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호 교회 언니, '종교와 여성'을 말하다]

▲ Statue of Julian of Norwich by David Holgate, west front, Norwich Cathedral

‘노리치의 줄리언’과 나
대학 졸업 후 8년 만에 다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서른 초반,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배낭을 지고 뛰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나이에….’ 그로부터 12년 후 마흔 중반의 나이에 미국의 캠퍼스에서 다시 배낭을 지고 뛰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나이에….’

아마도 화요일이었지 싶다. 세 시간짜리 수업이 두 개 연달아 있었다. 그리고 두 강의실 간의 거리는 먼저 수업이 끝난 곳에서 다음 강의실까지 무릎이 아플 정도의 속보로 걸을 경우 약 10분이었다. 두 대가의 강의였다. 한 사람은 여성 신학의 대모인 로즈마리 래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euther), 또 한 사람은 미국에 단 두 곳밖에 없다는 종교여성학 과정을 내가 다니는 학교에 개설한 캐런 조 토저슨(Karen Jo Torjesen)이었다. (종교여성학 과정이 있는 다른 한 곳은 하버드 대학이다.) 류터 교수는 작년에 뇌출혈로 쓰러진 후 오른쪽이 마비되고 언어 장애가 와서 가족과 동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고 계신다. 토저슨 교수도 2년 전에 뇌출혈이 왔지만 다행히 온전히 회복되었고, 은퇴한 뒤 아프리카에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나는 두 분의 마지막 학생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두 강의실 간의 거리가 다소 먼 이유는 캠퍼스가 커서가 아니라 류터 교수의 수업이 다른 곳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류터 교수는 클레어몬트 신학교 소속이고, 토저슨 교수는 클레어몬트 대학원 대학교 소속이었다. 두 학교는 서로 완전히 다른 학교지만, 클레어몬트 대학원 대학교의 종교학과와 클레어몬트 신학교는 서로 수업과 도서관 자료를 공유한다. 여하튼 그러한 이유로 두 강의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나와 같은 강의 스케줄을 가진 학생이 두 명 더 있었는데, 걸어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곳은 캘리포니아, 자동차 없이는 생활이 여러 모로 불편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차를 소유하는 대신에 회원제로 등록해서 필요할 때마다 빌려 쓰는 렌트카를 이용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차를 가지고 있고, 일단 차를 가진 이상 십분 거리도 걸어다니지 않았다. 그러니까 평생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뚜벅이로 살아온 나는 이동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게 ‘걸어서 버스나 지하철 타고’라면,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이동’과 ‘자동차’는 거의 동의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워낙 광활한 지역에 시설들이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어서 자동차가 아니면 이동이 힘들기 때문이다. 모든 생활이나 공간이 자동차를 전제로 돌아가고 배치되는 문화였다.

자동차 이야기를 서두에 이렇게 길게 꺼내는 이유는, 자동차 없이 시작한 (그리고 끝낸) 내 유학 생활이 14세기의 신비가 ‘노리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의 생활과 은유적으로 겹쳐져서다. 신비가란 중세 때 책으로 신을 연구하는 대신에 신비한 체험으로 신을 경험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체험을 직접 글로 남기기도 하고, 문맹일 경우 대필로 남기기도 했다. 노리치의 줄리언은 직접 기록을 남겼다. 예상했겠지만, 줄리언은 여자이다. 그리고 그녀는 ‘앵커레스’(anchoress)였다.

‘여성 은자(隱者)’ 혹은 ‘혼자 사는 수녀’ 정도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어디로부터 물러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anakhoretes에서 유래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로, 남성형은 anchorite, 여성형은 anchoress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조건에서, 왜, 혼자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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