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호 3인 3책]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지음 / 난다 펴냄 / 2017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 사이’이고, ‘마르게 흐린 날씨’를 가장 좋아한다. 종합하면 ‘11월 흐린 어느 날 오후 3시쯤 날씨’ 정도일까. 흐리되 물기는 없어야 하고, 서늘하되 춥지도 않아야 한다. 1년에 그런 날이 얼마나 될까. 있긴 한 건가. 하필 그렇게 희귀한 날들을 좋아하는 나는, 11월과 12월을 쉽게 보낼 수도, 차마 붙들 수도 없어 하루하루 애틋하게 살아낸다.

그렇게 흘러가는 계절이 아까워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담양과 순천에서 하루씩 머물렀다. 알록달록한 가을에 물든 남도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풍경을 시시때때로 보여주었다. 우린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가을빛으로 물든 벤치에 앉아 근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 삼아 책을 낭독하기도 했다. 시인 박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아무 쪽이나 펼쳐 ‘마르게 흐린’ 허공에 대고 또박또박 읽었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서늘하되, 춥지도 않은’ 공기가 가슴으로 훅훅 달려들어왔다. 그럭저럭 행복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를 쓰다듬고 아름다운 문장이 졸졸졸 흐르는 그 시간과 풍경을 저장해두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글을 쓰는 게 아닐까? 붙들 수 없는 소중한 시간과 풍경을 문장으로라도 잡아두려고. 박준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이 책엔 유독 장소 혹은 시간에 관한 기록이 많다. 그중 여러 편은 ‘그해 ◯◯’라는 제목을 달았다. 인천, 경주, 여수, 협재, 혜화동, 행신, 삼척, 연화리… 이 장소들은 단지 행정구역상의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그해’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기도, 어느 찰나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 안엔 무심하지만 다정한 연민이 있다.

글이란 신비로워서 그 한 사람의 기억을 함께 ‘겪게’ 만든다. 그의 세계는 나의 세계로 이어지고, 나는 박준이 남긴 ‘그해’ 기록을 따라가며 나의 ‘그해’를 생각해본다. 그가 앓은 어느 해 환절기를 읽으며 내가 앓았던 지독한 환절기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가 우정을 나눈 40년 연상의 ‘소설가 김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정처 없어 하던 그때 그가 들었던 산울림의 〈안녕〉을 나도 들으며 그가 차마 흘리지 못했을 눈물을 대신 흘린다. ‘그해 여름 남도의 어느 소읍’에서 그가 만났던 이름 모를 이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내가 만났던 비슷한 이미지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가 남긴 시간과 풍경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런 그 무엇이 느슨하지만 성실하게 담겨 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그가 펴낸 시집 제목처럼 이 책은 나에게 약이 되었다. 그의 글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올해 가을을 꽤 건조하고 외롭게 앓으며 보냈을 터였다. 그래서 이 책을 ‘당신의 이름’이라는 약처럼 옆에 두고 틈틈이 아무 구절이나 펼쳐 ‘복용’하고 있다. 언젠가 지금을 ‘그해 ◯◯’으로 기억할 날이 온다면 이 책처럼 무심하지만 다정한 연민이 담겨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계절도 저물어 간다. 곧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한없이 우울해 할 12월을 맞이한다. 속절없이 흘려보내야 하는 시절이 아까워 슬픈 12월 어느 날, 그래도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곳에 앉아 읽을 문장을 찾아놓으니 2018년을 그럭저럭 잘 맞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수경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글쓰기 울렁증이 있고, 책을 많이 사지만 읽지는 않고,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부끄럼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수다스럽고, 나이 먹다 체한 30대, 비혼, 여성이다. 사훈이 ‘노는게 젤 좋아’인 청어람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며 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공저)이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