명을 요청하니까 “그렇게 더러운 여자들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말라”고 거부했단다. 일반적인 교회 정서가 그랬다.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안타까운 게, 초창기에 정말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이 갈 곳이 없었을 때 쉼터를 만들고 싶어서 교회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었던 거다. 한교여연도 교회가 대주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매번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돈을 따오는 식이니 돈이 없었고. 빚을 내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알다시피) 불교인권위원회에서 혜화동에 개인주택을 얻어서 ‘나눔의 집’을 시작했다. 나중에 정대협이 또 서대문에 1억 전세를 얻어서 나눔의 집에 갈 수 없는 할머니들을 모셨고. 교회는 2010년 이후 일본의 극우화에 대한 반동으로 뒤늦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 할머니들 중에 기독교인도 있으셨을 텐데.
그나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한국교회희망봉사단 목사들이 쉼터로 찾아왔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기독교는 뭐하다 이제 오노?”라고 하신 적이 있다. 나중에라도 교회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쉼터를 짓긴 했지만, 기독교 정신을 사회에서 살릴 수 있도록 일찍이 찾아왔던 기회를 많이 놓쳤다.

― 어려운 여건에서 쭉 사역을 해오셨겠다. 개인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계속 가담하는 이유가 있는지.
쭉 교회 안에서 여성운동을 해오면서 위안부 문제와도 연결이 됐다. 위안부문제를 들여다보면, 특히 식민지 국가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그런데 식민지 국가의 부자집 여자는 끌려가지 않는다. 민중들의 억압과 차별, 폭력의 문제다. 민족 문제이면서 계급과 성의 문제가 동시에 있어 피해자는 더욱 취약하다. 그러다 보니 그 문제에 깊이 관심이 생겼다.

― 여성운동에는 어떻게 들어서시게 되었나.
나한테 원래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은데 차별을 체감하면서부터, 체감할수록 계속적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6.25 전쟁 전에 남한으로 내려왔고, 아버지는 전쟁 중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둘이 살았었다. 가난하고 힘들게는 살아도 차별 당하면서 살지는 않았었는데, 신학교에서는 달랐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는 여자 목사가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처음엔 여자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니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더라. ‘하나님은 아버지고, 아버지는 남자라서’ ‘예수의 제자는 다 남자라서’ ‘바울이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했으니까’가 그 이유였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신학이 팽배한 상황 속에서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교수님이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하라고 해서 그러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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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물음표’인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의문. 예수의 제자는 다 ‘유대인 남자’인데, 한국 남자가 목사가 되는 건 말이 되나? 그리고 하나님이 아버지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니,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로 오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경험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니, 와 닿지 않았었다.

― 무슨 경험인지 들려주실 수 있을지….
피난 때 애기인 나를 데리고 임진강을 몰래 건널 때였다. 같이 배에 탄 사람이 애기가 울텐데 북한군에 발각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단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희생시키자고 했다. 내 어머니는 살아있는 생명을 그렇게 할 수 없다면서 나를 데리고 혼자 배에서 내려 강 상류로 상류로 올라가 추운 겨울에 나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셨다. 이 일을 고등학교 때 알았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신학생 때 성경책을 읽는 과제를 매일 하다가, 이사야 46장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됐다.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는 말씀을 읽는데, 나를 업고 임진강을 건너는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아버지만 되는 게 아니라 어머니구나’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졌다. 여성신학이라는 말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인데, 그걸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신학생 때 여성 안수를 놓고 교단과 싸운다는 여신도회전국연합회로 찾아갔다. 내 생각을 나누고, 그곳 소식도 받고 지내면서부터 교회여성운동이 시작된 거 같다. 거기서 간사로도 일했고, 일을 할수록 교회 여성들 문제를 더욱 보게 됐다. 1980년대엔 여신학자협의회에도 참여하게 되고, 점차 세계교회운동이나 세계여성운동에 눈을 떴다. 정대협운동에 관여하게 된 건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에서 일할 때 그 뒷바라지를 하는 게 시작이었다.

― 교수가 될 계획도 있었다고 했는데, 왜 활동가로 쭉 갔는지도 궁금하다. 
남편이랑 친구들이 교회를 세웠었다. 민중교회였는데 후배 목사에게 맡기고, 독일로 유학을 갔었다. 1990년대 초반 직선제 투표를 하게 되고 유사민주주의가 오면서 민중교회에 있던 활동가들이 대거 나가고 교회에는 무학노동자들만 남았었다. 민중교회들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졌다. 유학 중에 교회를 다시 맡으라는,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소식이 왔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민중해방신학이니 여성해방신학이니 말로 떠들다가 이제는 실천해야 할 때였다. 남아서 박사과정은 마칠까 고민하는데, 남편이 그때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배운 걸 실천할 나이지, 무엇하러 공부를 하느냐” 하더라. 동의했다. 게다가 나도, 지금까지 민중신학자들이 많았어도 다 교수이다 보니까 삶을 민중으로 살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 탓이라기보다는 ‘자리’의 문제였다. 나도 학위를 따면 똑같은 길을 걷겠다 싶었다. 그래서 접었다. 일생에서 잘한 일 중 하나가 그때 학위를 접은 거다.


― 선택의 기로에서, 혹은 방향의 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는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다면?
과거에 한국교회가 놓친 일들을 지금이라도 결집해서 해내면 좋겠다.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당장 교회가 ‘할머니와 손잡기’ 운동에 많이 나서주면 좋겠다. ‘정의기억재단’을 만드는 일에도 교회가 앞장을 서주면 좋겠는데 현실은 아직 그렇지가 않다. 이미 개인 단위로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서 다른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꽤 있다. 교회 단위로, 교단 명의로, 한일 협의 무효 서명에 이름을 올려주면 좋겠다. 그런 서명이 껄끄러우면 작게나마 모금만 해주셔도 좋겠다. 요즘에 커피 마시는 돈이 보통 5천 원인데, 최소한 할머니 두 분한테 커피 사드린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교회가 책임지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우리사회에서 ‘교회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할 수 있도록.  

   
▲ 사진: 정의기억재단 설립추진위원회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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