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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긴 승리: 고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
[332호 신학자의 말] 바울 신학을 통해 고난을 성찰한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
[332호] 2018년 06월 26일 (화) 15:04:13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 미로슬라브 볼프 미국 예일대 석좌교수 ⓒ복음과상황 이범진

미로슬라브 볼프 미국 예일대 석좌교수(예일대 신앙과문화연구소장)가 지난 5월 29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열린 제11차 국제실천신학심포지엄(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주최)에 초청돼 ‘고난의 기억, 희망의 축제’를 주제로 강의했다. (김선영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번역 및 통역) 이날 볼프 교수는 고난에 대한 바울 신학의 요소를 다룬 자신의 논문 중 1부를 발표했다. 그는 바울의 고난 신학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고, 바울서신과 욥기에 나타난 고난의 이해를 비교했다.

1. 하나님에 대한 숙고-하나님의 행위
볼프 교수는 바울의 ‘고난 신학’을 다루면서, 그 전제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고난 자체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 바울은 고난 자체의 원인을 하나님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신정론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부터 이미 팽배한 다양한 고난을 하나님, 그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롬 8:35; 37) 바울의 이런 접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가 사랑이라는 주장을 의심하는 것과는 다른 접근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효화한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고난을 이기는 승리의 원천이다.

바울의 이런 고난 신학은 하나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은 중요하게도 하나님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위에 입각해 고난의 정복을 주장했다. 바울의 요점은 “고난은 정의로우신, 또는 주된 속성이 사랑이신 전능한 신(deity)에게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가 아니다. 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고난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스럽게 죽을 정도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2. 피할 수 없는 고난
볼프 교수는 고난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일종의 환상에 대해 “고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추정은 인류학적 오류”라고 지적한다. “세속적 유토피아 신앙(A secular utopian faith)”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메시야 기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기대가 현대사회에서도 희망으로 남아 있는 것이며, 현대 기술력과 인류학적 낙관주의와 결합한 결과다. “지식과 선함, 고통이 없는 행복한 세계를 향해 나가는 인류의 비전이다.” 그는 고난을 제거하는 것이 인류가 계속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긍정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특히 상처를 줄이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개선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우리가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좀 더 겸손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난을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 할수록, 고난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우리의 자원은 더 고갈될 공산이 커지기 때문이다.

볼프 교수에 따르면 죄의 영향 하에 있는 세상에서 죄를 범하는 인간은 그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세상에서 고난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고난이 세상에서 삶의 일부다. 그는 바울의 고난 신학을 설명하면서 “탄생과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고난도 그렇다. 산다는 것은 고난받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창조와 우리 삶의 선함이 모든 악에 우선하며 더 근본적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물론 바울 역시 자기 육체의 가시를 놓고 제거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고, 바울의 회중이 겪을 숱한 고통을 견디지 못할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볼프 교수는 바울이 “크건 작건, 벗어났든 계속되든, 고난은 인간, 특히 그리스도인 됨이 요구하는 조건의 일부”로 고난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고한 자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바울은 그에 대한 분노를 온당하게 여겼음에도 그 자신은 격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가 이미 고통의 가해자 경험이 있었으며 그러한 고난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아울러 바울이 살았던 세상의 한계도 감안해야 한다. “바울은 권력자들이 폭행을 가하지 못하도록 무고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해줄 질서체계를 도입하기에는 자신과 자신이 섬겼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너무 주변적이고 미미했던 세상에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 탄식하는 자들에게 공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탄식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공감과 도움이다. 이것 역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 후 강력히 권고하는 바다. 그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롬 12:14-15).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도울 수 있는 자를 도와야 한다.

   
▲ 볼프 교수에 따르면 바울은 욥에게서 ‘이해하지 못함’의 침묵을 배웠다. 이는 바울이 욥기의 구절을 인용하며 ‘세상의 도식’과 ‘하나님의 도식’의 부조화를 설명할 때 두드러진다. 권선징악적인 도덕 법칙으로도 하나님을 가둘 수 없다. ⓒ김혜미

3. 산산이 부서진 세상의 도덕적 일치
볼프 교수에 따르면 바울은 소위 ‘권선징악’이라는 세상의 도덕 질서에 대해서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국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심판이라는 것은 “미래 시제로 쓰였다.”

최후 심판의 날에 도덕적 질서는 다시 세워질 것이다. 이것이 최후 심판의 날이 갖고 있는 의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라는 좀 더 기본적인 틀 안에서 다시 세워지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최후 심판의 날 이전에 의인이 고난을 면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이 바울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에 쓰였을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들의 기대(심판에 날 전에 의인이 고난을 면할 것이란 기대)를 바로잡는 것은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관점이다. 특히 볼프 교수는 이런 바울의 관점을 욥기에 주로 나타나는 고난의 관점들과 비교 대조한다.

욥기의 주된 주장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가해한 이유로 의로운 자들이 때때로 고난을 당한다. 바울은 욥에게 동의했다. 하지만 욥을 넘어서 나아갔다. 신약 성경의 나머지 저자들(예를 들어 … 딤후 3:12; 벧전 3:8-17)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의로운 자들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의롭기 때문에 빈번히 고난을 당한다고 확신했다.

바울의 이런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죽을 정도로 극심히 박해당한 사실, 그 자신도 박해를 가했던 사실에 근거한다.

볼프 교수는 또한 고난의 필연성을 설명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각기 다른 충돌로 인한 것인데, 그중 한 가지는 (바울도 경험했던 것처럼) 죄의 영향 속에 있는 인간 개인과 공동체 안의 균열의 틈에 죄가 스며들어 개인과 공동체 안에 도덕적 긴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도덕적 긴장이 중첩적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도덕 질서를 통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한 가지 질서를 배타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질서가 서로 충돌하고, 고난을 초래한다.

한 집단의 의(오늘날의 용어로, 동성애자들을 위한 동등한 권리,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머리 덮기, 백인 우월주의, 경제 규제 완화)가 다른 집단에서는 불의(방탕, 여성 억압, 유색인종에 대한 모욕, 착취 허용)다.

세상에 도덕적 일치란 없는데, 이것이 “고난에 일조하고,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아야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4. 정당화, 불평, 그리고 ‘이해하지 못함’의 침묵
볼프 교수는 4장에서, 앞서 언급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무고한 자들의 겪는 고난에 대한 바울의 접근을 본격적으로 설명한다. 바로 침묵이다. 이것은 우선 욥기에 등장하는 욥이 겪는 무고한 고난에 대한 욥의 아내와 욥의 “위로자들”이 취하는 세 가지 접근-“(1)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 (또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 (2)잘못된 행위를 했다고 고난받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 그리고 (3)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에 이어 네 번째로 등장하는 욥의 접근법이며, ‘이해하지 못함’의 표현이다.

욥의 침묵은, 우주 기초에 놓여 있으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마음대로 변덕스럽게 가하는 정말 엄청난 힘 앞에서 소리를 죽인 공포의 침묵이 아니었다. 비록 이것도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제시를 해석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욥의 침묵은 세상의 현실 전체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의 세계와의 관계 앞에서의 자기 인식적인 ‘이해하지 못함’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낫다. 이것이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바다.

볼프 교수에 따르면 바울은 욥에게서 ‘이해하지 못함’의 침묵을 배웠다. 이는 바울이 욥기의 구절을 인용하며 ‘세상의 도식’과 ‘하나님의 도식’의 부조화를 설명할 때 두드러진다. 권선징악적인 도덕 법칙으로도 하나님을 가둘 수 없다.

바울은 이 구절(욥 5:13–편집자)을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지혜-바울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는 세상에 어리석게 보인다(고전 1:18-25)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한다. “세상의 도식”과 “그리스도의 도식”의 부조화, 그리고 “세상의 도식” 안에서의 지혜와 능력과 “그리스도의 도식” 안에서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두 도식의 부조화에 상응하는 대조는 바울 신학 전체의 핵심이다. 참된 지혜와 올바른 능력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고난에서 찾아야만 한다. 이 관점은 고난받는 자들은 무고할 수 없다고 선포하거나 또는 무고한 자가 고난받을 때 불평함으로써 하나님을 주어진 도덕적 틀에 꽉 묶어버리는 자세를 약화시킬 것이다.

또한 볼프 교수에 따르면 바울이 무고한 고난에 침묵으로 접근하는 것은 히브리서에서 여러 번 언급한, 이사야의 서술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은 이사야가 ‘고난받는 종’이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예수에 해당한다고 믿었는데,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롬 1:3-4).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및 정말로 무고한 유일한 인간에 대한 표현이었다.” 바울은 무고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받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화신”이었고, “이 사랑이 고난을 이기는 승리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바울이 당시에 살면서 “가장 주목했던 고난의 종류는 박해였다.” 박해자였던 바울이었기에 그의 입장이 사도가 된 후에는 “박해를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롬 8:8:17; 고후 4:10-12). 이러한 고난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5. 고난을 이긴 승리
볼프 교수는 5장에서 바울의 고난 신학의 이해를 더욱 확장한다. 바울에게 있어 고난은 결국에는 소망이 된다. 고난은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종국에 그렇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다고) 결코, (유익하므로) 고난을 자초하거나 혹은 고난을 감수하는 수동적인 삶을 사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바울은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고난을 덜어주려고 열심을 다해 노력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이방인 교회에서 기금을 모으는 데 수년 동안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롬 15:26; 갈 2:10) 고난의 원인이 질병이든 박해든 기갈이든 집이 없음이든 상관없이 바울은 그의 교회들에게 고난을 경감하도록 가르쳤다.

볼프 교수는 바울에게 신정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최소한 우리는 고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변호하며 고난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풍기는 악취를 맡을 수 있다. … 신정론은 고난을 실제로 해결하지 않아도 되면서 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앞서 이야기했던, 욥이 보여준 무고한 고난에 대한 네 번째 접근법인 ‘이해하지 못함’의 침묵의 유익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해하지 못함’의 침묵은 … 엄청나게 큰 고난을 진지하게 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함’의 침묵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최소한 종말 이전의 이 세상)에 대해 가질 수 있을 가능한 모든 지식의 범위에 적합하기에,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더 정직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고난은 설명이 아닌 극복을 요한다는 점이다.

이 극복은 “성경 안에서 고난과 싸우는 전형적 방식”인 출애굽 사건에 면밀히 나타나는데, 바울의 신정론과 무관한 고난 신학의 접근이 바로 그 “출애굽 전통에 확고히 서 있다.”

출애굽 이야기는 잔혹한 탄압, 집단 학살 시도, 그리고 억압받는 자들의 탄식과 함께 시작한다. 출애굽기 본문을 보면 어느 곳에도, 왜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막기 위해서도, 그 고통이 극도에 다다르기 전에 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는지를 설명하려는 낌새조차 없다. …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을 때(출 2:23) 하나님은 “너희가 고난을 당해야 마땅하다, 회개하고 처벌을 받을지어다!”라고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 고난으로부터 선한 것이 나올 테니 꾹 참고 견딜지어다!”라고 응답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의 응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고 … 그들을 애굽 사람들에게서 구해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이끌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기 위해 내려갔노라”(출 3:7-8).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설명이 아닌 해방이었다. 이것은 욥기도 마찬가지다.

볼프 교수에 따르면 예수의 처형이야말로 바울에게는 무고한 고난이 풀이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지니는 의미가 있으며, “설명보다는 극복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바울은 신정론에 관해 단정할 수 없는 문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바울이 고난을 의미 있게 생각하지만, 고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바울은 여전히 ‘알지 못함’을 안고 있다. 고난받는 자들이 “억눌린 채 아직 있지 않은 자유와 영광”을 갈망하고 탄식하는 기도를 하지만, 어떻게 갈망하고 어떻게 탄식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채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기도를 언급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에 반대하여 기도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종종 우리가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는 하지만 말이다(롬 8:26). 물론 우리는 종종 우리가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는 하지만 말이다(롬 8:26).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탄원하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기록하고 있다(롬 8:26-27). … 성령은 이 모든 ‘알지 못함’을 취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27절) 우리를 위해 탄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아심’과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만든다.

볼프 교수는 이 성령의 탄식을 말하면서, “하나님과 탄식 간의 관계는 출애굽 이야기 첫 부분보다 로마서에서 더 밀접하게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출애굽의 시작에 나타나는 탄식은 인간의 탄식을 하나님이 듣고 구원의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로마서에는 탄식이 이미 구원의 움직임 안에 있다.” 이미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탄식하고 갈망하면서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탄식이다.
성령의 탄식은 바울의 고난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다. 앞서 이야기한 예수의 무고한 죽음과 부활도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고난을 정복하는 데 세 번째이자 마지막 요소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영광 가운데 오시는 그리스도이다. 이 파루시아까지는 시차가 있고,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간이 바로 아직 오지 않은 파루시아를 소망하는 때다. 그리고 바울은 이 소망의 때에도 파루시아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장을 펼쳐가는 한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8:24)라고 쓴다. 이 말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소망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구원을 현실로 묘사한다. 소망 가운데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대한 바울의 표현을 빌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가 온종일 죽임을 당하는”(롬 8:36) 시대에 어떻게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바울에게 우리가 ‘알지 못함’의 상태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있다. “첫째, 우리가 탄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롬 5:5)-이 함께 탄식하고 계신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부활에 대한 제정된 약속이다.”

6. 일탈: 마태복음
볼프는 끝으로, 바울은 하지 않았으나 분명 예수는 했던 무고한 고난과 연결되는 ‘왜’라는 질문과 불평에 대해 언급한다. 마태복음을 근거로 한다.

얽히고설킨 분노와 절망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퍼붓게 되는 이 “왜”라는 질문 중 예수는 단지 하나만을 물었다. 그것은 마지막 질문이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는 신뢰하고 소망하고 있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다. 그대 예수의 고난에 대해 무엇인가 조치를 취할 만큼 신경을 쓴 듯 보이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은 다만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쓰라린 실망의 표현인 듯 예수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다시 외쳤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당신은 왜 내가 고통과 수치를 겪으며 죽게 그냥 놔두셨나이까? 왜 나의 사명이 비참한 실패로 끝나게 놔두셨나이까?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을 기다린 후에 두 번이나 처절하게 ‘왜’를 물은 물음에, 하나님은 일견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응답’하셨다.

예수는 묵묵부답인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응답했다.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질문의 마지막 말인 “버리셨나이까”를 외치며 마지막 숨을 거두던 바로 그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땅이 진동했고, 바위가 터졌고,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51-52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은 장담하는 말이나 합리적인 설명이 아닌 구원(성소 휘장이 찢어짐)과 부활(무덤의 열림)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버리신 게 아니고 “하나님은 그분의 특별한 종류의 고난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꾸는 능력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볼프 교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했던 불평이었을 수도 있는 그 탄식을 통해, 그 심리적인 온당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욥기에서도 그랬으며, 바울의 입장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성령의 무언의 중보가 동반된, ‘이해하지 못함’에서 초래된 어눌함과 탄식은 불평보다 더 기본적이다.”

고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우리는 고난을 덜어주고 그 원인들을 제거하고자 애쓰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는 소망 가운데 탄식한다.

다음은 강의 후 이어진 질의응답이다.

   
▲ "서양인들은 고난 제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제거할 수 없는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문제다. 내가 오늘 강연으로 시도한 것은, 이렇게 제거할 수 없는 고난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개인의 경험으로 인해 심리적인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의 경우도 있다. 이런 고통은 그의 신앙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런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오늘 강의에서는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혹은 겪으며 나아가야만 하는 고난에 대해서 다뤘다. 제거할 수 있는 고난은 당연히 제거해야 한다. 개인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고난도 마찬가지다. 개인이든 사회구조이든 그러한 고난이 강요되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고난 제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제거할 수 없는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문제다. 내가 오늘 강연으로 시도한 것은, 이렇게 제거할 수 없는 고난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왜’라는 질문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성경도 그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욥도 예수도 그랬고, 인류 역사이래 계속되어온 질문이다.

그렇다면 대답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난에 직면할 때 너무나 많은 ‘왜’가 바로 그런 성격의 질문이다. 답을 고안해내고 만들어내는 것이 이를 다루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으나, 이런 시도는 이데올로기화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위험하다.

우리가 모든 걸 답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 있다면 좋다. 그 맥락에서 하나의 방법은 이런 것이 ‘어둠 가운데서 빛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둠 속에서 빛’을 갖고 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심오한 차원은 우리가 그 어둠 속에서 어둠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 고난을 제거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의롭게 살면 고난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고난 자체도 삶의 방식은 아닌가?
중요한 지점이다. 고난이란 하나의 명사, 정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삶 자체로 역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다만 하나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5년간 급성방사선증후군(ARS)으로 고난을 겪던 친구가 죽었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내가 추모의 말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녀는 이제껏 내가 경험한 많은 사람 중 고난을 이긴 승리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5년간 딱 한 가지를 불평했다고 한다. 내적으로는 더 많은 불평을 했겠지만,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고난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였고, 굉장했다. 고난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나는 개인적 세계적 상황을 모두 생각한다. 내가 제기한 질문의 포인트는 ‘거짓된 삶 가운데 어떻게 진실한 삶을 살까’였다.

―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억압적인 체제에서 성장하고 자랐다. 내 환경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외부 자원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되고 견고하지 못한 삶의 경험은 있다. 내가 오늘 말한 고난의 승리는, 세상과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설명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차원과 세상과 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해하는 차원에 가깝다.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포함하고 있다.

―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한반도가 겪는 고난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관계 안에서 강요된 것이다. 이러한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다룰 수가 있는가?
상당히 다루기 힘든 측면의 고난이다. 오늘 예로 든 욥도 이스라엘 백성도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난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종류의 고난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적으로 강요된, 어쩔 수 없는, 비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이런 고난과 더불어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탄식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고난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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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기독교의 끝에서 시작되는 ‘기독교 이후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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