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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기독교의 끝에서 시작되는 ‘기독교 이후의 신학’
[신학자의 말] 테드 W. 제닝스 시카고신학교 교수 방한 강연
[335호] 2018년 09월 20일 (목) 15:54:19 테드 제닝스 ohjieun317@goscon.co.kr
   
▲ 테드 제닝스 교수는 8월 30일 ‘기독교 이후의 신학’(Post-Christian Theology)을 주제로 강연했다. 통역은 제자인 한수현 박사가 하고, 평화교회연구소,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카이로스와 도서출판 길이 함께 주관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기독교 이후라는 말은 기독교가 끝난 이후를 의미한다. 쇠락하고 몰락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이후에 나타날 소위 기독교라 할 수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끝과 동시에 연결되는 삶, 또 다른 어떤 목표, 새로운 완성을 만드는 계기이다."

세계적인 신학자 테드 제닝스 교수는 8월 30일 열린 ‘기독교 이후의 신학’(Post-Christian Theology) 강연에서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통역은 제자인 한수현 박사가 하고, 평화교회연구소,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카이로스와 도서출판 길이 함께 주관했다. 원래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이번 강연은 학교 측의 갑작스런 취소로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제홀에서 진행했다. 두 시간여 동안 이어진 이날 강연에서 수강자들은 준비된 자리를 꽉 채웠고, 선 채로 듣는 이들도 있었다.

칼 바르트와 ‘기독교 이후의 신학’
제닝스 교수는 기독교 이후의 신학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몇 가지 역사적 지점과 계기를 설명했다. 그 시작은 20세기 개신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신학자로 꼽는 칼 바르트의 맥락이다.

바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근대의 어떤 문명이 몰락한 이후, 그러니까 유럽의 세계관이 무너진 이후에 바울을 읽기 시작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보면 그는 자기 시대 인류가 마주한 위기 상황을 제국의 몰락 상황의 맥락에서 읽어 냈다. 바르트는, 19세기 마지막을 장식한 자기 선생들이 자기 때의 문명을 가장 고도화된 문명이자 종교적 완성에 다다른 인류로 진단한 것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종교야말로 인간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만든 가장 문제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그런 종교야말로 믿음을 대적하고 믿음에 반대된다고 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시 ‘종교적 기독교’와 대적할 수밖에 없음을 말했고, 연장선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문명의 몰락, 파시즘과 나치즘을 예견했다.

양차 세계대전, 파시즘과 나치즘 당시 종교가 되어버린 교회는 하나님을 대적했다.

개신교 교회들은 히틀러가 추구하는 국제국가, 사회국가에 동의하고 그 우산 아래서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으며, 거의 예외 없이 나치의 깃발 아래 복종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갖고 있는 버릇이 하나 있는데, 아주 권위적인 체계나 권력에 굴종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나치 정권 당시 바르트에겐 젊은 친구 본회퍼가 있었다. 그들은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1934)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누구에도, 인간의 권력과 폭력에 굴종하거나 머리를 숙여선 안 된다고 분명히 소리쳤다. 믿음의 사람으로 ‘신실한’ 삶을 사는 것에 관한 바르트 입장은 매우 명확했다. 신실함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세속적 권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그 어떤 단체나 정부, 종교적 교회 혹은 기독교 자체와 같은 것들에 절대 가치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며, 신실함이란 그 이데올로기들과 같이 갈 수 없다고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기독교 이후의 신학’
제닝스에 따르면 본회퍼는 이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나치 치하의 종교적 기독교는 몰락했으나, 젊은 신학자로서 본회퍼는 기독교 이후의 신학에 접근한 것이다.

본회퍼는 그 후에 기독교 이후의 신학에 접근한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자신에게 온 세계적 책임, 삶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치 정부를 무너뜨리고 그 수장인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의심을 받는 단체, 군대의 상위 계급자들도 가담하고 있었던 한 단체에 가입한다. 본회퍼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폭력주의자였으나, 결국 그 단체의 암살 계획 관련 혐의로 체포되고 투옥된다. 감옥에 갇히면 무언가 깊게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처럼, 본회퍼 역시 감옥 안에서 사유하고 느끼는 것들을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케에게 편지로 써 보내곤 했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쓴 편지에 담긴 내용이 바로, 기독교 이후의 신학이었다.

본회퍼의 편지에는 많은 고민과 질문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형이상학으로서의 기독교가 끝나고, 즉 하나님 자체에 대해 사변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적 기독교가 끝난 이후에 어떤 시대가 올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었다. 본회퍼는 종교 없는, 종교를 넘어선, 종교 밖의 기독교란 무엇일까 고민했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이끌어가고 변화시키는 시대가 끝나고 순전히 우리들이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상황,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데 단순히 참여하는 걸 넘어서서 세계의 상처입음 위에 서고 상처입음에 앞장서는 일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함으로 세계의 약함과 상처입음에 함께했던 예수의 자리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실함, 즉 종교의식이나 조직의 보호 밖에서 하나님의 상처입음과 세계의 약함과 책임을 놓고 홀로 서는 기도란 무엇일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위자 안의 존재에 대한 존재와 씨름하는 기도란 무엇일까.

   
▲ 방한한 제닝스 교수의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 한국어판 출판 기념 강연에서 ⓒ복음과상황 이범진

고가르텐, 그리고 알타이저의 ‘신 죽음의 신학’
제닝스는 이어서,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이 말한 기독교의 세속화의 의미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고가르텐은 기독교 이후의 신학, 즉 기독교의 세속화를 ‘진보’로 읽어 냈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독일 개신교 신학자 고가르텐은 말하길, 기독교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라고 했다. 결국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가진 책임은,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책임은 피할 수 없이, 바로 우리에게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고가르텐의 사상은 제닝스의 스승이기도 한 토마스 알타이저의 ‘신 죽음의 신학’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내 젊은 시절 스승인 토마스 알타이저는 ‘신 죽음의 신학’을 말했다. 이는 니체의 무신론적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의 가장 근본 뿌리로서의 기독교 형태, 성경에 나오는 복음과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사상을 헤겔식으로 풀면, 하나님은 초월자로 창조주로 존재했지만, 신약 세계가 되면 스스로 그런 초월성을 버리고 이 땅에 내재하면서 예수로 스스로 치욕을 감당한다. 그 결과 하늘은 비었다. 알타이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승천한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내려갔으나, 정작 기독교는 ‘이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종교적 기독교는 자기 필요에 의해, 초월적인, 그러니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다시 만들어 내면서 하나님이 비우고 내려오신 하늘을 심판, 죽음, 정죄의 ‘하나님’으로 다시 채웠다.
그 이름을 달리 말하면 바로 사탄인데, 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나오는 그대로 사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절대적 초월적 하나님을 만들어 냈어도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 운동을 막을 수도 제지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알타이저 생각에는 하늘을 비우고 내려오신 하나님은, 그 이후엔 다른 방식과 형식으로 기독교라는 종교 밖에서 계속 이야기되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니체가 ‘하늘에 있는 신’은 죽었다 말하고, 윌리엄 블레이크가 ‘신은 죽었다’ ‘신은 악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맥락인데, 알타이저가 이 설명을 역사적으로 해냈다.

   
▲ "종교적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끝난 이 시대에, 기독교 이후의 신학이 시작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제닝스 교수는 곧,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기독교 이후의 신학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금 여기서 기독교 진리를 다시 생각해보자. 기독교 진리는 기독교 밖에 위치하고, 기독교 안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교리, 종교, 권위와 같은 심판과 죽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알타이저 생각의 한 부분을 증명하는 일이 현재 세계의 인문학이나 지식 구도를 바꾸는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기독교 밖에서 오히려 바울의 기독교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유대인 사상가였던 야곱 타우베스, 맑스주의 사상가인 알랭 바디우, 해체주의 사상가인 자크 데리다가 바로 그렇다. 여기서 곧장 바울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자크 데리다의 친한 친구였던 장 뤽 낭시를 언급하려 한다. 그는 지금도 미국 유럽 지성사를 이끄는 사상가이다. 그의 빛나는 저술 중 두 권이 바로 ‘기독교 해체’에 관한 내용인데, 낭시는 고가르텐이 기독교의 세속화가 완성이라고 했던 입장과는 또 다르다. 그는 기독교는 종교를 벗어나는 종교, 종교 밖으로 나아가는 종교라고 말했다. 기독교 핵심은 신에 속한 거룩함이 곧 인간적인 것과 인간의 것들로 체현된다(나타난다)는 것이며, 결국엔 신과 인간의 차이 자체를 허무는 것이 이미 기독교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종교를 타파하고 무너뜨리며, 하나의 절대적 신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제국주의화한 ‘종교적 기독교’ vs. 바울의 정의론
제닝스 교수는 이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났던 종교적 기독교 이전의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대해 설명했다.

종교적 기독교 이전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당시 주변인들에게 무신론자 혹은 신실하지 않은 혹은 (공산주의는 아닌) 신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로 여겨졌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국교화하려 노력했는데,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데 열심이었고, 그걸 체험한 이들은 로마로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철학자와 지식인들은 기독교인들은 반종교적이라서 위험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기독교는 숭배 예식도 없고, 절대 신을 만들기보단 ‘인간이 된 예수’를 말했으며,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음에 오히려 더 불편하고 위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존을 이유로 제국의 종교가 갖는 가면을 받아들였다. 황제에 의해 무참히 죽어가던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갖는 가면을 받아들이면서, 제국의 통치와 생존의 모든 걸 합리화하는 종교적 기독교로 변모했다.

   
▲ 테드 제닝스 지음, 박성훈 옮김, 길 펴냄

바울은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와 관련하여 제닝스 교수는 기독교 이후의 신학과 ‘무법적 정의’의 관계에 대해 논했다. (4월 번역 출간된 제닝스 교수의 저서 《무법적 정의》에는 바울의 메시아 정치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로마서를 쓴 바울은 그러나 당시 관점에서 보면 어떤 종교성도 없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점에서 놀랍다. 기독교 전통은 바울이 쓴 로마서가 기본적으로 급진적으로 오직 정치적 사회적 정의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계속 숨겨 왔다. 개신교는 줄곧 칭의만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썼는데, 정의와는 무관한 종교적 의미의 칭의만 이야기해 왔다. 우리를 정의롭게 하는 칭의가 아니라 우리의 비참함을 덮고 그냥 지나가 주고, 무작정 보살펴주는 의미로 이용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말하길, 루터가 정의의 이야기를 ‘죄의 용서’로 잘못 해석한 나머지 결국 나치 치하의 교회가 부정의한 것들을 방기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루터는 바울이 마치 인간의 죄의 용서를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해석을 했는데, 나름의 맥락과 이유가 있었으나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울은 한 번도 용서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사족이지만 실제로 바울 서신에는 용서란 말은 이사야서를 인용할 때에 단 한 번 나온다. 실제로 바울이 가장 많이 말한 것은 ‘나를 받아들이라’ ‘나를 용납하라’는 것, 바로 환대다.
초기의 모든 기독교 지식인들은 정의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문제임에 동의하고 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되고, 정의로운 환경에서 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고, 당시에 많은 바울 이전 이후 사람들이 법을 그 해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했다. 법은 결코 정의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봤다. 여기서 바울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바울이 보기에 당시 법은 완전히 실패했는데, 모세의 법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는 저주받았고, 로마법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선의 두 가지 법이 메시아로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와 완전히 대립되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종교, 정치, 법, 그 모든 것이 종합된 이러한 체계 자체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는 절대 만들 수 없는데, 이때 정의는 과부, 노예,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도 적용되는 정의를 말한다. 법은 언제나 그 테두리 안에 힘을 가진 이들의 그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래서 법은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를 만들기 위해 종교적 기독교와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상상했”으며, 지금 교회가 하는 것처럼 칭의로 개인 구원을 말한 적도없다.

바울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도, 분배도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관용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에 대해서 상상했다. 그는 하나님의 관용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그런 관용을 드러낼 존재가 되리라고, 그리스도가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한 것처럼 똑같이 된다고 확신했는데, 이건 확신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바울은 단순히 정의를 구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사상가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낸 운동가였다. 당시 로마 제국의 서쪽 반을 차지하는 곳들을 다니며 조그마한 커뮤니티(들)를 만들었다. 커뮤니티마다 관용을 나누는 사람들이 되라고 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확신이 있던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사상은 절대 한 개인을 목적으로 두지 않으며, 한 개인의 칭의를 말한 적이 없다. 커뮤니티로서 그것을 실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행동한 사람이 바울이다.

   
▲ 통역을 맡은 한수현 박사(오른쪽) ⓒ복음과상황 이범진

초기 기독교의 길 위에서 상상하는 기독교 이후 신학
강의 후반부로 가면서 제닝스는 결국 지금 기독교 이후를 이야기하는 이유, 그리고 바울을 그에 앞서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기독교 이후의 신학은 그 직전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기독교가 없던 때의 초기 기독교가 갔던 길을 말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이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기독교 이후를 이야기하면서 바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종교적 기독교 이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뭔지 잘 모르지만 오로지 메시아에 대한 충성으로 정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바울이기에 이로써 우린 기독교 이후를 이야기해봐야 한다. 기독교라는 것이 아주 길게 돌아간 길, 바울과 예수 이전에 있었던 무엇인가에서 연결되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라 종교적 기독교 이전의 기독교에서 돌아가서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금 우리 시대에서 상상해봐야 한다. 종교적 기독교가 끝나고 그 밖에서 다시 새롭게, 이전에 있던 게 무엇인지 상상해보자. 돌아가는 기간 동안 좋은 것이란 칼케돈 신조에서 나온 교리들, 발전한 건축과 예술, 그리고 예배와 의식들에 대한 한 부분이다. 지금에 와서는 단지 관광객이 보고 즐기는 관광지로 변해버린 것들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대형교회 예배가 그렇다.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나 이해와는 전혀 무관하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현실과 우리에게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지옥 가기 싫어서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는다.

제닝스 교수는 결론적으로 다시, 종교적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끝난 이 시대에, 기독교 이후의 신학이 시작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는 끝에서부터 종교적 기독교 이전의 무엇, 곧 예수에게 나타났던 신실함을 통해 가능해지는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말했다.

한 가지 아주 특별한 점은 지금 이 세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인간의 각종 욕망을 대변하는 기계와 체계 속에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고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대안이나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많은 지식인이 다시금 바울에게로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종교도 국가라는 조직도 정치 기구도 우릴 구원 못 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책임을 어떻게 다 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지젝, 지라르, 데리다, 낭시, 그리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지식인들이 교리와 형태와 전통과 종교를 벗어나, 윤리적으로 인류 세계를 책임지고 폭력과 차별과 죽음으로부터 인간 존엄성을 발견하고 지켜 내어 새로운 인류의 삶을 추구하고 상상하고 만들어나갈 방법을 성서의 바울이 말하는 데서 찾고 있다. 법이나 종교, 체계나 시스템 밖에서 그 시스템에 저항하며 정의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바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젠 종교적 기독교가 해내지 못했음을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도 그렇듯이 종교적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자주, 언제나 증오와 공포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한국의 사례를 보면 종교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지금도 창궐하는, LGBTQ나 이슬람에 대한 혐오, 미국의 예를 들면 역사적으로 여전히 해결 되지 않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혐오와 공포는 결국은 스스로를 몰락시키고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에 들어간다는 걸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희망이 없다고 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기독교 이전에 존재했던 타인을 환대하고 존중함, 차이를 뛰어넘고 관용을 베풂, 바울은 이를 신이 베푸는 관용과 사랑이라고 불렀다.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타났던 이 신실함과 충성이 아마도 우리 미래를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청중과의 질의 응답

― 기독교를 해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몇 가지 예로 설명해보겠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을 때를 가정해보자. 다함께 모였을 때 기도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한 대로 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남들이 보는 데서(공적인 자리)에서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자주 잊는 것 같다. 아주 근본적으로 주기도문을 생각해보자. 우리 존재 자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 기도를 정의하고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우리가 정말로 주기도문 그대로 되기를 외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이 이룬 것처럼 이루어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저주, 미움이 아니라 신적인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예배 때 타인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도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지금 그렇게 해달라는 것인데, 예배 시간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일까? 모르겠다. 일용한 양식, 내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비축하지 않고 정말로 기독교인들이 오늘 하루를 위해서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한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먹는 행위가 예수의 식탁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개방된 식탁처럼 변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주의 식탁,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다는 행위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먹을 것을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나누는 것, 그것이 예수와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변화가 일어날까? 주의 만찬을 우리가 실천한다면, 정말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성/속을 나눴던 기독교 전통을 무너뜨리고 기독교를 전복시키는 행위이다.

― 리처드 로티는 포스트모던이 ‘모든 신격화를 해체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기독교 이후 신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데리다는 포스트모던이란 표현으로 시대를 진단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포스트모던과 신비주의의 공통점에 대해 말한 적은 있다. 그는 신이 그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에서 인간이 신의 신비로 들어갈 때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고 더 나아가 신의 존재의 신비에 다다를 때 신조차 사라지는 신비적 단계가 오히려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깝다고 말한다. 즉, 신 없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과 신이 신비적으로 가까워지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인간은 왜 두 가지 모습을 다 갖고 있을까? 인간 존재가 약하기 때문이다. 상처 입기 쉽고, 깨어지기 쉽다. 명확한 한계가 있기에 자기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 그 보호 본능이 타인을 상처 입히고 위해를 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소명을 얻는 거다.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는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그런 부름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와 타인의 관계를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관계로서 부름 받은 거다. 사랑, 성애, 원하는 것들, 즐기고자 하는 것들은 서로의 관계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지 않으면 서로를 망친다. 이것이 예수, 바울로 이어지는 기독교에 나오는 하나님의 도박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진 도박.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면 우리 인간도 그렇게 하리라 믿고 도박을 건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공동체와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고 자기를 다 내어준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실패하고 우리도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내 일생도 실패한 것이고, 하나님도 도박에서 진 것이다.

― 아나키즘과, 바울이 말하는 ‘법 밖의 정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연관성이 있으나 분명 차이가 있다. 국가 종교 체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무법적 정의란 하나의 명령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라는 명확한 명령, 그것이 정의이다. 그러면 폭력을 대하는 이들에게까지 관용과 환대를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엔 망설임 없이 로마서 12장과 마태복음에 나타났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라는 표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단지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누군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행동을 의미한다. 그가 나를 해치는 원수라도 그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는 옷을 주어야 한다. 물론 자기 욕망을 넘어서 남을 환대하고 베푸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커뮤니티로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메시아의 삶을 커뮤니티의 관용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개인 윤리와 커뮤니티 윤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의 개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

 감수 한수현 박사 / 정리 오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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