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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으로 걷는 민족화해의 길
[323호 사람과 상황] 동북아의 한민족 평화 꿈꾸는 박영춘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장
[322호] 2017년 08월 29일 (화) 10:45:49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 ⓒ복음과상황 오지은

“‘여기서도 나는 반쪽짜리구나.’ 나는 한국을 매우 좋아했지만, 거기서 나는 나답게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죠.”

3년 전 재일동포 2세 손유구 가와사키도테교회 목사가 했던 말이다(본지 284호 8-22쪽, “철거 위기 교회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학교생활을 하고부터 일찍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그는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기로 했으나, 신학교에 진학 후 다른 재일동포들을 만나면서 바뀌었다. 한국을 알고자 서른 살 한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한계를 체감하고 1년 반 만에 일본으로 되돌아가 재일동포 사역을 시작했다. 인터뷰 당시 손 목사는 철거 위협을 받는 도테교회의 세 번째 목사로서 가난한 재일동포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광복 및 남북 분단 72년째인 올해도, 민족 역사의 비극 속에서 강제 시작된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손 목사 같은 재일동포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대한민국 재외동포는 현재까지 대략 720만 명, 국내 체류 동포는 조선족과 고려인이 각각 70만여, 4만여 명 정도다. 

지난 7월말 인터뷰한 박영춘(39)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장의 경우, 친가 외가 모두 일제 강점기에 (당시 명칭인) 북간도로 이주한 재중동포, 조선족이다. 굳이 따지면 조선족 3세인 그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위치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시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 진학 전까진 쭉 연변 말을 사용했다. 학창시절엔 패를 이루어 한족 학생들과 싸운 적도 있다. 장춘 동북사범대학에 진학하면서 처음 연변을 벗어나 혼란과 고충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대학 4년간 “맘껏 중국문화를 만끽했다”고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연변에서 교직에 몸담으려던 계획을 접고 외국행을 택했고, 일본행이 좌절되면서 2002년 대한민국으로 건너왔다. 한창 디지털 붐이 일었던 때다. 한국 기업에 취업할 생각으로 통신공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2009년 귀화를 했고, 그동안 한국에서 교회라는 곳을 처음 다니게 되었다. 교회 소모임 식구들과 계획한 연변 여행이 1기 ‘통일비전트립’이 되었고, 교회 선배가 맡고 있던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 일을 박 팀장이 맡게 되었다. 그 후 11년째 통일비전트립을 인솔하면서, 북중접경지역 여행 경로를 매년 기획한다. 아울러 가깝고도 먼 연변과 조선족, 아울러 북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시간과 여지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한국에 건너온 그의 생의 방향이 하나님을 알고부터 적잖게 틀어져 버렸다. 이제 그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아닌, “민족의 평화를 바라본다.”

올해 11기 통일비전트립은 연길에서 두만강이 흐르는 도문, 윤동주가 자라난 용정 등을 탐방하고 북한 사역을 오랫동안 해온 A 목사를 만나는 일정으로 7월 24일부터 5박6일간 꾸려졌다. 이 길을 동행하면서, 여정 마지막 날 박영춘 팀장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 경계 지점에 위치한 그의 삶의 여정에 질문을 건넸다. 인터뷰는 연길시 로뎀나무 카페에서 진행했다.

― 한국은 언제 온 건가요?
2002년 처음 왔어요. 디지털이 많이 발전하고 있었고 ‘한국’하면 삼성, 엘지가 바로 떠오르던 때죠. 전자 기술을 배우면 먹고는 살겠다 싶어서, 한국에서 전자 통신을 배우고 삼성에 취직할 목적으로 한국에 왔어요. 와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요.

―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원래는 장춘 사범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했어요. 임용고시가 따로 없고 대학 졸업장이 곧 자격증이에요.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다 보면 학교에서 채용을 하니까 대학 친구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간혹 중학교나 대학교 선생님을 하지요. 저도 자연스럽게 연변에서 선생님을 하려고 했고요. 그런데 연변 소재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던 대학교 조선족 선배에게 교육 환경이 어떤지 듣고는 뜻을 접었어요. 연변은 학부모가 대부분 일본, 한국으로 이주 노동을 가거든요. 아이들이 조부모 손에 자라는 경우가 많고 깨어진 가정이 많아요. 비행청소년이 많지요. 한 반에 50명은 되고요. 내가 담임선생으로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보살필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할 게 없어졌지요. 이미 외국으로 나간 친구들도 있고, 저도 다른 걸 배울 생각으로 무작정 일본행을 택했어요. 그런데 지원한 학교에서 제 고등학교 졸업장이 가짜라며 거절했어요. 물론 사실이 아니었죠. 어이없고 황당해서 낙심했지만 한국으로 가기로 했어요. 마침 어머니가 거기 계시던 터라, 어머니가 몇 대학을 탐방하고 추천해주신 곳에서 하나를 정했고요. 핸드폰 기술을 배우러 한국으로 간 거죠.

― 그런데 삼성에 취직을 안 하셨네요?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귀화 신청을 한 상태에서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러갔거든요. 중국 국적인 상태에서 전형을 치렀는데, 2개월 정도 소요되는 동안 한국 국적으로 바뀌었어요. 채용 거의 마지막 단계였는데, 이 사실을 부서에 알리니 자기들은 중국인을 채용하려던 계획이었다고 하더군요. 자동 탈락됐죠.

   
▲ 박영춘 임해진 부부 ⓒ복음과상황 오지은

― 많이 좌절했겠어요.
어이없었지만 속상하진 않았어요. 사실 지원 시기에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 쪽에서 일하자는 제안이 왔고, 저도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국 사회의 속살을 제대로 맛보고 싶고 체험하려는 마음에서 한 3년 정도는 일반 회사생활을 해보고 가능하다면 돌아가려고 했어요. 회사생활에 특별한 소명이나 부르심을 느낀 건 아니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거일 수도 있죠. ‘아, 내 길이 아닌가 보다’ 마음을 확실히 접을 수 있었거든요. 회사에 다니다가 막상 3년 후 돌아갈 수 있을까 내심 의문이었어요.

― 한빛누리는 기독교 단체인데, 원래 기독교인이었나요?
한국에 와서 교회에 처음 갔어요. 대학원에 다닐 때 전경련에서 하는 한중청년포럼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아내가 다니는 나들목교회를 방문하면서 저도 처음 출석하게 되었죠. 소모임 격인 ‘가정교회’ 구성원이 되고, 멤버들이 제 또래 청년들이다 보니 모임에서 삶 나눔을 할 때 회사 과장님 부장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삼성에 이미 다니고 있는 친구도 있어서 내부 실태를 간접 경험했죠. 저는 대학원 연구실에서의 삶을 나누었고요. 그들은 회사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들으면서 ‘한국 사회 안에서 사는 것이란 정말 그렇게 힘든가’ ‘성경대로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그럼 나도 한번 살아 보자’ 하는 생각을 계속 갖게 되었죠.

― 기독교를 처음 접했는데,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게 와 닿던가요?
처음부터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았다거나, 나에게 하나님 나라 신학이 다져져서 걸음을 뗀 건 아니에요. 그건 계속해서 궁금한 부분으로 남아 있지만, 다만 삶을 나누는 과정 속에서 이들이 하나님을 오래전부터 믿었던 사람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처음엔 하나님보다는 ‘그들’을 계속 들여다보았어요. 어떤 신비한 체험은 아니었지만 내가 삶을 나눴을 때 이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나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받아주면서 내가 자유로워지고 힘을 얻는 상태였죠. 연변은 한국과는 표현 방식과 정서가 상당히 달라요. 그런데 가정교회 안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 내가 알든 모르든, 맞든 틀리든 그 안에서 나를 수용하고 잘 들어줬거든요. 그러는 사이 자신감도 얻고, 나도 건강하게 한국을 들여다보고 배울 수도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계속 위축되었을 거고, 점점 더 좁아지고 잘 배울 수도 없고 왜곡된 시선이 생겼을 거예요. 특히 내가 속한 가정교회 목자는 회사에 다니면서 스케줄이 빡빡한데도 매주 수요일 저녁을 떼어 성경공부를 함께해주고 삶을 나누었어요. 공부 내용보다도 그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는 데 감동을 받았어요. 그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더 궁금해졌죠.

― 어쨌든 통신공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네요.
사실 대학원에 다니면서부터 이미 하고 있던 일이에요. 휴가 때 가정교회 구성원들과 ‘영춘이네 집에 놀러가자’ ‘백두산으로 여행가자’ 하면서 시작된 일이, 이왕이면 의미를 더 담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면 좋지 않겠느냐는 교회 제안과 맞물려서 1기 통일비전트립이 된 거거든요. 한빛누리 민족화해팀 사업이기도 하고요. 그때가 2007년이에요. 2기, 3기를 거치면서 이미 2-3년을 비전트립을 위해 공부한 것이 쌓였어요. 고향을 다른 관점으로도 보게 되고, 더 알아가고 있었지요. 사실 연변에 살 땐 명동촌이 어떤 곳인지 몰랐어요. 점점 더 궁금한 게 많아졌고, 해볼 수 있는 것도 생기면서 제 전공과는 다르지만 두 가지 진로에 대한 생각이 다 있었죠. 저에게 일을 제안했던 분이 ‘네가 통일에 대해 꿈꾸고 생각하는 것들을 해볼 수 있다’고 한 말에 넘어간 것 같아요. 단지 좋은 회사 다니고 출세하는 것이, 지금 이후의 다음 삶까지 생각하면 결국 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 삼양 동관교회 앞에서 안내판을 해석해주고 있는 박영춘 팀장 ⓒ복음과상황 오지은

― 여정 중 연변과기대를 방문한 날은 ‘평양과기대’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했는데요.
명동촌 존재를 몰랐던 것처럼, 연변과기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한 명이 연변과기대로 진학했지만, 워낙 생소한지라 어떤 학교이고 무슨 의미로 설립됐는지는 전혀 몰랐죠. 비전트립을 꾸리면서 알게 된 거에요. 연변과기대를 통해서 평양과기대를 세우려는 총장님 꿈을 듣고 저도 같은 꿈이 생겼죠. 평양과기대라면 통일에 있어서 개성공단과 비슷한, 어쩌면 더욱 의미 있는 일인데 제 전공 분야이기도 했으니까요. 개교 전이고 공사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당시엔 중국 국적이었으니까 가기가 수월하고 제 전공과도 관련이 있어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지만 가정교회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내 삶을 놓고 고민하다 보니 소명에 꽂혔던 거 같아요.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건 사실 당연했고요.

― 왜 당연했다는 건가요?
받은 복이 많으니까요. 우리 동포사회를 바라보면요,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를 보면 한국만 복음으로 축복받은 나라예요. 그리고 자유롭고요. 한국 청년과 사회를 향해서 우리가 복 받은 나라의 사람이라고, 관계가 다 깨어져 있는 지금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건 우리라고 말하는 건 그 때문이에요. 복을 받은 데는 책임이 따르니까요. 물론 한국도 지금 녹록치 않은 상황이지만, 우리도 윗세대가 수고한 걸 물려받았잖아요. 그러면 우린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내부 사정도 만만치 않지만 그럼에도 다음 세대에 물려줄 무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북한을 들여다보면 북한에 대한 마음이 달라져요. 현 상황만 보면 서로 이야기 할 수도, 평화의 걸음을 갈 이유도 알 수 없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금 상황이 오게 된 맥락을 서로 이해할 수 있잖아요. 이해가 쌓이면 평화로 가는 길이 훨씬 수월해지지요.

― 우리 사회에는 조선족에 대한 편견도 만만치 않은데요. 남한에서 살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계속해서 공감 받지 못한다는 게 어렵죠. 그런데 사실 당연한 일이에요. 15년째 살고 있지만 계속 어려운 부분이에요. 언어에 대한 부분도 어휘, 표현 등 계속 어렵죠. 그런데 또 연변에 가면 이미 연변 말을 많이 까먹은 상태여서 말 이상하게 한다고 해요. 양쪽에서 구박받는 셈이죠.(웃음) 경계인의 어려움이라 생각해요.

― 지난 15년간 경험해온 조선족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은 그대로이던가요?
조선족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변하는 정도에 따라서 조선족에 대한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만해도 조선족 남자들은 모두 건설 현장, 여자들은 모두 식당일과 간병일을 했거든요. 지금은 사업하는 분들도 굉장히 많고, 한국회사에 취업한 사람도, 전문직 종사자들도 늘어났어요.

― 조선족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겠어요?
 백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한반도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일제 강점기와 기근이 맞물려 본토를 떠나 이주한 집단이지요. 이후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국제정세 가운데서 우리 민족이 갈라지고 멀어지고 말았고요. 조선족에 대해서 ‘중국인과 같은 짱개다’라는 시각도 있는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편 이후로 사업적으로 조선족이 한국인에게 사기를 치거나 거꾸로 한국인에게 조선족이 사기당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서로 불신이 쌓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미디어를 타면서 와전된 것들도 상당하고요.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엔 재외동포 비자도 못 받았어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도 마찬가지죠. 동포 비자가 발급되면서부터 대거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고 지금 70만 조선족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어요. 중국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도 소수민족으로서 고민이 많아요. 뿌리를 지키는 것에 대한 고민이죠. 연변엔 산업이 거의 없어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지리상 교통의 불편함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성인들은 거의 외국으로 나가고, 공동체가 계속 비어 가요. 연변조선족자치구 초대 주석이었던 주덕해 씨 같은 리더가 연변 땅을 어떻게 가꿔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텐데 쉽지 않은 일이에요.

   
▲ 주덕해 기념비 앞에서 설명중인 박영춘 팀장(왼쪽에서 두 번째) ⓒ복음과상황 오지은

― 조선족으로 태어나면 한국 국적이든 중국 국적이든 타자화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앞서 ‘경계인’이라고도 했는데요.
경계인이라는 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배우고 수용하는 기쁨이 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뿌리를 가질 수 없다는 외로움이 있어요. 다채롭지만 어느 하나에도 속할 수 없거든요. 무지개를 품고 떠도는 느낌이에요. 문화는 배우는 게 아니라 삶 자체니까요. 고향을 떠나 이주해온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계속 정체성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한이 서려요. 역사적으로 대를 이어 내려오는 거죠. 개개인이 이룬 공동체이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늘 있는데, 남과 북으로 나뉜 한반도의 상황에서 더 어정쩡한 처지가 돼요.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겠는 혼란, 어디를 향해 어떻게 한을 풀어야 할지 불분명한 서러움이 있어요. 저도 한국에 정착은 했지만 마주하는 현대 한국 사회 모습이 낯설고, 그 속에 완전히 섞일 수 없어요. 단절되어 있고, 편입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살 수밖에 없죠. 많이 외로운 게 사실이에요. 어떤 가까운 사람과도 100%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지요. 이미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이 (15년) 쌓였기 때문에, 연변으로 돌아가더라도 또 단절이 있어요. 그곳도 많이 변했고, 이곳도 나름 흘러가고 있고….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해소되지는 않는 거죠.

― 가을을 심하게 탄다고 들었어요. 그럴 때면 중국노래 반 한국노래 반 듣는다면서요?
조선족이라는 게 참 묘해요. ‘차라리 내가 한족이었다면, 한국에서 가을을 타더라도 그토록 탔을까’ 싶어요. 중국 문화도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게 아니거든요. 조선족도 민족공동체니까 조선족 고유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야 중국 문화를 접한 거죠. 충격이었어요. 한국에서 접한 ‘문화 충돌’을 대학 입학 때 이미 한 차례 겪었죠. ‘미꾸렁 안에 메구락지’라는 연변 말이 있거든요. ‘우물안 개구리’라는 뜻이에요. 대학에서 비로소 더 큰 세상을 본 거죠. 연변 공동체를 난생 처음 벗어난 경험이었어요. 언어도, 생활습관도 완전히 다른 기숙사에서 4년을 살았죠. 그리고 또 한국으로 건너 온 거예요.

― 앞서 “비전트립을 하면서부터는 고향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고도 했는데요. 이번이 11년째인데,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역사적인 맥락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제 인생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내가 연변 땅에서 태어난 의미가 무엇이고, 한국으로 온 의미는 무엇이며, 내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고민들이요. 한국에 오면 자동으로 연변 땅을 밖에서 관찰하게 되거든요. 자연히 연변에 있는 조선족을 비롯해서 내 정체성을 다시 고민하게 되지요. 그리고 회를 거듭하면서 부담이 커지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늘어간다는 게 저에게 정말 큰 변화예요. 이번 여행에서도 그렇듯 서로 묻고 답하고 대화하면서 함께 배워가잖아요. 저한텐 낯선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하나님이 이 사람 인생을 어떻게 인도해가실까 궁금함이 앞서더라고요. 단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해서 나도 하나님을 더 경험하고픈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늘 어떤 사람들이 새로 올까 궁금해하지요.

   
▲ 붉은 선만 넘으면 북한 영토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통일은요? 점점 오고 있는 것 같나요?
저는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저 통일이 되기까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더 관심이 쏠려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앞당길 수 있으니까요. 통일을 하려면 정부가, 선교단체가, 교회가 어떤 준비를 하면 좋겠는지, 또 통일이 되면 우리가 이러이러한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많이 나눠요. 저는 정책을 분석하거나 담론을 내놓는 사람이기보다는, 무얼 하면 좋은지 구체적인 걸음을 제안하고 함께하자고 꼬시는 사람이거든요.(웃음) 사실 ‘통일’이라기보다는 ‘민족화해를 위한 걸음’이죠. 통일이라고 하면 딱 하나가 되어야 할 거 같은 느낌이잖아요. 아직까진 그게 한국에서 통용되는 개념이지만, 다양성을 수용하여 풍성하게 가꾸는 면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해요. 통일해도 사실 감격에만 젖을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이 많을 텐데 말이에요.

― 분단된 한국 사회의 폐쇄성이나 획일성을 말하는 건가요?
사실 한국 사회가 비단 조선족이나 탈북민뿐 아니라 동남아나 제3세계 사람들을 배척하는 면이 있잖아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함께 살자고 호소하는데 잘 듣지 않는…. 조선족을 이해하는 것도 통일 후 북한과 함께 살게 될 때 도움이 될 텐데 말이에요. 삶이 후퇴할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겠지만, 이미 시대적인 흐름이고 잘 받아들이면 건강한 다민족 사회가 되고 더 풍성해질 수 있지 않겠어요? 국제적으로도 목소리를 더 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데, 아직까지는 ‘우리’ 민족 ‘우리’ 나라에 갇혀 있는 게 아쉬워요. 

   
▲ 통일비전트립 11기. 윤동주 묘석 앞에서 ⓒ복음과상황 오지은

― ‘민족화해의 걸음’을 위해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은요?
트라우마적 이미지로 북한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북한을 미워하는 건 결국 교육의 영향 아닐까요? 따지고 보면 한국전쟁에 조선족들도 북한군과 함께 참전했는데, 북한군 미워하는 것처럼 조선족들을 미워하진 않잖아요. 저도 한국에 오기 전에 쭉 배워온 것들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어요.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이미지요. ‘한국은 자기주장이 없다’는 생각도 그렇고요. 한국에 와서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맥락이 있어요. 다 동의하진 않아도 이해하게 됐어요.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커서 어렵겠지만, 한국 사회가 북한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시대를 거친 어른 세대도 충분히 위로하면서요. 상처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상처를 보듬어가면서 미래로 나아가야 해요. 외국에서 보면 결국 집안싸움을 반세기 넘도록 하고 있는 거잖아요. 통일비전트립으로 한국을 벗어나 연변을 보는 것처럼,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벗어나서 보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같아요. 내부에만 있으면 쳇바퀴 돌 듯 이미 고착화된 이념 싸움의 프레임에 빠지기 십상이니까요.

― 한국 사회도 많이 아파서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맞아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생각하면서 한국 사회가 더 건강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회의 여러 부조리 가운데 촛불시위도 일어나고,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그런 걸음들이 남북의 평화, 민족의 화해에 도움이 되는 큰 걸음이리라 생각해요. 시민의식이 성숙해지는 게 우리 옆의 새터민에게든, 통일 이후 북한 주민에게든 귀한 자산이 될 거 같아요.

   
▲ ⓒ복음과상황 오지은

― 마지막 질문인데, 꿈이 뭔가요?
민족화해의 화두를 붙잡고 가는 게 앞으로도 계속 제 인생의 방향이에요. 경계인으로서, 세계평화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동북아 우리 민족의 평화를 함께 보고 싶어요. 남한과 북한만이 아니라 동북아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민족의 아픔과 상처에 화해의 길을 만들고 싶어요. 한국교회가 지속적으로 손 내밀면 좋겠어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북한과 직접 소통할 수는 없잖아요.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을 들여다보고 교제하다 보면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만나서 밥도 먹고 같이 놀면서 접촉을 자꾸 만들어야죠. 여전히 우리 동포들이 〈아리랑〉 노래 하나로 눈물바다가 되는 광경을 봤어요. 여러 이유로 사람들 감정이 현재 메말라 있거나 수면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갇힌 사회에 속고 있는 거지요. 하나님의 모습은 선함과 평화로움이 가득하잖아요. 조금만 조율하면 우리 본 모습이 드러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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