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호 사람과 상황] 탈북민 노동자 3인의 남한살이 이야기

최근 탈북 노동자 김모(48) 씨의 안타까운 죽음이 반짝, 언론의 주목을 받았었다. 김 씨는 포스코가 설립한 청소 용역업체인 송도에스이 소속으로, 송도국제도시의 한 고층건물 2층 내부 유리창을 닦다가 추락사했다. 그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측 대응이 미흡했고, 유족들은 장례 절차를 미루고 사내 탈북민에 대한 차별 개선 및 안전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11일 만에 유족과 사측 간 합의가 이루어져 김 씨의 장례는 회사장으로 치러졌다. 포스코와 송도에스이는 유족에 사과했다.

김 씨 사태가 비교적 원만하게 종결되고 사건을 다룬 언론 기사들을 되짚어 보았다. 남한에서 10년차 노동자인 그는 아직도 ‘새터민’으로 자주 불렸고, 그를 다루는 기사들에서는 유독 그의 ‘출신’ 배경이 강조되고 있었다. 김 씨는 북한에서 산부인과 의사였다.

탈북민 3만 명 시대, 남한에서는 탈북민 김 씨의 죽음 이후에도 (‘의사 출신’을 포함하여) 다양한 삶의 배경을 지닌 탈북민들이 남한 주민들과 함께 살아간다. 김 씨의 사고사 보도 이후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남한으로 건너와 체제와 문화가 이질적인 사회에서 주로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김 씨 유족과 사측 사이 합의의 중재 역할을 맡아 장례 과정을 모두 지켜본 신영욱(64) 예사랑선교회 목사가 5년차 이상의 탈북민 세 분을 연결해주어 9월초 인천논현역 역사 내 카페 ‘이음’에서 만났다. (신 목사는 2014년부터 외국인근로자 사역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탈북민과 연결되었고, 현재 남한 사람과 탈북민이 함께 일하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에 나오는 탈북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사진 촬영도 최소화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우리에 대한 편견은 
평생 넘어야 할 산이지요”
― 50대 김모연 씨(가명·청소노동자, 탈북 5년차)

탈북한 지 5년 정도 됐습니다. 하나센터(통일부가 운영하는, 탈북민을 위한 초기 정착 지원 기관-편집자)에서 나오자마자 일주일 만에 직장을 잡아 계속 일하고 있어요. 회사가 잘해주고 환경도 깨끗해요. 건물 청소를 하고 있는데 이게 말하자면 ‘하층’ 일이잖아요. 그래도 사람들이 인사도 잘 해줘요. 최근에 그분 사고가 있은 후로 위험한 요소들은 더 퇴치하고 있고요. 그리고 아침마다 모여서 체조하고 구호를 외치고, 안전 강조를 많이 하긴 해요. 돌아가신 그분은, 귀한 분이 목숨 걸고 일을 하신 것 같아요. 너무 안됐어요.

저는 북한에서는 다른 일을 했습니다. 남편은 일찍 죽었고요. 아들과 딸이랑 살았는데 딸이 어느 날 돈 벌러 중국에 갔다가 몇 년간 행방불명 됐었어요. 알고 보니 인신매매범에게 넘어가 남의집살이를 할 뻔하다 가까스로 탈출했더라고요. 딸 찾으러 막연히 중국으로 갔다가 연락이 닿았고, 그 길로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했어요. 아들 내외가 마지막으로 남한으로 왔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기가 쉽지도 않고, 북한사회가 통째로 감옥 같았거든요. 남한 와서 회사 첫 출근하고 집에 돌아온 날 내 벌이를 했다는 생각에 혼자 누워서 너무 좋았어요.

북한이나 남한이나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아요. 좋은 사람은 정말 좋고, 안 좋은 사람은 안 좋고요. 배울 것도 많지만 사회가 더 발전했다고 해서 사람도더 발전되어 있진 않더라고요. 부유함을 떠나서 사람 됨됨이 말입니다. 
북한 사람이라고 해서 ‘한 수 낮게 보는 시선’을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뭐냐’는 생각에 욱할 때가 있어요. 그런 편견은 우리가 평생 넘어야 할 산인 것 같아요. 우리가 안고 살아야 할 언덕이요. 내가 더 빨리 적응해서 압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처음엔 직장에 북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다 나가고 얼마 안 남았어요. 우리 회사 남한 사람들은 꽤 좋은 편이에요.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탈북민들은 그걸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조선족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당당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밝혀요.

‘북한 출신이라서 죄를 지었다’ ‘북한 사람이라서 모자란다’ 식으로 보는 눈도 많이 겪었습니다. 이런 식은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사실 북한 사람들이 힘든 일을 더 잘 견뎌내는 점도 있고요. 남한에도 사람마다 좋은 사람 있고 나쁜 사람 있는 거죠. 난 이제까지 출근하면서 내 주위에서 정말 나쁜 사람은 못 만나봤는데, 우리 아들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회사의 높은 분들이 찾아오셨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통일이 아직도 안 되고 있네요. 김일성 시대 때부터 된다 된다 했는데, 3대가 지나가고 있는데 지금도 안 되고 있어요. 고향 땅이니까, 어서 통일 되고 화목하게 살면 좋겠는데 혼자 공상만 하는 거죠. 북한 정권이 나빠서 그렇지, 그곳에도 좋은 점도 있어요. ‘남한의 좋은 점과 북한의 좋은 점을 합치면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과연, 
 통일이 될까요?”
― 20대 김철수 씨(가명·공장노동자, 탈북 5년차)

저도 남한 온 지 5년이 됐고요. 아내랑 일가족 다 함께 왔어요. 아버지가 북한에서 사업을 하셨는데 일하는 거에 비해서 대가가 너무 형편 없고, 출세를 못했어요. 소위 ‘출신 성분’이 위험한 집안이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성인이 되면 뭘 할까 진로 고민을 하는데 성분 때문에 저도 북한에서 출세하긴 어려울 거고, 10년 의무인 군대를 굳이 가야 할까 싶더라고요. 머리까지 자르고도 군대를 안 갔어요. 대학교에 진학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졸업해봐야 출세는 못할 거였어요. 몰래몰래 남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새로운 걸 하고 싶어서, 아내를 비롯해서 가족들을 다 설득했어요. 

지금은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힘들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그런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 아이도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 책임감이 커요. 남한에서 대학 공부를 하려고도 했는데, 돌도 안 된 아기와 아내가 있어서 가족을 유지하려면 그럴 수가 없죠. 꿈은 꿈대로 가지고 일하고 있어요. 아내도 일을 하고요.

북한 사투리를 쓰면 가끔 알아보는 사람은 있지만, 경상도나 다른 지방 사투리랑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니까 아내는 북한에서 왔다는 소리를 굳이 안하려고 해요. 대충 둘러대는 거죠. 말할 필요가 사실 없으니까요. 
그리고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으니까 사람들 세계관의 수준도 높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수준 이하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가 봐요. 

한 번은 북한 사람이 잘못한 일을 갖고 나한테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길래, 실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 않느냐고 대꾸했어요. 남한에 원래 살던 사람도 실수는 하는데 적응하는 과정에서 실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이후로는 그런 식의 질문을 다시 하지 않더라고요. 왜 묻는지 이해는 하는데 쉽게 내뱉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에서 왔다고 막말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남한에 와서 이 악물고 돈 모아서 집도 분양받았어요. 탈북 초기에 한국에 집 없는 사람도 많은데 북한 사람이 어떻게 집을 갖겠느냐고 하는 소리를 들었었거든요. 그 뒤로 이 악물고 무조건 집 사겠다고 다짐하고 버는 족족 모았습니다.

추석이 가까운데, 자다가도 꿈을 꾸긴 해요. 명절엔 고향 땅이 꿈에 나타나죠. 그런데 통일이 정말 되겠어요? 통일이 될까요?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같은데, 아마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남한 사람보다 여전히 통일을 더 바랄 거 같아요. 통일이 되면 북한으로 가서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시간이 가면서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있어요”
― 50대 김수희 씨(가명·카페노동자, 탈북 10년차)

저는 한국 온 지 10년 정도 되었고, 여기서 내가 뭘 해야 몸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많이 기웃거렸어요. ‘통일 강사’로 일한 적도 있는데, 올 봄부터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 왔어요. 아들은 대학생이고, 남편은 주민센터에서 일해요. 시어머니는 청소 일을 하고 있고, 부지런히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어요. 남편이 북한에서 20년 동안 치과의사를 했는데 남한에서는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제 뒷바라지를 하느라 다른 일을 했죠. 제가 3년간 약만 먹고 살았거든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남한에 왔어요. 살다 보니 장단점이 있는 거 같아요.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으니까. 일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건 정말 좋지만, 선입견을 견디며 사는 건 정말 서럽죠. 수준 낮은 데서 왔다고 생각하고, 정착하는 걸 따뜻하게 받아주는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우리 살기도 힘든데, 남한엔 왜 왔느냐” 따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 때문에 자기들이 못 사는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브로커한테 2년 동안 비용 지불하는 동안, 직장에서는 말끝마다 속 터지는 소리 참 많이 들었어요. 북한에서 그렇게 교육받았느냐는 둥, 제가 묻거나 따지는 일이 있으면 김정일 밑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더니 여기 와서는 그렇게 따지냐는 둥. 직위가 아무리 높고 잘살면 뭐하나요, 사람 됨됨이가 낮은데. 책상 엎어버릴까 하는 순간들을 여러 번 겪으면서 저도 북한 출신인 거 말하지 말아야지 마음먹게 되었어요. 진짜든 아니든 간첩 사건이 한 번 터지면 북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더 나빠져서 위축되기도 하고요.

우리 애는 학교에서 탈북 학생으로 분류되어 따로 방과 후 학습을 받았거든요. 애들마다 다르지만 북한 출신이라고 따로 거기서 공부하긴 싫어했고, 지금도 북한 출신이라고 말 안 해요 아들은. 이 점은 세대마다 좀 다른 거 같아요. 전 제 삶도 있지만, 자녀를 잘 살게 하려고 남한으로 온 거에요. 난 이미 인생 중반에 와 있으니까 화려한 삶을 바라기보다는 우리 아이가 앞으로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제가 일하는 카페는 점포마다 남한 사람 북한 사람 반반씩 섞여 있는데요. 사실 시간이 가면 조금씩 서로 이해를 해요. 그런 과정을 보면 같이 산다는 게 별 건 아닌데, 편견이 문제죠. 오기 전엔 남한 사람들을 좋게 봤는데, 시간 흐를수록 별다른 건 없다고 생각해요. 더 맛있는 거, 더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사람도 그런 건 아니잖아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함께 잘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 신영욱 예사랑선교회 목사

북에서 오신 나이 많으신 분들은 병을 키워 와서 건강이 안 좋은 경우가 많아요. 정착 초기에 고생이 많으신데, 북한 사람을 보는 차별의 시선까지 얹히지요. 여기 인천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묻곤 합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인천에 살던 토박이가 있느냐고요. 물론 거의 없지요. 우리는 지금 인천에 살지만, 3세대 전부터 사는 경우는 극소수입니다. 모두 외지에서 모인 사람들이니까요. 북에서 온 분들도 똑같아요. 우리가 조금 먼저 인천에 와서 정착한 것뿐이죠. 어찌 보면 경상도 전라도의 지역 갈등이 아직도 있는 것처럼, 북에서 온 분들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 겁니다. 

탈북민만 그런 편견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남을 고향으로 둔 분들도 경상도 사람과 만나면 넘어야 하는 산 같은 편견을 겪지요. 내가 인정받기 원한다면 상대방을 인정해야 하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그렇게 하여 북에서 온 분들이 건강한 생활인들로 살아갈 수 있고요.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화합이 안 되면 통일이라는 거창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탈북민들과 이웃으로 사이좋게 같이 살아가는 게 싸우면서 사는 것보다 낫지요.

북에서 온 분들이 그런 말들을 하세요. 북에서는 그곳이 지상낙원이라 세뇌하지만 지상낙원과는 거리가 멀고, 남한은 천국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풍요로운 건 맞아도 천국은 아니더라고요. 남과 북을 모두 살아본 분들이니 둘의 차이를 더 잘 알죠. 북은 평등이라는 가치로 3점, 남쪽은 자유의 면에서 7점을 준다면, 평등과 자유의 양 측면에서 북은 좀 더 자유로워지고 남은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남북이 이질에서 동질의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통일을 소원하면서 힘들더라도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함께 작은 공동체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금 탈북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이 카페를 통해서도 통일을 연습하는 거지요. 통일 이후의 갈등도 미리 생각해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탈북민과의 갈등 구조를 우선 해소해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말이지요. 

북에서 온 분들과 남한 원주민 분들이 서로 생각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 같아요. 한 발 물러서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수용하고 포용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어떻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서로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북시민마당을 월 1회씩 열고 있는데, 여기 참여해서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은 서로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최근 송도에스이 소속 청소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었는데, ‘의사 출신 탈북민’이라는 점이 이슈였지요. 과연 다른 탈북자들이 일을 당했어도 그만큼 다뤄졌을까 싶습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탈북민 네다섯 분 정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예상을 하며 인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사실 다소 긴장을 했었다. “‘검열’에 예민한 분들이라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변인들의 주의를 들은 터였다. 검열을 상기시키는, 절대로 꺼내면 안 되는 말들에 대해서 나름 곱씹으며 지하철 안에서 생각에 잠겼었다.

카페에 도착하여 처음 만나는 세 분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소개를 들었다. 어떤 분은 신변 노출을 극도로 꺼리면서도 (오래 알고 지낸 신 목사님을 신뢰하는 만큼) 기자에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는 막힘이 없었다. 세 분의 이야기는 곧, 탈북민이라는 수식어만 없다면 서울의 일상에서도 늘 마주하던, 늘 그 자리에 있는 평범한 이웃들의 소소한 삶 자체였다. 순간 ‘탈북민으로 사는 이야기를 굳이 해달라고 요청한 자체가 혹시 아이러니는 아닌가’ ‘이런 행위 자체가 ‘우리’와 ‘세 분’ 사이에 선을 긋는 행위는 아닌가’ 싶으면서도 여전히 세 분이 공통되게 말하고 있는 “편견”이란 단어가 귀에 맴돌았다. 

괜히 했었던 긴장 덕에 파김치 상태가 된 채로 귀가하는 동안 ‘탈북민’이란 타이틀과도 같은, 세상의 많은 편견들을 떠올렸다.

진행 _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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