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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용기, 용감한 사유
[327호 최은의 시네마 플러스] <한나 아렌트>(2012)
[327호] 2018년 02월 01일 (목) 14:34:44 최은 영화평론가. 필름포스 공동대표 goscon@goscon.co.kr
   
   
 

1961년 예루살렘과 할리우드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아이히만 쇼〉(2015)는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판이 TV로 생중계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제3제국 당시 유대인 추방과 수송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오랜 도피 생활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납치,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요. 밀튼 프루트만이 기획하고 레오 허위츠가 연출한 당시의 재판 영상은 TV 최초의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 한나 아렌트가 있었습니다.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유명한 정치철학자 아렌트는 프랑스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탈출해 망명한 생존자이기도 합니다. 아렌트는 법정 기자실에서 허위츠의 생중계 영상을 지켜보며 아이히만 재판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했답니다. 〈뉴요커〉에 5회로 나누어 실린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라는 명저로 남았지요. 마가레테 폰 트로타의 영화 〈한나 아렌트〉(2012)는 이 시기 아렌트에 주목했어요.

이 재판을 허위츠가 영상으로 기록하고 아렌트가 글로 썼던 그해 전범 재판과 관련한 또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1948년 전후 독일을 배경으로 한 〈뉘른베르크의 재판〉(1961)입니다. 스펜서 트레이시, 버트 랭커스터, 마를렌 디트리히 등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이 영화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사법재판에서 99명의 전범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61년 현재 복역 중인 인물은 아무도 없다는 정보를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감합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채 진행 중이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할리우드식 코멘트(개입)였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대중 영화가 현재에 발 딛고 역사를 들춰내는 방식이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습니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체포되어 1심과 항소심을 거친 후 1962년 5월 29일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고 이틀 만인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을 당합니다. 

텔레비전 시대 악의 ‘얼굴’
흥미롭게도 〈아이히만 쇼〉에서 허위츠가 아이히만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은 〈한나 아렌트〉의 관찰 기록과 매우 유사합니다. 두 영화 모두 아이히만이 등장하는 재판 장면에는 허위츠가 만든 흑백의 오리지널 기록 영상을 사용했는데요. 112명의 유대인 생존자와 가족들이 최초로 전 세계 앞에서 증언하게 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지만 허위츠는 아이히만의 얼굴을 담는 일에 유독 집중했다고 〈아이히만 쇼〉는 말합니다.

〈한나 아렌트〉에서 한나(바바라 수코바)는 재판을 받는 아이히만(아돌프 아이히만)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를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알린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 따르면 “전체주의의 최종단계에서 어떤 인간적인 것도 없는 근원적 본성을 지닌 절대적인 악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절대적인 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천박하고 무능력하고 무력해서 평범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그에게 차마 근원적인 악의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었어요. 단지 그는 사유하기를 포기한 한 인간,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 인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나는 어떻게 아이히만의 얼굴을 그처럼 집요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요? 한나 아렌트가 사유했던 그 얼굴은 허위츠가 만든 영상, 즉 미디어를 통해 제공된 것이었어요. 허위츠와 프루트만 덕분에 전 세계인들이 안방에서 목격한 얼굴이기도 했고요. 그 얼굴은 잔혹하고 처참한 기억을 진술하다가 실신까지 하는 생존자의 풀 쇼트와는 대조적으로 무표정한 클로즈업으로 일관됩니다. 구차하고 평범하기 그지없게도, 그는 심지어 코감기를 앓고 있었어요. 휴지를 든 손으로 코를 비틀어 푸는 표정이 주는 일상적인 섬뜩함을 한나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용기
영화에 직접 담긴 장면은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는 보고서의 마지막장에 마침표를 찍듯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을 써 넣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조차 스스로의 말을 찾는 대신 장례식 연설의 상투적 문장을 선택한 아이히만의 사유불능성에 치를 떨었다지요.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후 한나 아렌트의 삶 자체가 이 ‘사유불능성’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그 투쟁이 참 용감했고 그래서 외로웠다고 말입니다.

영화에서는 한나가 유대인 사회에서 받는 비난과 동료들과의 갈등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합니다. 아이히만과 나치를 옹호한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히틀러 집권 초기 유대인 지도자들(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강제 이주정책을 도왔던 부분을 기술한 것에 대한 반박과 비난이 한나에게 큰 위협이 되었어요. 거기에 나치에 동조했던 철학자 하이데거의 수제자였고 한때 그와 연인이었으며, 시온주의자들을 도왔던 전력이 모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한나는 결국 같은 언어(독일어)를 쓰는 친구들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던 말 ‘용감한 한나’는 이제 ‘냉혈한 한나’가 되었습니다. 철학자 한나에게 존재처럼 당연했던 사유가 이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요.

영화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나는 남편 하인리히(악셀 밀베르크)에게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던 자신의 오류가 있다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악은 평범하면서 동시에 근원적일 수 없어. 악은 늘 극단적일 뿐 근본적이지 않아. 깊고도 근본적인 건 언제나 선뿐이야.” 하인리히가 묻지요. “이걸 다 알았더라도 당신, 재판에 대해 썼을 것 같아?” “응. 참된 친구를 알아야 했으니까.”

소파에 길게 누워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한나의 처음과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오랜 벗으로부터 그토록 매몰차게 돌아선 아렌트의 친구들과 동료 유대인들도 사유하기를 거부한 개인을 자처한 것은 아닌지, 가만히 묻게 됩니다. 영화에 언급된 하이데거의 가르침대로라면 사유는 처세술이 아니고, 세상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도, 직접적인 행위를 유발할 수도 없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펄펄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유하는 ‘한나’들이 벗이 되어 세상의 난제들에 정직하게 맞설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 견딜 만해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홀로 선(혹은 힘없이 드러누운) 그 자리에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최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고(영화예술학 박사), 중앙대와 청어람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했다. 영화 연구자로 대중영화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한 책을 집필하면서, 부르심에 따라 비정규직 말쟁이 글쟁이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와 사회》(공저),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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