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호 민통선 평화 일기 06]

   
▲ 국경선평화학교에서 열린 'YMCA 평화대회' (사진: 국경선평화학교 제공)

통일은 애통한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지, 왜 해야 하는지를 절실히 느낀 날이다.

방문객들과 함께 한 여인이 소이산에 올라왔다. 철령(鐵嶺)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동북쪽 금강산 가는 방향으로 굽이굽이 겹쳐 있는 산을 가리켜준다. 비무장 지대를 사이에 두고 푸르른 산맥 위에는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표시하는 철조망 황토색 길이 마치 바리깡(Bariquant)으로 머리를 밀어놓은 것처럼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여인은 북녘땅 철령을 말없이 바라본다. 

여인은 함경도에서 온 탈북민(새터민)인데 남동생이 지금 철령 산속 어디쯤에 군인으로 있다 한다. 남동생이 열여덟 살에 군복무하러 집을 떠난 뒤, 여인도 고향 집을 떠나 온갖 고생을 겪고 남한 땅에 와 있다. 서로 소식을 모른 채 살아 온 세월이 20여 년, 남동생은 집을 떠난 누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것이라 한다. 여인은 동생이 철원 동북방 철령 산속 군부대에서 군 생활한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다.

어느 날 여인은 철원으로 통일여행 간다는 남쪽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남동생을 가까이 볼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을 품고 여행팀에 참가한 것이다. 소이산에 올라 북녘 철원산맥을 바라보는 누나의 가슴은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 멀지않은 곳인데…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요, 걸어간다 해도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산속에 남동생이 있다는데, 달려가 만날 수 없는 가슴은 애통하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 마음도 애통하다.

나는 함께 온 사람들에게 북녘땅 철령을 향해 남동생 이름을 크게 불러보자 청했다. 모두 함께 여인의 동생 이름을 세 번 네 번 다섯 번 크게 부른다. 그리고 함께 북녘 땅을 바라보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노래 부르는 중에 여인이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고 억눌렀던 한이 터지는 듯 꺼이꺼이 소리내어 운다. 여인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도 함께 운다. 모두 가슴 속에 울음이 차오른다. 애통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일 게다. 열여덟 살 남동생과 헤어져서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그리움은 한이 되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남녘 땅에 와서 살고 있는 누나는 남동생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다.

“◯◯아~ 누나 여기 살아 있다! 누나 여기 살아 있다!”

분단은 통곡이다. 나는 남북한 분단이 무엇인지, 문자로 알던 분단의 슬픔을 만났다. 여인의 슬픔은 다만 개인의 슬픔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슬픔을 안고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천만 이산가족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3만에 이르는 탈북민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북녘 땅의 가족과 헤어진 채, 언제 만날지 모를 기약 없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산상수훈 말씀이 오늘 분단 슬픔을 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위로의 말씀임을 깨닫는다. 값싼 위로가 아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용기와 희망의 위로이다. 새 날 새 역사의 위로이다.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은 애통한 삶의 사람들이 새 시대의 주인이란 말씀이다. 남북 분단 시대에 애통한 사람들이 위로받는 날은 통일의 날이다. 남북한 평화 통일은 소이산의 저 여인처럼 애통한 사람의 가슴에서부터 온다. 분단으로 인해 진실로 애통한 그 가슴이 남북 통일의 원동력이다. 나의 이런 깨달음이 감상적인 것일까? 진실로 절실하게 남북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분단으로 애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소이산에 오른 그 여인을 통해 나는 큰 배움을 얻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너는 애통하며 사는가?’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