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노숙인·걸인·빈민들의 벗으로 산 30년, 김홍술 ‘부활의 집’ 목사

   
▲ ⓒ복음과상황 이범진

김홍술(60) 목사를 처음 본 건 지난 2014년 10월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40일 단식 해단 및 안전사회를 촉구하는 기독인 연합예배(사진)’ 자리였다. 당시 40일간 동지였다 건강 탓에 단식을 먼저 끝낸 방인성 목사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김 목사는 단식을 더 이어갔었다. 42일째 굶은 탓에 체중이 20kg 가까이 줄었음에도 그의 풍채는 단단해보였고, 덥수룩한 수염은 어떤 집념의 결정체 같았다. 강인해 뵈던 외모가 불러일으킨 그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었을까. 인터뷰 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미 타 언론 매체에 소개된 그의 신앙 입문과 사회 사역의 행적은 역시, ‘남달랐다.’ 거지 수행을 했었고, 교단에서 출교 처분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30년 가까이 노숙인 사역을 해오고 있다. 부산에서 ‘노숙자의 대부’라 불리는 그를 폭염이 최고조에 달하던 8월초 서울 종로에서 만나, 삶 속 신앙고백 이야기를 청해보았다. 이날 김 목사는 베트남 평화기행 동기모임 차 상경한 터였다.

― 세월호 단식 마지막 날 광화문 광장에서 뵈었다. 오늘도 도인의 풍미가 느껴진다.
오늘은 그래도 청바지 차림에 평범하게 입고 왔는데. 외모 때문에 청학동에서 내려온 분이냐고 하거나, 도예나 예술 활동 하느냐고 묻거나, 신흥종교집단 사람이냐는 질문을 꽤 받는다. 평소에 주로 생활한복을 입고, 주일 예배엔 반드시 한복 정장을 입는다. 봄이랑 가을은 하얀 무명, 여름은 모시로. 내 머리 스타일이랑 어울리니까.(웃음) 그런데 목사라고 하면 깜짝 놀란다. 굳이 이런 행색이 아니더라도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는 데 별 상관없겠지만, 성 프란체스코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 거 같다.

― 어떤 영향을 받았다는 건가?
16세 때 불같은 성령 체험으로 처음 예수를 받아들였다. 기도만 하면 방언을 했다. 미술을 전공하려 했다가, 신학교에 진학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입학한 지방의 통합 교단 신학교는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세속적 모습에 실망했고, 진로 갈등 속에서 산속을 찾아 들어가 침묵과 금식 기도를 했다. 그러다 프란체스코 전기를 읽으면서, 평생 걸인과 어울리고 가난한 이들 곁에서 산 그의 삶을 모델 삼았다. ‘이거다’ 싶어 나도 학교를 휴학하고 전국 방랑길에 올랐고, 걸식을 했다. 군 입대 후엔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군대를 신앙 양심 상 용납할 수가 없어 5개월 만에 탈영하고 3년 감옥살이를 했다. 신학교 복학 후 이사장의 공금 유용에 대해 전교생 데모를 주도하다 제적당했다.

― 그래도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
서른에 결혼을 하고 단칸방에 살면서 막노동을 하던 시절에 우연히 전에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의 이승원 원로목사님을 만난 덕이다. 신학교 데모 시절에도 기억에 남아 있던 목사님은 70세 은퇴 후에도 지하 작은 공간에서 숙식하며 청년들 십여 명과 교회를 하셨다.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고 함께하게 됐다. 그러다 34살 되던 때 목사님과 의논해서 부산 구서동에서 지하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한울교회’ 문을 열었는데, 늘 교회 문을 열어두니 각종 ‘행려자’ 분들이 찾아와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어놓더라. 고민도 했지만 이 사람들이 주님이 나에게 보내신 양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애빈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빈민목회가 시작됐고 셋방을 얻어 부랑인, 걸인 형제들의 거처를 마련해 같이 살아갔다. 이게 ‘부활의 집’이라 불리는 ㈔애빈회의 모체다. 그리고 ‘한국인 자신의 교회’를 표방하고 ‘토종교회’를 지향하는 교단인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을 만나게 되어 1991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가 목사 안수 받는 날, 이승원 목사님도 ‘특별 안수위원’으로 강단에 오르셨다. 그러고는 8일 후, 4월 30일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빵과 포도주로 즉석 성찬식을 남기셨다. 매년 4월 30일이면 김해에 있는 스승님 묘소를 찾아뵌다.

   
▲ 사진: 김홍술 목사 페이스북

― 교단 이름이 낯설다.
1935년 출발한 교단이다. 1920년대 일본 우찌무라 간조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최태용이 무교회 복음전도운동을 했었다. 외국인 선교부에 의한 근본주의적 신앙관을 거부하고 조선 사람 스스로 교회를 만들어 한국적 기독교 혁명을 일으켜 보자는 뜻으로 신앙 동지들을 규합하여 시작됐다. 주류 교단이 선교와 성장을 목표에 두는 것과는 달리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낮은 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고 출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 교단이고, 소속 교회 수는 적지만 교권주의와 성장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오랜 전통이 있다. 그런데 20여 년 전부터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교리주의 성장주의 오염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처음의 정신을 잃어버린 교단 지도부 모습에 항의해왔다. 2009년 총회에서 전면 저항을 하려고 ‘사도신경 거부’ 발언을 했다가 교단 최초로 출교 처분을 받은 상태다. 곧 복교될 거 같긴 한데 아직 모르겠다.

― 거의 30년 세월을 ‘부활의 집’을 묵묵히 꾸려오고 있다. 부산에서 ‘노숙자의 대부’로 통하신다고 들었다.
20대를 방랑하며 보낸 이후로 내 소명은 쭉 ‘빈민들과 함께’였다. 그 어떤 다른 가치와도 부닥침 없이 돌파해야 하는, 기꺼이 맞이하는 운명 같은 거였다. 남들은 외골수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게 주어진 소양과 특질이 발현되는 과정 같다. 하나님이 날 그렇게 지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월급 잘 받는 목사로는 도저히 못 산다.

― “다른 가치와 부닥침”이 있었던 걸로 들린다. 어려움이 많았을 거 같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나에겐 가족의 문제가 참 풀기 어렵다. 미안한 게 참 많다. 오방 최흥종 목사님도 가족과 생전에 화해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점에서 가족들과의 관계가 죽는 날까지 관심사다. 오방 선생은 1880년 태어나 30대부터 평생 수천 명의 나병환자들을 위해 오롯이 투신하며 살다 87세에 가신 분이다. 오방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나병원을 설립하고, 해방 후에도 나환자들과 결핵환자,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평생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셨던 분이다.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찾아와 ‘함께 조국을 다시 일으키자’ 했을 때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며 나환자 돌보는 일을 택하셨다. 평생 가족과 분리된 아픔을 안고 삶을 사신 분으로, 마지막 길에도 자식들이 쳐다보질 않았다고 한다. 가족 문제를 놓고 예수님께 묻기도 많이 물었는데, 오방 선생의 삶이 나에게 지금 시점에 와 닿는 건 왜일까 싶다.

   
▲ 부활의 집의 가장 오랜 식구인 민규를 떠나 보내며 (사진: 김홍술 목사 페이스북)

― 사단법인 오방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오방상’을 받기도 하셨다.
그 상 덕분에 오방 선생을 알게 됐다. 광주 사는 선배 목사가 작년 11월에 ‘오방상’ 수상자로 추천되었다고,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와서. 세상에서 상 받는 일이 부끄럽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방 선생 책과 자료를 보다가 감동이 밀려왔다. 왜 이런 분이 내 나이 60 고개에 다가왔을까 깊이 고민하며 여전히 묻고 있다. 내 마지막 길을 이분이 알려주시는 거 같다. 수상 때 그 어른이 나에게 ‘사랑하는 김 목사, 내가 그대를 찾은 것은 이 시대 버림받은 영혼들과 죽음이 오는 그날까지 친구로 같이 가자는 뜻에서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나병이 거의 없어졌지만, 노숙인이 바로 ‘사회적 나환자’라고 생각한다. 냄새가 고약해서 사람들이 기피하고, 썩어 문드러져가는 그들의 삶이 과거 나환자들의 삶과 비슷하다. 소위 어떤 능력이 없어져서 의욕도 떨어지고, 여러 가지로 내몰려 포기하게 되면 누구나 노숙자가 될 수 있다. 마음 둘 곳도 없이 떠다니는 유랑민이 된다. 그럴수록 사회는 그들을 더 밖으로 내몰고, 결국 쓰레기 취급을 당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 목사님 SNS에서 최근 부활의 집 식구인 최민규 씨를 떠나보냈다는 소식을 보았다.
민규는 부활의 집에서 가장 오랜 함께 산 식구다. 스물한 살에 들어와 올해 마흔 둘이니까 그의 생애 절반을 함께 보냈는데, 급작스럽게 영영 떠났다. 내 환갑 생일 하루 전 날이었다. 하루에 수십 번, 내게 아버지라고 부르던 아이다. 민규를 데리고 있으면서 동네방네 사건도 참 많았다. 발가벗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돌발 상황이 많으니까 동네 할매들이 처음엔 놀라다가 이젠 목사님이 데리고 사는 아이로 알고 인사도 잘 하니까 친하게 지냈다. 경찰이 데리고 들어오는 일이 많았는데 이번에 죽어서 돌아왔다.

― 심경이 복잡하신 거 같다.
친부모가 다 살아 있는데 장례식 때 찾아오지도 않더라. 장례 치르는 날 유골함을 들고 동네를 돌았다. 슈퍼 아주머니는 나와서 유골함을 만지면서 그동안 회한이 밀려오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새우깡 하나를 유골 위에 올려주더라. 이거 좋아했다면서. 슬픔 속에 뒷정리를 하면서 많이 흔들렸다. 오방 선생과의 다짐이나 메시지는 온데간데없이, 다 때려치울까 생각도 했다. 집이 너무 조용하다. 내가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나온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아이를 지켜주지도 못한 아버지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할 말이 없다. 이 아이가, 내 인생의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출발하는 이 시점에 왜 갔어야 했나 질문이 계속 생긴다.

― 지금은 부활의 집 식구가 몇인가?
세 명 정도 같이 살고 있고, 주일에만 오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옛날보다 많이 적어졌다. 나갈 능력도 없고 의욕도 없는, 하지만 정말 귀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작은 자들. 같이 먹고 사는 게 일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일에 충실하다. 25년을 살아오면서 낸들 무슨 일이 왜 없었겠나? 돈 있어본 적 없는 게 다행이고 감사하다. 돈 있으면 나도 사고 치고 그랬을 거다.

―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나자로 축제’를 타 종교인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 얘기를 좀 들려 달라.
세상에 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못 남긴 채 떠나간 노숙자 영령을 모시고 2009년부터 합동추모제를 열기 시작한 게, 지금은 여러 종단이 함께하고 예술인들도 문화제로 동참하고 있다. 부산역 광장에서 한다.

― 어떤 의미인가.
경찰에서 시신을 수습하라는 연락이 올 때가 꽤 있다. 어느 노숙자는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온갖 먼지에 뒤덮인 채로 부패해 있었다. 그런 시체를 담요로 덮어 리어카에 실어 부활의 집에 데려와 씻겨서 이틀 정도 같이 지내고 보낸다. 죽음이 대체 무엇인가? 성경의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죽은 이들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다. 길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장례로 끝내는 게 아니라, 합동 추모를 하는데 많이들 운다. 노숙자들이 이런 걸 보면 ‘나도 죽으면 김홍술 목사가 추모해주겠구나’ 생각하지 않겠나. 부산역에 양아치들도 많고 별의 별 꼴 다 본다. 시비도 많이 당했고. 추모제에서 끝나지 않는 큰 꿈이 있다.

― 어떤 꿈인가?
추모공원을 만들고 싶다. 도시 옆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꽃동산. 이렇게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유골들이 몇 톤씩 쌓여 어딘가로 처분되고 말 텐데, 그냥 매장할 게 아니라 그런 유골을 다 함께 모시고 싶다. 거기 꽃도 피고 새도 날아들도록. 세상에서 마치 쓰레기처럼 취급되고 낙엽처럼 밟히던 걸인들의 뼈는 존재 자체로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그들이 버림받은 덕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이들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을 다 끌어안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자신은 정당하게 살고 있다 자부하는 이들 역시, 왜곡된 사회 구조에 나름 편승하고 뒤에 숨은 채로 살 뿐이다. 우리 모두는 다 그 낮은 자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죄의 책임을 안고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대동의 넋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우리 모두는 다 그 낮은 자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말을 풀어 달라.
성경의 거지 나사로 이야기와도 연결되어 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스러기로 가난한 자의 삶이 지탱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마치 선심이며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재산을 제 멋대로 쓰는 것에 대해 죄의식이 없다. 개인이나 국가의 부는 전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자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세계 인류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가고, 오늘날 자본의 힘은 국가도 무력화한다. 종교 역시 자본의 우상이란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부의 축적이나 독점은 재앙이기 때문에, 반드시 나누어져야 한다.

― 노숙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대개 곱지가 않다.
우리 사회는 노숙자를 개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나. 비정상으로 보고,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을까. 노숙자들은 그들대로 이곳저곳에서 타격을 받아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일 뿐이다. 삶의 양태가 다를 뿐 우리와 같은 존재다. 노숙자가 술을 마시면 한심하게 보는 그 시선 자체가 사회적인 정신병 증상이다. 이리저리 비틀거려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다. 예전엔 각설이의 노래나 풍자도 존중받았다. 제 삶을 즐기는 걸로. 노숙자들의 권리가 회복되면 그들 중에 먼저 간 이들의 추모공원에서 노숙자들의 연주회를 볼 날도 오지 않을까.

― 목사님 눈에는 노숙자들이 특별히 남다르게 보이는 거 같다.
신앙고백의 언어로 볼 때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지극히 높은 사람들이다. 가장 낮은 자들이야말로 주님 보기엔 높임 받아야 하는 자다. 왕이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그들을 높이 보고, 오히려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 내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목회를 하는 눈으로 지금 한국교회를 바라본다면?
한국교회에 어떤 충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터가 비텐베르그 교회당 정문에 내건 95개조 반박문과 비슷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

― ‘95개조 반박문’ 비슷한 일이라면…?
기독교가 지금처럼 망가진 데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목사다. 가장 기득권의 자리에 있는 목사들이, 스스로 목을 걸어야 한다.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목사직을 반납해야 한다. 아마 목사로서 물적 토대를 갖춘 이에게는 어려운 결정일 거다. 사회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양심의 자유를 얻기 원하는 목사들 95명이 먼저 시작할 거다. 당당하게. 혼자는 힘이 없지만 같이 하면 힘을 받을 수 있다.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 같다. 그렇게 목사직을 내려놓고, 노동으로 생활하면서 목회로 돈 받지 않아야 한다. 20~30명 모이는 교회에서 목사도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존재하면서 같이 밥 먹고 교제하고 성경도 읽으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삶을 나눠야 한다. 건물도 필요 없고, 헌금이 모아지면 그 반은 사회 환원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기독교인의 문제가 ‘가난’과 닿아 있는 거 같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가난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교회 이름이 바로 그 의미다. 가난을 사랑하는 애빈(愛貧)교회. 하나님과 인간 사이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기본 채널인 성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부자는 근심하여 돌아가고, 가난한 자는 복되다고 하지 않나. 부자라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유한 이들은 이미 배가 차서 궁하지 않고 간절함도 없어서 거기에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깃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너무 편한 상태, 무사안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 사랑을 느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풍요 속엔 갈급함이 없다. 자발적으로 가난해져야 축복을 받는다. 그래서 재화와 기득권을 벗어 버려야 하는 거다.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나눠 주라는 예수님의 말은 그 뜻이다. 재화를 쥐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 목사님은 ‘가난’해 보이는데, 두려워 보이진 않는다.
나는 솔직히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란 말에 공감이 잘 안 된다.(웃음) 가난 친화적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는 이미 성경에 잘 나와 있다.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말이 부끄러움 없이 만연한 병든 나라에서, 세월호 사건뿐 아니라과거부터 계속 처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사탄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 가고 있다. 가난이야말로 복음의 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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