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 반디마을 주거공동체 전경. 네 가정의 주거 공간과 카페, 공방, 커뮤니티센터 등이 어우러져 있다. (사진: 정동철 제공)

본회퍼에게 배운 지혜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던 자매가 내게 물어왔다.

“선교단체 간사들은 사임 이후 대체로 목회자가 되던데 당신도 그럴 건가요?”

짧은 질문에서 긴 여정의 운명을 가를 기운을 느꼈다. 눈치를 보니 그녀는 목회자 아내로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결정된 미래는 아니니 아니라고 대답해도 될 것이었다. 순간 지혜가 떠올랐고 나는 대답했다.

“미래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야. 목회자가 된다면 결코 혼자 결정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중요한 결정은 우리 것이므로 함께 기도하며 결정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미래의 당신이 사모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목회자는 안 될 거야.”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 나는 그녀와 결혼했고, 선녀의 옷을 숨긴 나뭇꾼 마냥 아이 셋이 생긴 후 목회자가 되었다. 물론 그때의 약속처럼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아내에게 기도할 시간을 주었고 아내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은 아내가 결정한 인생이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대답에 공동체의 동력이 될 이상(理想)의 생성-발전-소멸에 대한 열쇠가 있었다.

누구나 마음에 품은 이상 하나 쯤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경우 그 과정에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강력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의한 확신이니까 융합보다 설득, 기다림 혹은 고난이 더 어울리는 단어로 엮인다. 그런 이유로 공동체의 중심에는 그 이상에 걸맞은 사상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이상에 공감하거나 거부하면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동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 후 여러 선배 공동체들의 역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기한 공통점은 공동체를 시작한 1세대는 대체로 분열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분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숙으로 이끄는 또 다른 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헤어짐은 아프다. 나는 이미 공동체의 논의 과정에서 한 차례 아픔을 겪었기에 또 그런 아픔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이번엔 정말 시작이 되었고 결혼과 같은 삶이 갈라서는 것은 데이트하다 헤어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깊은 고통이 예상되니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지혜를 찾던 중 책에서 길을 보았다. 내가 아내에게 말한 대답을 지지해주는 문구가 본회퍼의 글에도 있다. 그는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허물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세운다.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공동체는 이상의 결합이라기보다 인격적 연합이라는 말이 아닐까?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공동체의 이상을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공동체를 세운들 그 공동체에 이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 공동체에 걸맞은 이상을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믿음이 아닐까? 그리고 공동체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는 과정에서 새로운 하나가 되어 부르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과 참으로 비슷하다. 누가 결혼을 이상(비전)의 결합이라 여기는가? 결혼엔 로맨스가 필요하다. 사람을 사랑해야 결혼이 가능한 것이고, 이상은 그 가정의 역량에 맞게 생겨나고 자라고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1세대가 겪은 분열의 고통은 사상가 중심의 이합집산이 낳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상에는 동의하였으나 동상이몽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공동체는 분열한다. 또한 이상이 고상하나 이를 지탱할 역량이 없을 때 실망하여 공동체는 분열한다. 그 실망은 사상가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역량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본회퍼는 과감하게도 그런 이상을 가진 자가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가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한 단어는 ‘사랑’이다. 공동체 이상의 종착역도 ‘사랑’이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는데 타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우린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상과 사랑은 본래 함께할 수 없는 충돌하는 단어라기보다 과정과 목적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목적이고 이상이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순서가 바뀌면 공동체가 깨어진다.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공동체가 되었으나 어느 순간 이상의 도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우리는 사랑에 항복하여 희생할 수는 있어도 이상을 이루려고 사람을 이용해선 안 된다. 그래서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구성원 모두가 사랑에 항복하는 기간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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