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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여공’들의 존재, 그들의 서사
[324호 3인 3책] 《여공문학》 / 루스 배러클러프 지음 / 김원·노지승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 2017년
[324호] 2017년 10월 27일 (금) 15:58:28 오수경 〈청어람M〉 편집장 goscon@goscon.co.kr
   
 

지난 10월 초 1960-1970년대 서독으로 떠난 여성 간호사들(파독 간호사) 이야기를 다룬 전시회에 다녀왔다. “서구 선진 국가에서의 경험과 색다른 문화에 대한 동경”이 용기가 되어 독일로 건너간 그들은 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가 1973년 국제 기름 파동 여파로 서독에 파견된 비유럽 출신 노동자들의 취업이 금지되자 “우리는 우리가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겠다”며 체류 연장을 위해 저항하기도 하고, 동일방직과 YH사건 등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하기도 한다.

그들의 삶을 통과하여 내 눈 앞에 당도한 이 강렬한 기록은,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희생자로만 납작하게 인식되던 ‘파독 간호사’를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도록 인도했다. 전시회는 뜻밖에도 나에게 역사나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알려주었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성은 과대 재현되고, 여성의 존재는 소멸”시켜 재현하는 사회에서 다른 관점의 서사를 접한다는 건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한 전시나 책은 그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며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매개다. 《여공문학》은 그중에서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매개다. 이 책은 ‘여공’ 혹은 ‘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대상화되던 여성들을 소환하여 우리 문화 속에서 여공이 지금까지 어떤 이미지로 그려졌으며 그 의미와 맥락은 무엇인지 밝혀내 그들의 삶에 다른 생기(관점)를 불어넣는다. 그 여공은 당대 지식 사회의 눈에 비친 타자지만, 전태일의 동료거나 우리 어머니일 수 있고, 사회 민주화를 이룬 또 다른 주체일 수 있다.

냉전 시기 마지막 여름인 1989년 8월, 호주의 대학생 루스 배러클러프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KSCF)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부천의 ‘십대 여공’과 만난다. 자기 또래인 그 여공들의 문학적 열정에 매료된 그는 한국의 여공들이 쓴 수기와 소설을 접하며 한국 문학이 재현하는 여공에 관해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학위 논문을 대중서로 구성한 책이 바로 《여공문학》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여공의 이야기’이기도 한 ‘계보학’이다. 저자는 여공이라는 단어가 처음 신문에 등장한 1919년에서부터 우리 사회에서 여공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강경애나 프로문학 등이 활약한 1920-1930년대와 노동운동이 폭발하던 1970-1980년대에 타자 혹은 당사자의 서사로서 ‘여공문학’이 어떻게 존재했는지 살펴보고, 1990년대에 등장한 “여공문학 최후의 걸작”인 신경숙의 《외딴방》을 분석한다.

‘푸른 눈’의 관찰자이자, 여공들의 친구였던 저자가 재현한 여공은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그들과는 다르다. (성)폭력 앞에 노출되거나, 가난에 찌든 상태로 힘겹게 살아가는 여성으로 반복 재현되기도 했지만 “야심이 있었고 독학한 러시아어로 러시아 대가들의 책을 읽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은 열망을 가진 존재였다. 이런 관점의 간극 사이에 이 책은 존재한다. 이 간극은 무엇으로 비롯되었을까?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남성은 과대 재현되고, 여성의 존재는 소멸”되는 서사를 주로 반복하기에 발생하는 오차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간극을 끌어당겨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가 더 드러내야 하는 건 소멸되었던 존재, 그들의 서사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다시 책을 펼친다.


오수경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글쓰기 울렁증이 있고, 책을 많이 사지만 읽지는 않고,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부끄럼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수다스럽고,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다. 사훈이 ‘노는게 젤 좋아’인 청어람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며 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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