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예수살기 사무국장·박수규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상황실장

 

   
▲ 강형구 예수살기 사무국장 ⓒ복음과상황 이범진
   
▲ 박수규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상황실장 ⓒ복음과상황 이범진

지난해 여름을 달군 ‘성주의 싸움’은 외로웠다. 보수정당의 표밭인 경상북도 성주 주민들의 사드 반대 투쟁은 ‘지역 이기주의’ 프레임에 갇혀 자유롭지 못했고, 대선 이후엔 더욱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시 성주 지역 개표 결과(홍준표 56.2%, 문재인 18.1%)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성주 군민들이 사드 배치를 원한다’고 비아냥댔다.

성주의 사드 반대 투쟁 이야기를 담은 <파란나비효과>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지난 6월 26일 녹색당에서 이 영화를 단체관람하고 성주 군민과 대화하는 시간을 기확했다. 영화는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에서도 지지받지 못하지만 고립된 싸움을 끈질기게 해내면서 변화해가는 성주 유권자들의 이야기이자, ‘사드 반대 투쟁’이 평화운동이 되어가는 과정을 생생히 담았다. (영화는 상영관을 거의 잡지 못하고 개봉하자마자 내리다시피 했다.)

영화 상영 후 성주 군민과의 대화 시간에 “대선 이후 성주에 실망했다”는 객석 반응이 나왔다. 영화에 출연한 이수민(55) 씨는 언론이 통계 수치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했다. “기존 같으면 80%에 달했을 (홍준표) 득표율이, 제3부지로 사드 배치를 확정한 관군의 연합 작전에도 불구하고 30%나 떨어진 건데요. 언론의 통계 해석에 문제가 있어요. (표심) 변화의 폭을 봐야지 전체 득표율로 성주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오류 아닌가요?”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가 건너뛴 절차와 소통 과정을 밟는다고 발표했다. 우선, 환경영향평가 진행에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이것이 곧 사드 배치 철회를 의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성주 군민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간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그 유명한 ‘외부세력’ 없이 1년이 다 되도록 지난한 싸움을 이어온 성주 사람들에게 시간이 생겼다. 그 덕분인지, 대통령이 방미 중이던 6월 30일에 찾아간 성주 소성리의 사드 배치지 진입로 앞에 일시적이나마 숨을 고르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마을회관 앞에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두 사람을 만나 끈질기게 싸우는 이유, 그 ‘사명’의 근원을 물었다.
 

   
▲ "투쟁하면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는 메시지만 한 달 가까이 반복했어요. 상대를 조롱하거나 비난하지도 말자고요. 그렇게 하니 사드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도 촛불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더라고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닌 건 아니에요”
― 박수규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상황실장 ―

성주 군민 박수규 씨는 사드 반대 투쟁 시작부터 현재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쟁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지역공동체 곳곳을 돌보고 있다.

― 활동가들 사이에서 박수규 씨가 굉장히 유명한 분이던데요.
상당히 부담스럽네요.(웃음) 저는 2009년에 성주에 들어와서 지금 성주군 대가면에 살고 있어요. 영어 학원 강사를 오랫동안 했는데, 성주에서도 농사를 지으면서 영어학원도 같이 하고 있어요. 본업이라기보다는 아이들 만나는 걸 좋아해서 일주일에 (수업을) 두 번씩 하고, 나머지 시간은 농사를 짓습니다.

― 어떤 농사를 짓나요?
딸기농사와 벼농사요. 벼는 보통 5월에 시작해서 10월 말까지 하고요, 딸기농사는 9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4월 말까지 합니다. 여름엔 벼농사, 겨울엔 딸기농사 중심으로 하는 거죠. 저는 성주가 고향이에요. 물론 대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를 비롯해서 가족 어른들은 성주에 쭉 사셨어요. 사실 제 고향이기보단 어른들 고향이죠. 농부는 아니셔서 농지를 물려받은 건 아니고요. 8년째 계속 농사를 짓고 있는데 아직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 귀농하신 건가요?
네. 10년 넘게 읽어온 〈녹색평론〉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지요. 그렇다고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어요. 아내가 학교 선생님이고, 한 집에 정규직은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평소 생각해왔거든요.(웃음) 마흔 살이 넘었을 때 쉰 살 넘어서까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보니, 환갑 넘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농사인 것 같더라고요. 사드 투쟁하려고 귀농한 건 절대 아니었지요.(웃음)

― 사드 배치 소식에 많이 놀라셨겠네요.
‘멘붕’이었죠. 작년 7월 8일에 성주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왜관에 사드가 배치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주에 알음알음 아는 분들에게 연락했어요. 농민회나 세월호 촛불집회에 다니시는 분들과 사드에 대해서 알아가는 세미나를 시작했죠. 그런데 12일엔 사드가 성주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는 언론 발표를 보고 생각했지요. ‘아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구나’ ‘이제 내 일이 되는구나’ 하고.
 

   
▲ 녹생당 릴레이 1인 시위에 참여한 박수규 상황실장(맨 오른쪽) ⓒ복음과상황 이범진


―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일을 맡고 있는데, 이런 경험이 좀 있으세요?
제가 소위 ‘386’ 세대에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굳이 밝히자면 학내운동보다는 기독교 청년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예전부터 〈복상〉도 알고 있었어요. YMCA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청년 조직인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에서 주로 활동했고요. 그때 기독교 청년운동은 굉장히 활동적이고 적극적이었지요.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예장, 기장, 기감 교단 청년들이 모여서 노동, 농촌, 빈민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었으니까요. 그때가 전두환 시절이라 탄압이 심해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들은 발붙이기가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학교 안팎 운동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많이 활동하고 그랬지요. 그땐 문익환 목사님이나 안병무 박사님처럼 의지할 수 있는 기독교 어른들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종로5가’ 활동이 활발하고 의미 있었지요.

― 지금은 ‘초보 농부’신데, 싸움과 농사를 병행하기가 어렵지 않나요?
어렵지요. 작년에 농사 다 망쳤습니다. 딸기 모종을 9-10월에 심어놓고는 물을 못 줘서 반 이상이 죽었어요. 저 말고도 망친 농부들이 많아요. 참외농사 짓는 사람들은 투쟁에 쓸 장작을 패느라 농사를 망쳤죠. 겨울 집회 때 추우니까 난로를 피우려고 날마다 장작을 팼거든요. 낮에 농사 안 짓고 장작 패다가 다 망했죠. 싸움 끝나고 나면 소송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 성주읍에서 제3부지인 소성리로 사드 배치지가 옮겨지면서 투쟁의 동력이 떨어졌을 텐데요.
제3부지 발표 이후에는 “성주는 초전(면)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외쳤어요. 성주에 사드가 온다고 했을 때 초전면 할머니들이 촛불집회에 열심히 왔거든요. 첫날부터요. 예전엔 식당이나 가게 문에 ‘사드 반대’ 스티커 붙은 곳이 많았는데 요즘엔 별로 없어요. 그나마 끝까지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전히 하나의 성주가 되는 거죠. 변두리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투쟁을 멈춘다면 성주는 지역공동체로서 의미는 다 없어집니다. 행정구역상으로만 존재하는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촛불을 드는 거예요.

― 긴 싸움에도 상대적으로 밀양이나 강정에 비해 주민 갈등 문제가 불거지진 않는 건 그 때문인가요?
성주투쟁위가 가장 애쓰는 부분이에요. 군수가 끊임없이 주민들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려고 했거든요. 주민들 이간질하려고 온갖 공작을 다 부렸어요. 그런데 우리끼리 싸우면 평생 원수가 되고 말아요. 이겨도 이기는 싸움이 아닌 거죠. 투쟁하면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는 메시지만 한 달 가까이 반복했어요. 상대를 조롱하거나 비난하지도 말자고요. 그렇게 하니 사드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도 촛불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더라고요. 지금도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은 하지 않아요.
사드가 워낙 덩치가 커서 필적할 만한 보상 체계를 말할 수 없는 것도 주민 갈등이 심하지 않은 이유에요. 국방 관련 사업이라 여기서 보상을 논하면 이후 사안에서 대책이 없어지니까요. 성주 군수는 뭐라도 건지려고 했지만, 실패했죠. 그나마 이 싸움이 오염되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 중 하나 같아요.
 

   
▲ "투쟁 속에도 기쁨이 있어요. 그게 없다면 어떻게 버텼겠어요." "하나님이 부르는 순간이다 싶으면 다 던지고 가야죠. 거기서 삶의 변화가 시작될 거예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극우 보수단체가 와서 방해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북청년단 정함철 단장이 성주에 방을 얻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람들 서너 명 동원해서 휘젓고 다녀요. 그중 개망나니들도 많지요. ‘사드 반대’ 모자를 쓴 사람을 보면 ‘빨갱이’라고 인신 모독을 하고, 마을 벽이나 논밭에 소변을 갈기기도 하고요. 아마 집단화된 의식 속에서 가능한 짓 아닐까 싶어요. 원래 안 그러던 사람도 군복을 입혀 놓으면 마초가 되듯, 개인으론 인자한 할아버지일 수 있는 그들이 태극기 깃발 들고 모이는 순간 개망나니가 될 수 있는 거죠. 이념이 참 위험한 것 같아요. 사람을 도구화하고, 사람을 헤쳐도 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니까요.

― 〈파란나비효과〉 상영 후 대화 시간에 말씀을 하시다가 울컥하셨어요.
지난 300일을 돌아보면 울컥해요. 저를 비롯해서 여기 성주 사람들 모두 일상을 잃어버렸거든요. 어느 날인가 오후 10시 전에 집에 들어온 거예요. 보통은 촛불집회 마치고 집에 오면 12시거든요. 집에 들어와서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켰는데 화면이 뜨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억수로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왜 우는지 생각해보니 ‘이게 원래 일상이었지’ 싶더라고요. 일상을 잃고 살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졌어요.

― 그렇게 일상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사드 반대 활동을 계속 해나가시는지요?
투쟁 속에도 기쁨이 있어요. 그게 없다면 어떻게 버텼겠어요. 진지하고 엄숙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애를 썼어요. 그래야 오래 가니까요. 투쟁위 활동하면서 사람들과 뭔가를 나누는 경험이 참 기뻐요. 농사도 짓고 학원도 가야 하고 밤마다 회의도 해야 하는데, 기쁨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죠. 겨우내 장작 패던 사람들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았거든요. 의무만으로는 절대 못 할 일 아니겠어요?

― 스스로 많은 변화를 겪으신 것 같아요.
이제는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투쟁 전에는 막연히 성주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가슴에서 성주 주민이 되었다고 할까요? ‘내가 성주 사람’이라는 자부심도 생기고요. 애국심이라는 것도 이렇게 생겨나는 거다 싶어요. 월드컵 때 태극기 흔드는 뿌듯한 기분도 애국심의 일부겠지만, 나라를 위해 절실한 마음으로 투쟁할 때, 이념이 아니라 내 옆에서 동행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을 때 진짜 애국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 교회에서 사드 관련 강의도 하셨던데요.
종종 요청이 와서 했어요. 초창기엔 제가 출석하는 성주제일교회에서 노회시찰연합회가 열렸는데, 그때 목사님 장로님들 앞에서 강연했어요. 성주 주민들 분노가 가득할 때인데, 사드가 어떤 무기이고, 사드가 들어오면 성주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동북아 정세에 사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찬찬히 소상하게 알려드렸죠. 자세한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런데 (2016년) 8월 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경북 초선 의원들을 만나 성주 읍내 성산에서 제3부지로 옮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뒤로는 반응이 갈렸지요.

   
▲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 관객과의 대화에서 박수규 상황실장이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지금 투쟁은 신앙과도 맥을 같이 하는 건가요?
요즘은 게을러서 성경책을 잘 안 보지만 예전부터 운동하면서 늘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을 되뇌곤 했어요. 청년 시절에 받은 말씀이죠. 하나님께서 지명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8:34) 하는 말씀도 가슴에 스몄죠. 제가 이걸 사람들에게 강조할 정도로 억수로 성실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저에게 왜 이런 투쟁을 하느냐고 물으면, 말할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요. 말하고 돌아서면서 ‘나 아직 예수쟁이구나’ 하죠.

― 후배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천국은 도둑처럼 옵니다. 도둑처럼 왔을 때 거부하지 말고 그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하나님이 부르는 순간이다 싶으면 다 던지고 가야죠. 거기서 삶의 변화가 시작될 거예요. 다들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관성에 따라 살잖아요? 그렇게 사는 거 별로 행복하지 않잖아요. 도전해야 할 때 피하지 말고, 천국이 열리는 순간 그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지요.

― 사드 반대 투쟁은 언제까지 하실 건가요?
사드가 물러갈 때까지 할 생각이에요. 싸움의 형태가 달라질 수는 있겠지요. 그동안 우리가 맷집을 좀 키웠어요. 내 집에 강도가 들어왔는데 집을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버리고 간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적잖은 사람들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나라가 하는 일 막을 수 있겠냐”라면서 포기하라고 하지만, 아닌 건 아니에요.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기고 지는 건 나중 문제입니다. 지는 싸움이라고 해서 그만해야 하나요? 아닌 건 아니니까 끝을 봐야죠.

 

■ ‘사드 배치’가 결정되기까지 (2014~2017)
2014년 - 6월 5일 미 국방부 “한국 정부, 사드 관련 정보 요청했다”
2015년 - 5월 21일 국방부 “미국이 요청하면 사드 배치 협의할 것”
2016년 - 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 신년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서
                     “안보·국익 따라 사드 배치 검토”
          - 1월 25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 “군사적 관점서 사드 배치 검토 필요”
          - 2월 7일 한미, 북한장거리미사일 발사 직후 사드 배치 공식협의 결정 발표
          - 2월 22일 국방부 “공동실무단 구성·운영 협의 진행 중” 발표
          - 3월 4일 사드 배치 논의 위한 한미공동실무단 약정 체결 및 공식 출범
          - 7월 8일 한미, 사드 배치 결정 공식 발표
          - 7월 12일 황교안 국무총리 “사드 배치, 국회 비준동의 필요한 사안 아냐”
          - 7월 13일 국방부, 사드 배치 부지(성주) 공식발표
          - 7월 15일 황교안 총리 성주 방문, 주민설명회서 사과, 주민들과 대치
          - 7월 21일 성주투쟁위 서울역서 반대 집회
          - 8월 4일 박근혜 대통령, “사드, 성주내 다른 지역 배치 검토”
          - 8월 14일 국방부 현장 답사 시작. 성주골프장 등 후보지로 거론
          - 8월 21일 성주투쟁위, 국방부에 제3후보지 검토 건의 의결
          - 8월 22일 김항곤 성주군수 “성산포대 뺀 제3의 장소 결정해달라” 요청
          - 9월 30일 국방부 “성주골프장에 사드 배치” 발표
          - 11월 16일 국방부, 롯데와 ‘남양주 군용지-성주골프장’ 맞교환 합의
          - 12월 30일 국방부, 롯데와 부지 감정평가 완료
2017년 - 2월 28일 국방부, 롯데와 사드 부지 교환계약 체결
          - 3월 1일  한민구 장관,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과 전화 대담,
                        사드 ‘조속한 작전운용’ 합의
          - 3월 6일 미군, C-17 수송기로 오산기지에 사드 발사대 2기 공수
          - 4월 20일 한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따른 사드 부지 공여 절차 완료
          - 4월 26일 주한미군, 성주골프장에 사드 장비 반입

 

 

   
▲ "어찌 보면 제 인생이 쭉 싸워온 삶이에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왔고요. 제 삶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말씀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입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지더라도 끝까지 싸우면 부활할 수 있어요”
― 강형구 예수살기 사무국장


강형구 장로는 지난 3월 이후 성주로 내려와 기거하며 매일 아침 기도회를 진행하고, 불법 진입에 관한 시민 감시활동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개신교 천막을 지키고 있다.

― 장로님이 아침마다 마을회관 앞에서 기도회를 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기독교현장기도소 천막을 설치한 뒤, 며칠 안 되어 사드부지공사 차량을 막는 싸움이 있었는데,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종교행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막 안에서 우리끼리 조용히 드리던 아침기도를 도로에서 하기로 했지요. 이후 매일 아침 마을회관 앞 도로위에서 기도회를 열고 있습니다. 참여하는 분들은 비록 소수지만 소성리의 아침을 기독교의 평화기도로 시작하고 깨운다는 생각으로 지킴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 이곳에서 함께 고통 분담을 하는 개신교도들이 많이 있나요?
개인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대책위나 활동가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꽤 있고요. 평통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는 2014년부터 사드 투쟁을 벌인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 회원들도 많이 찾아와요. 개신교인들은 개신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가 꽤 많아요. 도움의 손길이 많은데, 청년 때 감리교 청년회 활동을 했던 멤버들도 성주투쟁위 상황실에서 궂은일 도맡아 하는 분들이지요. 목사님들도 많이 찾아와요. 대구 새민족교회 백창욱 목사님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여기서 지킴이 활동을 합니다.

― 장로님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셨는데요?
처음 온 건 올해 3월 초였어요. 건강이 안 좋아져서 피정할 곳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예수살기에서 농담처럼 성주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피정하면 어떻겠냐는 말이 오가고 나서 3박 4일 답사를 왔습니다. 와서 보니 상시로 여기서 지낼 사람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짧게 방문하고 묵어가는 사람들은 이곳 상황과 맥락을 잘 전해줄 수가 없잖아요. 누군가 여기 항상 있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고, 와서 4주 정도는 천막에서 생활을 했어요. 대선을 앞둔 지난 4월 26일 새벽에 국방부가 성주에 사드를 기습 배치하면서는 긴장 상태가 되고, 가톨릭 신부님들이 이곳에 내려와서 건너편 집에서 머물렀거든요. 신부님들 돌아간 후에 집주인과 상의해서 제가 그곳에서 머물고 있지요.

―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매일 아침 기도회를 6:30에 열고 있고요. 여기 지킴이들과 돌아가면서 마을 앞 도로에서 사드장비나 공사장비의 반입을 매일 감시하고 있어요. 레이더 가동을 위한 유류의 반입도 감시하고, 4월 26일 주민들을 비웃으며 미군들이 들어간 뒤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식사과가 있을 때까지는 미군들의 출입도 저지하고 있고요. 이런 활동은 지킴이들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고 있는데, 전에는 하루 두 번씩 차례가 돌아왔는데, 요즘은 한 번만 서요.

― 지난 3개월간 이곳 소성리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셨겠네요.
여기 사드 발사대가 기습적으로 들어오던 4월 26일 그날, 처음으로 ‘아, 이 나라는 미국의 군사 식민지구나’ 절감했지요. 이전에도 한미 동맹의 형편에 대해 그런 해석이 있어왔지만, 솔직히 과장된 운동 구호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현실이에요. 그날 이후에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쓴 한미동맹 관련 칼럼을 쭉 찾아 읽고 많이 배우고 있죠. 식민지라는 말을 체감하고 있어요. 그날 저도 영문이랑 한글로 쓴 피켓을 각각 하나는 몸에 입고 하나는 지팡이에 묶어 시위를 했습니다. 여기 내려오기 전엔 미 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 할때 만든 피켓이 있었는데 "Hey! U.S.A! Are You Freinds? or Occupation Troops?"라고 적었거든요. 4월 26일 그날도 이 피켓을 들었는데, 그날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거죠.

   
▲ 강형구 사무국장은 매일 앞 도로에서 사드장비나 공사장비의 반입을 감시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이런 활동을 하고 계신 이유가 있나요?
어찌 보면 제 인생이 쭉 싸워온 삶이에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왔고요. 제 삶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말씀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입니다.

―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오셨나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 전도로 교회에 처음 다니게 됐어요. 부모님 몰래 한 학기 정도 다니다가, 발각되고 엄청 혼이 났어요. 그리고 가출을 했지요. 교회 목사님께 상담도 해보고 그랬는데 목사님한테 사정을 말해봐야 그걸로 끝이더라고요. 나 같으면 부모님이라도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해줄 것 같은데 아니었어요. 어느 날 설교 중에 내 믿음을 칭찬하더라고요. 그게 다였어요. 나는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는데요. 어린 나이였지만 이건 ‘가짜’ 같았고, 이후로 다신 교회에 나가지 않았어요.

― 그런데 어떻게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나요?
교회 다녔던 중학교 한 학기 남짓의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늘 남아있었어요.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된 건 전교조(전국교사노조)운동을 하면서고요.

― 교사를 하셨네요.
네. 원래 중학교 도덕 과목 선생이었습니다. 제가 선생을 할 때가 전교조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가 막 뿌리내리기 시작할 때인데, 이 단체가 1년도 채 되기 전에 전교조운동이 되었지요. 저는 전국교사협의회를 통해 각 지역의 교사들이 기반을 튼튼히 만든 후에 전교조로 나아가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교조가 되는 걸 반대했었어요. 의식이나 조직력 면에서 섣부르다고 판단했거든요. 하지만 여러 사람의 설득과 여론에 못 이겨 전교조운동을 하게 되었고, 제가 총대를 멨지요. 정작 외부 압박에도 끝까지 버티다가 해직된 사람은 제 주변에는 저뿐이었고요.(웃음) 해직 후 ‘출근 투쟁’도 했어요. 끝까지 버티기 위해서 학교 밖 거리 교실도 운영했어요. 깃발 세워 길에서라도 수업하려고요. 하교하는 학생들에게 수업 관련 유인물을 나눠주고 그랬어요. 한 번은 “수업 듣고 싶은 학생들은 한강시민공원으로 모이라”고 했는데, 그날 장학사들이 공원에 쫙 깔렸죠. 학생들이 장학사들한테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학생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어요. 당시 교회로도 전교조운동을 설명하러 찾아다녔는데 그때 가장 사람이 많이 모였던 교회가 지금 제가 섬기는 교회에요. 교회에서 설명회 하다가 목사한테 붙들려서 다니기 시작한 거죠. 그 동네로 이사도 했고요.

― ‘출근 투쟁’이 쉬운 일이 아니었네요.
그런데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중앙에서 그만 접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어떡하나 하던 참에 저는 생계대책파트 일을 맡게 되면서 현장 투쟁과 멀어졌어요. 당시가 첫아들이 백혈병 투병 4개월 만에 숨을 거둔 시기기도 했고요. 그리고 김영삼 정권 때, 전교조 탈퇴 각서를 쓰면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켜주겠다고 회유책을 쓰더라고요. 중앙에서는 해직 교사들의 현실이 어려우니 일단 ‘탈퇴’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제 입장은 끝까지 가는 거라서, 당시 대의원회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결론 나면 나는 위장이 아니라 정말 탈퇴하고, 전교조운동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어요. 탈퇴 각서를 쓰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저는 결국 전교조와 인연을 끊었지요. 1994년 3월에 복직된 이후엔 학교와 교회 일에 전념했어요. 그후 어떤 단체나 조직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것은 피해 왔었습니다. 조직의 쓴 맛을 경험했달까요?

― 교사 일은 왜 그만두었나요?
학교의 환경들이 바뀌어나가면서 내가 학교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요. 정년을 10년 앞두고 퇴임했어요. 이후 호스피스 봉사활동에만 매달렸는데, 도중에 세월호 사건을 만났어요.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들을 반성하게 되었지요. 그 후 거의 광장으로 출근했지요. 계속 관심을 갖고 기독교 관련 집회에도 참석했지요. 〈뉴스앤조이〉 성서학당을 통해 예수살기 김경호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촛불교회도 알게 되고, 예수살기도 알게 된 거예요. 예수살기 단체의 속사정을 알게 되어 후원만 하다가 사무국장까지 하게 됐고요.

― 싸움 경력이 오래되셨네요. 이번 ‘싸움’은 이길 수 있을까요?
저는 지더라도 끝까지 해서 이겨내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는 듯 보여도 끝까지 하면 부활할 수 있어요. 그렇게 이겨내야 하는데, 감정이 앞서면 실패하는 일이 많지요.
 

   
▲ "예수는 일생이 싸움의 연속이더라고요. 정치인, 제사장 그룹으로 상징되는 ‘종교’와 싸우는. 그리고 끝끝내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생을 마쳤잖아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성주에 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제 삶의 화두가 되어 버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말씀에 비춰 예수님의 삶을 다시 보니까 예수님은 일생이 싸움의 연속이더라고요 정치인, 제사장 그룹으로 상징되는 ‘종교’와 싸우는. 그리고 끝끝내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생을 마쳤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예수의 삶에서 배우고 깨닫는 면이 많아요. 은근하고 조용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요. 사실 타고나길 어릴 때부터 ‘지독한 싸움꾼’이었어요. 잘하는 건 오직 공부뿐이라 학급 친구들한테 미움도 많이 받았는데, 그 친구들한테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버텨서 이기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아마도 어릴 때 싸운 방식이 내 평생의 싸움 방식이 된 것 같아요.
어릴적에 아이들 싸움이 재판으로 간 경험을 하고 이후론 싸움을 절대 안 하기로 결심했지요. 아무리 애들이 건드려도 계속 싸우지 않았더니 어느새 ‘어떻게 해도 괜찮은 놈’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 틈에 억울함이 참 많이 쌓였었는데, 앞서 말했듯 중학교 한 학기 시절을 교회에서 보내며 어떤 계급도 빈부귀천도 따지지 않는 평등한 사귐이 있는 경험을 한 게 행복했어요. 전도한 담임선생님도 아이들을 골고루 관심 가져주는 분이었고요. 교회를 떠나서 다시 세상에서 불공평과 억울함을 겪었지요.

― 몸도 안 좋으신데 여기서 ‘피정’이 되나요?
우리 사회 자체가 피정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는 아직 아니지요 사실. 싸우라고 이 자리에 보내졌지만, 그래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서울에서보다 덜해요. 공기도 좋고요. 마가교회 장로님이 다녀가시면서 알려주신 몸살림운동을 하고 있어요. 글 쓸 환경이 안 되는 게 문제긴 해요.

― 끝으로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먼저 하나님,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닮아가려는 마음으로 가득찼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이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엡 4:13-14)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스스로 기독교인이라면서, 인격이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들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인격에 등급이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들 사는 거지요. 마치 인격을 보편적인 인권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틀렸어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인(聖人)과 같은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격에는 분명히 등급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마저 다수의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안정감에 안주하고 예수님처럼 살기를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수준까지 인격을 성숙시키고, 삶에서 ‘작은 예수로 살기’가 우리 기독교인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예수님 눈으로 볼 때 연민을 느끼는 곳으로 행동까지 따라간다면 거기서 소명까지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기사 수정 (2017.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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