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 제임스 스미스 지음 / 박세혁 옮김 / IVP 펴냄 / 2018년

이전에 쓴 것처럼 나는 중학교 때 ‘열혈’ 기독 학생이었다. 내 종교적 성향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알려졌는지, 어느 날 사회 선생님이 내게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들이 우상숭배 한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인들은 겸손한 사람들이야. 아무것도 아닌 돌 앞에서도 자신을 낮출 줄 알잖아?”라고 말했다.

몸의 행위와 마음의 태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직관은 그때의 나에겐 낯설었다. 내게 기독교는 완벽하고 반박당할 수 없는 논리 체계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니까. 내가 배운 기독교에서 ‘몸의 행동’과 ‘구원’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풍성한 지식과 잘 짜인 논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매일 같이 터져 나오는 ‘미투’의 목소리에서도 확인한다. 약자 편에 서야 한다고,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던 이들이 자기와 가장 가까운 약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밝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생각 체계와 행동 체계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눈길을 끌었던 제임스 스미스는 후속작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에서 이해와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근대의 ‘주지주의’적 기독교가 기독교적 실천을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했으나, 삶을 통해 구현된 것은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였다. 그 원인은 인간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느낌과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이 힘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논리가 아닌 사랑과 갈망, 즉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상태, 신학적 표현으로는 ‘왕국’이며, 그 왕국에 대한 감각은 몸을 통한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 그리고 상상력은 그 왕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 작동한다.

‘미투’ 상황이 남성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상상력을 돌아보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동료인 여성을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보는 ‘상상력’은 평등에 대한 어떤 이상보다도 한국 남성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그렇다면 이들은 변화될 수 있는가? 스미스는 새로운 관계 방식인 예배를 통해 ‘왕국’에 대한 새로운 비전에 이끌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상상력을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예배는 교단을 넘어서는 공통적 구조-모임, 고백, 듣기, 순종, 사귐, 보냄-를 갖고 있다. 이 구조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적 상상력을 몸에 새긴다. 그렇다면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삶에 대한 상상력을 형성할 정도로 충분히 의도적인가? 그러니까, 예배의 미시적 구조들, 순서와 상호작용의 방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전망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기분을 재조정하고, 따라서 다른 부르심에 의한 끌림을 느끼고자 한다면,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독교적 상상력이다 … 우리의 상상력이 모든 피조물을 회복시키고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에 사로잡혀야 … 한다. (269쪽)

*번역자는 ‘인지’라는 단어를 의식적 측면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했는데, 마크 존슨을 비롯한 ‘2세대’ 인지과학 이론가들은 이 단어를 무의식적 과정을 다룰 때 사용한다. 책 전체에서 두 용례가 혼재됐지만, 맥락을 파악하며 읽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정훈
대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공부하던 중 공부에 재능 없음을 느끼고 기독교 시민단체에 취직한 후 자신이 일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을 만들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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