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호 3인 3책] 슬픔을 위한 시간 / 박정은 지음 / 옐로브릭 펴냄 / 2018년

최근 비교적 가까운 지인의 장례를 치렀다. 교회에서 함께 일하며 바로 전날 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전혀 예상 못했던 동갑내기의 부고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각자에게 다가 온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할 말을 잃고 멍 한 채로 장례식에 모여 서로와 유족들 앞에서 허둥댔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눈물과 한탄이 이어졌고, 좋았던 기억도 유감스러운 상황들도 슬픔을 증가시키기만 했다.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장례식이었다.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일주일여 시간이 지나고 교회에 모여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이 일에 대해 다들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한 분이 이야기를 하다 감정에 복받쳐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우리 모두 비슷한 심정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위로를 건네려는 찰나, 한 집사님이 입을 여셨다. “아이고. 아니 하나님 만나러 가셨는데 뭐가 그렇게들 슬퍼!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이럴 때 믿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사해야지, 계속 울고 슬퍼하면 하나님이 섭섭해하셔. 믿는 사람한테 죽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딨어?” 이런 기독교 드라마 대사 같은 말씀을 하신 집사님의 얼굴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묘하게 슬픔을 경멸하는 듯한 표정이 섞인 것 같았다. 분위기가 좀 싸해지긴 했지만 특별히 놀라거나 당황한 사람은 없었다. 슬픔이 있는 자리에서, 특히 교회에서 으레 듣게 되는 이야기이고 다들 익숙해져 있으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슬픔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이 굳이 들어가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슬픔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리는 감정으로 여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 적당히(?) 슬퍼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만 계속, 많이, 오래 슬퍼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알게 모르게 판단당하는 경우도 본다. 타인이 보기에 슬픔의 신선도에 따라 위로를 받을 수도, 상한 음식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슬픔에 머물지 말고 되도록 빨리 빠져나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길 부드럽게 (이게 더 무서운데) 강요받곤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보다 레벨이 낮은 말씀인 게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슬픔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을까? 슬픔을 얼른 치워버려야 할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기는 이들이라면 더욱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을 위한 시간》의 저자 박정은 교수는 ‘슬픔’에 대해 ‘항상 기쁜’ 상태와 대립되는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삶이란 “끊임없는 상실의 연속”이기에 슬픔은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슬픔 안에 제대로 머물며 충분히 슬퍼하는 사람은 “그의 상처받기 쉬운 부드러움과 연약함이 다른 이를 위로하고, 또 자신도 다른 이에게서 위로를 받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도 말한다.

슬픔이란 대부분 인생에서 겪는 크고 작은 상실들에 따라 오는 것이기에 사실 두려울 수밖에 없다. 아마 그래서 서둘러 기뻐하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말씀에 의지를 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움이 슬픔을 외면하고 그 자리에 억지로 기쁨을 데려와도 그것은 온전할 수 없다. “우리 생에 놓인 슬픔을 기꺼이 껴안”고 충분히 머물 때 우리는 스스로와 타인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고, 상실과 아픔으로 인한 깊은 성장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충분한 슬픔 없이 온전한 기쁨은 어렵다. 슬픔엔 그런 힘이 있다. ‘슬퍼하는 자의 복’이란 이런 게 아닐까?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자여 《슬픔을 위한 시간》을 가지자. 충분하고 풍성하게.


심에스더
성을 사랑하고 성 이야기를 즐겨하는 프리랜서 성과 성평등 강사이자 의외로 책 팟캐스트 〈복팟〉 진행자. SNS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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