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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죄’를 마주보다
[325호 그들이 사는 세상] 죄와 회개의 문제 그려낸 영화 <로마서 8:37> 신연식 감독
[325호] 2017년 11월 28일 (화) 17:57:56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 "그렇게 연결되어 있기에 교회는 서로 중보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의 문제라면 중보를 왜 하겠는가? 죄도 회복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영화 <로마서 8:37> 언론시사회가 지난 10월 30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렸다. 영화는 ‘죄’와 회개의 문제를 다룬다. 교회 파벌 싸움에서 두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교인들, 범죄를 저지르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목사, 목사의 죄를 직면하고 각각 다른 ‘신앙’의 태도를 보이는 교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영화 상영 후 ‘Q&A’ 시간에 영화평론가 황진미 씨는 자신을 비기독교인이라고 밝히며 “‘죄 없는 사람’이 왜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신연식 감독은 기독교 공동체 맥락에서의 죄와 회개, 그리고 중보기도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 질문에 답했다. 며칠 뒤 신연식 감독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청했다. 신 감독은 영화 <프랑스 영화처럼>의 연출과, <동주>의 제작 및 각본을 맡은 바 있다. 이달 16일 개봉을 앞두고, 영화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더 들어보았다.

― 시사회를 본 주변 반응은 어떤가?
영화를 본 대형교회 장로님들이 호평을 하시더라. 오히려 중도파 성향의 목사님들을 초청한 상영회에서는 의외의 반응이 나와서 좀 놀랐다. 영화에서 직접적인 잘못이 없는 주인공 기섭이 회개 기도를 드리는 대목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거였다. 비기독교인들에게서 나오리라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미리 준비한 답변이 있었다.

― 시사회 때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다. 어떤 답변을 준비했나?
기독교에서 죄는 단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지 않은가.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죄인데, 우리가 죄를 생각할 때 죄를 단지 행위로 국한하는 오류를 가장 많이 범하는 거 같다. 죄가 단지 행위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왜 행위로 다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겠는가. 모두 알다시피, 죄는 한 사람으로 인해 들어왔다. 아담은 선과 악을 스스로 구분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가치 판단을 내가 하고, 세상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비기독교인에게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 죄가 아니지만,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분명 죄다. 본성이자 죄성. 애초에 창조주와 피조물이 올바른 관계에 있었다가,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고 싶었던 욕망을 드러내면서 관계가 훼손됐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버린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어려운 지점이, 신앙이란 바로 그 욕망,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창조주는 그러나 피조물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 승리’를 획득하셨고,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다.

   
 

― 영화 속 등장인물은 죄를 회개하는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로 나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질문한 것처럼 피해자 지민과, 그를 도운 기섭은 회개를 한다.
기섭이 싸움을 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의를 위해서였을까? 혹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사실은 스스로도 모른다. 기섭은 싸움에 지면서 미처 마주하지 않았던 자기 안의 욕망을 비로소 돌아본다. 기섭의 회개는 자신도 어떤 욕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음을 성찰하면서,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되돌아보고,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회개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민 역시 그동안은 마주하지 않았던 자기 안의 욕망을 돌아보는 인물이다. 누구나 그렇듯, 영화 인물들도 모두 죄성으로 인한 약점이 있는 존재다. 회개의 시작은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존재’임을 마주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시작점에 선다. 기독교에서 은혜라는 건,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때 이 은혜가 특권으로 왜곡되고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 "나는 스스로 신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3대째 모태신앙인인 뻔한 기독교인일 뿐인 내가, 직업이 영화감독이라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도 될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영화의 중심 사건이 어느 유명 목사의 성범죄 사건과 상당히 겹치는데, 영화 제목에서도 감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소재만 놓고 보면 굉장히 상업적인 소재다. 나는 사회적인 공분을 일으키는 부패 이야기를 마케팅에 활용할 때의 생리를 알고 있다. 이 영화를 상업적인 방식으로 광고할 수는 없었다. 사전에 여러 관계자들을 만나고 취재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서 개인적으로 충격이 컸다. 5년간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나는 스스로 신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3대째 모태신앙인인 뻔한 기독교인일 뿐인 내가, 직업이 영화감독이라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도 될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 취재하면서 느낀 것들이 궁금하다.
많은 목사님과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공교롭게도 아주 강한 확신에 찬 목사님들이 줄곧 취재의 대상이 됐다. 그런 분들이 보통 청년들에게 너무도 명쾌한 ‘비전’을 제시한다. 청년들은 그의 자신감에 이끌려 따른다. 연약한 사람을 더욱 연약하게 만들어 양육과 계도의 대상으로 삼는 거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은 점점 약해지고 ‘조직’만 강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았다. 한국교회에서 터지는 부조리한 사건들은 결코 일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면?
아주 구조적인 문제다. 목사님을 두고 교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영적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도 잘 들여다보면 섬뜩한 표현이다. 절대 기독교적이지 않다. 한국 사회 한국교회는 강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선호하고, 그런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이 마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런데, 신앙이란 무엇인가? 열매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도가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그렇게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 아닌가? 한국교회는 공동체 안에서 부조리가 발생하면 성도들의 입부터 막고 본다. 성취와 조직을 추구하다 보니 한 개인보다 교회 조직이 더 소중해져서 그런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 핑계를 댄다. 이는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끔찍한 죄악이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신 분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논리는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다.

― ‘대’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교회 언어가 ‘사명’ 아닐까 싶다. 극중 목사 요섭의 핑계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사명이라는 단어는 ‘나는 특별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언어다. 우리는 절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앞서 말한 은혜다. 어떤 인간이 백만 번 잘나봤자 그까짓 인간이고,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영화일 뿐이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소명에 따라서 살아갈 뿐이라는 거다. 눈을 치우는 일을 할 때 누군가는 빗자루로 눈을 쓸지만 누군가는 제설차를 사용하는 것처럼, 저마다 다르게 충성하면 되는 것 아닌가. 뭔가 특별해지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죄성이라고 생각한다.

― 앞서 일부의 일탈을 언급했다. 특별히 사회적 문제가 되는 교회들은 ‘남의 교회 일에 웬 참견이냐’는 방어적 태도를 자주 취하고, 또 다른 부류의 교회는 ‘교회가 다 나쁜 게 아니라 특정 교회가 나쁘다’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인해 복음이 성취되었다. 기독교에서 교회를 지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 아니던가? 몸 일부가 다쳤을 때 몸의 다른 부분들은 안 아픈가? 부분적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상처를 덮으면 결국 죽는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한 사람의 죄가 유기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이 보인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에 접붙임된 가지이고, 형제의 죄가 내 죄이기도 한 것이다. 기독교적인 원리가 이것 아닌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기에 교회는 서로 중보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의 문제라면 중보를 왜 하겠는가? 죄도 회복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

   
▲ "이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나에게 두려운 일이다. 죄라는 주제가 내가 다루기에 너무 큰 주제여서 계속 조심스럽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교회에서 환영받을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비기독교인이 쉽게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주제다. 흥행이 쉽지 않아 보이는데….
흥행을 고려한 작품은 아니다. 영화 <동주>로 그간의 빚을 갚고, 딱 이 영화를 만들 정도가 남아서 찍었다. 어찌 보면 비기독교인들이 교회에 질문을 던지지만 교회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왔다. ‘될까 안 될까’보다는, 이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나에게 두려운 일이다. 죄라는 주제가 내가 다루기에 너무 큰 주제여서 계속 조심스럽다.

― 사건의 중심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영화에 나온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영화로 예를 들면, 감독이 되고 싶다면서 단지 그게 전부인 사람이 있다. ‘영화를 왜 하고 싶은지’가 없다. 왜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면 길을 낸다. 기술이나 뛰어난 직업은 비전이 아니다. 기술은 비전에 따라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

   
 

스>에서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발차기 하는 장면이 굉장한 기술이라고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사물을 카메라 350개의 중심에 놓고, 셔터를 동시에 눌러서 만든 장면이다. 사실상 고되고 ‘생무식’한 작업이다! 그 작업을 실행했으니까 하이테크 평가를 받은 거다. 셔터 350개를 눌러야 하는 비전을 가진 사람은 그 짓을 하고 만다. 비전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욕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하지, 잘 나가는 감독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소위 성공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다면 그건 비전이 아니라 천박한 욕망일 뿐이다. 그동안 교회는 100%의 청년들한테 계속 1%의 소금이 되라고 말해왔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게 안내하는 게 좋은 교육이 아닐까.

― 그럼 감독님은 왜 영화를 하는 건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세상, 사회, 인생이라는 게 ‘사실은 그런 게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하고 싶어서. 내 영화의 엔딩에는 늘 그 함의가 있다. 물론 돈은 잘 못 번다. 돈 되는 일만 하면 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보니 잘 쉬지도 못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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