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호 그들이 사는 세상] 복상의 오랜 독자, 대구 대명동 ‘선생님’ 이영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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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대구의 오랜 독자 이영애(52) 씨를 만났습니다. 10년 넘게 복상을 구독하며 지인들에게도 열정적으로 추천했던 분이라 기억하고 있었지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면 욕을 먹는다는 지역에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인터뷰 하루 전 장염에 걸려 아픈 몸이었음에도, 웃는 얼굴로 취재팀을 맞아주셨습니다.
― 피아노학원을 운영하시나 봐요?
아니요. 여긴 공부방이에요. 피아노학원으로 쓰던 곳을 얻어서 공부방을 하고 있어요.
― 공부방을 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임신했을 때 결심한 게, 아기가 저를 닮아서 못된 성정이면 못 키울 것 같다고, 하나님께서 잘 키워주시면 나는 주변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겠다고 기도를 드렸어요. 그런 마음으로 6년 전 시작한 게 이 공부방이에요. 공부방 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어요. 빚을 내서 얻었죠. 무턱대고 시작했는데 처음 오게 된 아이가 엄마 없는 결손가정 아이였어요. 기도대로 삶이 가는구나, 했죠. 빵 점 맞던 애 가르쳐서 80점, 90점도 맞게 해주고.
―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네요. 청년 때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선교사였어요. 인도네시아에서 3년 가깝게 선교사로 있다가 1998년엔가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외국인은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안식년 삼아 한국에 머물다 다시 나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그때 제 나이가 당시로는 꽤 늦은 나이였어요. 서른넷. 다섯 살 어렸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임신도 하다 보니 선교 현장으로는 가지 못하고 지원만 하고 있어요.
― 다섯 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한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남편한테 혼나는데.(웃음) 사실 저희 집에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결혼식 때도 저희 쪽 가족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죠. 주례하던 목사님이 “걱정 마라, 나도 이렇게 결혼했다”며 격려해주시더라고요. 둘이 합쳐서 300만 원 가지고 결혼했는데 150만 원이 남았어요. 그 돈으로 120만 원짜리 피아노를 샀죠. 제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거든요.
― 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피아노를 ‘지르실’ 정도면 정말 좋아하셨나 봐요.
비록 어릴 때 한 달간 바이엘 배운 게 전부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찬송가 반주가 가능해요. 6개월 된 아들을 등에 업고 교회 노인대학 반주를 4년인가 했어요.
― 이곳 공부방에도 피아노가 있네요.
큰아이(고1) 연습용이에요. 큰아이가 피아노 영재예요.
― 어릴 때부터 등에 업혀 엄마의 피아노 반주를 들어서 영재가 된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고. 그저 하나님께 받은 재능(축복)이죠. 서울예고에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재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 갔어요. 우리가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 지하 단칸방에 살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경북예고에 다니면서 여기 공부방을 연습실로 쓰는 거죠. 운 좋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합격해서 주 1회 씩 서울로 오가며 수업을 듣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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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요….
문화체육관광부와 ‘삼성꿈장학금’ 등에서 지원을 받고 있어요. 물론 고스란히 공부방 적자를 메우는 데 쓰이지만요. 생활을 극히 검소하게 해요. 다 20년 넘은 옷, 신발에, 공부방에 있는 가구들은 전부 동네 사람들에게서 얻은 거예요. 남들 보기엔 거지 같은 삶인데(웃음), 이 세상에서 진실로 정직하게 살아가려면 물질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 대구 토박이신가요?
네, 어려서부터 살았는데 요즘엔 정말 대구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서….
― 왜 부끄러우세요?
노란리본 달면 욕하는 지역이에요, 여기가. 근처 옷가게 발 끊은 지 2년 됐어요. 세월호 참사 일어나고 한두 달 지나니까 유족들 욕을 하더라고요.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잖아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부끄러워서, 단원고 피해 학생 부모님들이 삭발식 하던 날 마침 광화문을 지나가는데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요.
― 곧 총선인데 대구 민심은 어떤가요? 여당 쪽은 ‘장담할 수 없다’고 하던데….
엄살이에요. 박정희 향수로 가득해요. 맹목적이죠. 그게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진 거고. 아마 박정희 손자가 나와도 찍어줄 거예요. 여기 사람들이 그래요. 박(근혜) 대통령 눈물 흘리는 거 못 봤느냐고, 우리가 닦아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큰소리쳐요. 이게 말이 되나요? 대통령이 우리 국민 눈물을 닦아줘야 맞는 거죠! 이 동네에서 대통령 비판은 저랑 남편 둘만 하는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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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방에 있는 이영애 씨의 책상.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여기서 살기 힘드시겠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보고 까칠하다고 해요.(웃음) 성격 안 좋다고. 욕 먹더라도 불의를 보고 참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나름 이 동네에서는 ‘선생님’으로 통해요. 결손가정 아이들이나 독거노인 분들 찾아다니며 필요한 도움 드리고 하니까, 공부방으로 사람들이 지원 물품이나 음식 가져와서 나눠드리라고 오고 그래요. 제가 다니는 교회에는 부자들이 많은데 그분들 안 입는 옷 받아서 우리 동네 사람들과 나눠서 입어요. 반찬도 많이 해서 나눠 먹고요. 나름 ‘골목대장’이라고 해야 하나?
― 10년 넘게 복상을 구독하고 계십니다. 쓴소리 좀 부탁합니다.
쓴소리? 할 거 없어요. 다만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신간 소개를 참 좋아해요. 좋은 책들을 복상 통해 알게 되어서요. 또 복상 통해서 공정무역 커피에 관해서도 알게 되어 교회에 가서 공정무역 원두로 바꾸자고 얼마나 설득했는지 몰라요. 직접 커피 내려서 맛보여주면서요. 맛있다고들 하셨지만 결국 바꾸진 못했어요.
― 앞으로 어떤 삶을 계획하시나요?
어디를 가더라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한 삶을 살고 싶어요. 아직 인도네시아 말을 까먹지 않은 거 보면, 그곳에서 할 일이 남은 것도 같아요. 우리 아이들에겐 대학 입학하면 엄마 찾지 말라고 했어요. 한국도 그렇지만, 인도네시아도 부자들만 더 큰 부자가 되고 서민들은 더 어렵게 살아요. 그런 불의들을 바로잡고 싶죠. 그런데 사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는 그때가 제일 좋았는데, 또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우리 동네도 너무 좋고. 앞으로의 삶 계획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게 살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