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호 3인 3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 벨 훅스 지음 /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2017년

안경을 바꾸었다. 이번에 선택한 안경테는 내 눈에 맞는 렌즈가 무리 없이 기능하는 선에서 가장 크고 둥글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피부에 직접 닿는 안경다리는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다. 테가 아무리 좋아도 렌즈 도수가 눈에 맞지 않으면 헛일이다. 안경을 맞추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지난 몇 년간 내 시력보다 과한 근시 도수로 맞춘 렌즈를 끼고 있었다는 것! 그동안 잘못 맞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던 셈이다. 안경이 제법 마음에 들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적응이 쉽지는 않다. 안경이 비뚤어진 것 같은 느낌에 자꾸만 만져보게 되고, 눈동자를 좌와 우, 위와 아래로 옮길 때마다 살짝 어지러워 혼란스럽다. 참 이상한 일이다. 잘못 맞춘 렌즈로 볼 때보다 제대로 맞춘 렌즈로 보게 된 지금이 혼란스럽다니!

페미니즘을 “다른 렌즈를 착용”하는 것에 비유한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런 상태를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고 표현한다. 그 말을 나에게 적용해보자면, 렌즈를 바꾼 현재 상태는 과도기이고 곧 적응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불편한 이물감을 감수하더라도 렌즈를 바꾸어야 할 때를 잘 아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지금이 그렇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근 페미니즘에 관심이 높아졌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은 각종 여성 혐오 논란, 강남역 인근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사건 등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겪어온 차별과 불평등에 관해 배우고,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보는 렌즈를 비로소 자신에게 딱 맞게 교체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맞춤형 렌즈일까? 벨 훅스의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다. 흑인 여성인 그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백인 여성 중심으로 전개되는 페미니즘 운동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페미니즘을 ‘모두를 위한’ 것으로 정의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말한 그는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을 초월한 성차별, 인종, 계급의 문제에 접근하는 보편적인 감각이자 운동, 학문으로서 페미니즘을 소개한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은 우리가 모두 공유해야 할 여러 주제를 쉬운 언어로 담았다. 쉽다고 가볍지는 않다. 이 책 내용만 제대로 소화한다면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렌즈에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추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번 개정판에 추가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해제 때문이기도 하다. 권김현영은 20년 전 미국 사회의 맥락에서 쓰인 이야기를 오늘 우리 사회에 유효한 이야기로 되살렸다. 특히 그가 강조한 ‘예민함’이라는 감각은 렌즈를 바꿨을 때 발생하는 불편한 이물감과 공존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벨 훅스가 상상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권김현영의 말처럼 불편하고 예민한 감각을 단단하게 벼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갱신하며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세상은 여성들에게만 이로운 게 아니라 모두에게 이롭다. 페미니즘이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맞춤형 렌즈다.

“만약 정말 적응이 안 되면 오세요. 예전 도수로 다시 맞춰드릴게요.” 말하는 안경원 주인에게 인사하고 가게 문을 나서는데 이전 안경보다 1.5배쯤 커진 렌즈 위로 햇살이 와르르 쏟아졌다. 잠시 어질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예전 렌즈로 바꾸러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오수경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글쓰기 울렁증이 있고, 책을 많이 사지만 읽지는 않고,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부끄럼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수다스럽고,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다. 사훈이 ‘노는게 젤 좋아’인 청어람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며 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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