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호 커버스토리]
#. 장면 1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2017년 말에 있었던 서울시 국감장에서는 뜬금없는 사회적 경제 논쟁이 뜨거웠다.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이 박원순 시장을 향하여 “조희연 교육감과 함께 교과서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아주 불순한 이념, 즉 사회적 경제 개념을 주입시키려 한다”고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는 “섬뜩하다” “교묘하고 악랄하다” 등의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가 예로 든 것은 사회적 경제 교과서에 실린 ‘공유지의 비극’ 현상을 설명한 만화였다.
‘공유지의 비극’은 1968년 미국의 생물학자 개릿 하딘이 만든 개념으로, 개인과 공공의 이익이 충돌할 때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공동체 전체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후 앨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지의 희극’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사적 소유에 의한 경쟁이 최선이 아니라 때로는 ‘공유’가 더 효율적이고 인간다운 세상에 공헌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정치학자였던 그녀는 이 개념으로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표창원 의원이 지적해주기 전에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 같은 장 의원은 연이어 ‘사회적 경제’와 ‘사회주의’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사회적 경제를 자유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규정하였다. 그날 밤 나는 서대문구 사회적경제 네트워크 밴드에 “우리, 분발합시다!”라는 짧은 메시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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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2
올해 6월, ‘마을공동체 하.나.의.’는 몇몇 사회적기업과 손잡고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국민 참여 사회문제 해결 프로젝트 하나를 기획하고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왕래가 빈번한 골목길에 마을건강방을 만들고, 그곳을 통해 시니어들이 건강 유지 활동을 하며 공동체 안에서 안전한 관계망을 형성해가기를 기대했다. 마을공동체 하.나.의.는 이미 끈끈한 관계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역공동체로서, 공간 유지뿐 아니라 관계를 매개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집 공고 후 한 달이 못 되어 동네 어르신 100여 명이 회원 신청을 했고, 성실하게 마을건강방을 방문하여 운동을 하고 건강 유지 활동을 한 회원들에게는 포인트에 따라 건강수당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공동체가 위치한 서대문구는 광진구의 ‘광화’나 노원구의 ‘노원’같은 지역화폐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따로 공동체가게 이용권을 만들어 나름 의미 있는 지역 상점들을 접촉하여 협약을 맺고 이용권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통장을 하며 봉사도 많이 해온 약사님이 운영하는 30년 넘은 약국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를 소개했다.
“저는 서대문구 사회적경제마을센터에서 일하는….”
“사회적 경제, 그런 거 하지 마요. 나 그런 거 싫어. 사회주의 그런 거.”
“네에….”
다행히 약사님의 억양에 남아 있는 엄마 고향 사투리의 흔적을 잡아내고, 우리 막내 이모가 그분이 자랑스러워하는 고교 후배라는 사실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사업 내용은 제대로 설명 해보지도 못했을지 모를 일이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나는 아주 소심하게 “사회적 경제, 그거 좋은 건데요”라는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으로 답답한 마음을 조금 덜어냈다.
사회적 경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대안적 패러다임
사회적 경제를 사회주의와 혼동하는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적 경제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이 생소한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심심찮게 들려오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박원순 시장이 취임을 하면서 서울을 ‘사회적 경제의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후 간간이, 그리고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서 ‘사회적 경제 활성화’가 상위에 랭크되어 발표되고 난 이후 좀 더 빈번히. 하지만 사회적 경제가 지향하는 가치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주장되고 구현되어 온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 그 긴 역사의 저 끝자락에는 구약성경이 그리는 사회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 경제 이론과 실천의 성장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공동의 이익을 목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고 분배한다. 사회적 경제 주체들(일반적으로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을 말한다)이 의사 결정을 하는 최고의 동기는 이윤 추구가 아니다. 사회 서비스의 질 개선,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 지역 공동체 재생 등 다양한 사회적 가치 실현이 주요한 동기로 작용한다. 이들은 경쟁과 효율보다는 협동과 연대를 지향하고 성장의 열매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져서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꿈을 꾼다. 공동체적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경제가 우리 경제체제의 일부로서 어떤 역할을 자임하느냐에 대한 답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우선, 자유시장경제를 부정하고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하여 양극화를 촉진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보완하려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나는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전제들을 재고하고, 자본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되어 환경과 자원의 한계 안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고민하는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 사회적 경제를 이해하는 견해에 동의한다.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전제와 실천의 지향은 단순한 보완이 아니라 전혀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 복음으로 하나 된 삶의 공동체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사도행전 4:32-35, 새번역)
성경은 모든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교과서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가 취해야 할 ‘경제체제는 어떠해야 한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경제 영역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가치로 하나가 되었을 때 일어났던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상이다.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이 증언되었고 그 증언을 믿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식을 행동에 옮겼다. 자기의 소유를 자기만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사실 이것은 주장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 인정되는 권리니까)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부동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웠다. 이 일은 신약의 교회가 형성되고 일어난 일이지만, 이와 동일한 가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 안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토지공개념의 기반이 되는 희년사상, 그 놀라운 회복체계. 이 이상은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상을 추구하기를 너무나 빠르고 쉽게 포기했다.
‘이생망’ 시대에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사는 방식
요즘 청소년·청년들의 두드러진 정서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이생망’, 즉 ‘이번 생은 망했다’란다.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고, 3포 세대, 5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라는 말조차 이미 너무 식상해져 버렸다. 단절된 개인들의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를 부추긴 신자유주의가 낳은 결과물이다. 이 경쟁에서 상위를 차지하려는 개인의 ‘노~오~력’은 더 이상 답이 아니다. 그렇게 할수록 절망이 깊어질 뿐.
교회는 이미 그 절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개입을 통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노력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고,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드러내며, 정의와 평화를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 이해한다. 하나님을 구주요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로 인정하는 교회는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통치 원리를 적용하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돌봄, 나눔, 상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와 만난다. 영국의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생명의 경제학》(Unto This Last)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허락한 것이 또 하나 있다면, 비록 ‘최고의 이득’이 무엇인지 혹은 그 최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정의를 추구할 때, 결국 우리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최고의 이득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32쪽)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살라고 요구하신 방식대로 살아갈 때 궁극적으로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경제적 영역에서 그것은 공평케 하는 원리를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 경제의 지향성을 공유한다.
하.나.의.교회가 사회적 경제를 만난 때
서울 홍익대 인근 동교동 삼거리 지하 2층 허름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의.교회는 창립 7주년을 맞아 온 교인이 함께 교회의 사명과 비전을 정리하는 데 긴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비전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성장하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살아가며, 이 땅에서 창조적 변혁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온전한 제자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창조적 변혁이라는 비전을 안고 일상의 삶을 고민하던 하.나.의.교회는 2011년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터를 마련하고 열두 가정이 함께 살아갈 공동체주택(하심재)을 지었다. 예상치 못했던 시공사의 어려움 등으로 공기가 연장되어 실제 입주를 하게 될 때까지 2년 동안, 입주 예정 멤버들은 매주 모여 우리가 만들어갈 공동체적 삶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했다. 우리는 주택을 개별 소유가 아닌 공유의 형태로 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성을 담보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던 중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정보를 입수했다. 곧바로 절차를 밟아 전국 몇 호안에 드는 순번으로 협동조합 신고를 했지만, 주택협동조합과 관련된 세제 등, 관련 법규들은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입주해야 할 기한을 맞으면서 개별 소유 방식의 등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내규를 통해 우리의 정신을 구현할 방법을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작은 아파트 한 칸도 자기 돈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열두 가정은 어렵게 갖게 된 집을 투기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내규에 담았다(“매매: 주변 시세가 폭등했을 때 운영위원회의 결정으로 약간의 증가액을 인정해주는 경우 외에는 매입가 그대로 주거공동체 전원이 합의하여 교회 공동체 다른 일원에게 매매한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주택협동조합 하.나.의.를 설립하여 두 번째 공동주택(하의재)을 지었다. 당시에 따로 ‘교회공간 마련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비좁아진 예배당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던 교회는 새롭게 지어질 공동주택의 지하에 마을극장을 짓고 주일에는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제는 하.나.의.교회가 지역공동체를 섬기는 공동체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다. 예배실 공간은 동교동 시절보다 더 좁아졌지만, 이미 자리 잡고 있는 1호 공동주택 하심재의 커뮤니티 공간과 주변에 사는 공동체 식구들의 집이 주일학교와 오후 강좌 등에 사용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현재 우리는 주일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가정모임을 하며 센터들(선교센터, 문화센터, 사회변혁센터, 소명센터, 삶의여정센터)을 통해 사역하는 전교인 공동체인 하.나.의.교회, 남가좌동 지역에 하나둘 모여들어 성인 100여 명이 이루고 있는 마을공동체 하.나.의, 그리고 하심재와 하의재라는 두 채의 공동주택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거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분화하여 지역을 섬기고 창조적 변혁을 위한 시도들을 이어가고 있다. (하심재/하의재 ⊂ 마을공동체 하.나.의. ⊂ 하.나.의.교회.)
지난 6년여 동안, 우리는 때로는 사회적 경제의 주체라는 형식을 빌려, 때로는 내규상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의 방식을 따르면서 재미있는 일들(재미있다고 힘들지 않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을 벌이고 있다. 부모 협동조합 방식의 공동육아, 사회적기업 방식의 공동체 사업, 사회변혁센터가 주관하는 공모사업 형태의 지역사회 변혁 활동을 펼치고, 구나 시가 시행하는 공모사업 등에 참여하기도 한다. 협동조합 건물(하의재) 1층 상가에는 공동체 식구들이 이탈리아 레스토랑 ‘따라멜리 19’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한 구좌 100만 원의 ‘재정참여자’(투자자가 아니다!)를 모집했고, 구좌수와 상관없이 총회 1인 1표를 부과하였다. 수익이 발생했을 때에는(제발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직원, 지역사회, 그리고 창조적 변혁을 위한 기금 등에 배분하는 비율도 정했다.
우리는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변화를 주도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 방식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다음세대 먹거리 모임’이나 공동육아 및 대안 교육 연구 모임 등에 많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작은 바람, 물길을 바꿀 때까지
교회 공동체가 지역에서 마을을 만들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을 해결하며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온 경험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훌륭한 자산이 되었다. 나 역시 그 자산을 기반으로 작년부터 서대문사회적경제마을자치센터에서 일하고 있다(서대문구는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주민자치사업단을 하나의 센터로 통합 운영한다). 창업을 지원하거나 육성 사업을 하거나 특정 사업을 함께 시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회적 경제 주체들 가운데는 유난히 사회적기업가 정신이 뚜렷하고 소통과 연대에 탁월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면 따뜻하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런 협동조합, 사회적기업들이 사회적 사명을 품고 사업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일에 애쓰고 있다. 열여덟 살이면 독립을 해야 하는 시설 청소년들에게 디자인을 가르치고 함께 상품을 개발·판매하는 회사, 기업에만 편파적으로 유리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통상 계약 방식을 깨뜨리고 무명 아티스트들을 발굴 육성하여 업계 관행을 재편하려는 회사, 장애인을 훈련하고 고용하여 카페를 운영하는 협동조합 등. 농업 중심 지역에서는 지역교회가 중심이 되어 영농협동조합을 운영하거나 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마을기업으로 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 아직은 대부분 중소규모이지만, 기업으로서의 성공과 취약계층 일자리 제공, 양질의 사회 서비스 제공, 나아가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사회적 사명을 잘 좇아가고 있는 기업들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교회들에게 사회적 경제는 생소하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사회적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동일시하며 멀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기독교사회적기업지원센터(고용노동부가 지원하는 기독교계 사회적기업 활성 및 육성을 위해 감리교 구세군 성공회 장로교 등이 참여하여 2011년에 설립한 초교파 연합기관-편집자)가 있고 ‘1교회 1사회적기업’ 육성 캠페인이 진행 중이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교회가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 경제 분야에서 공동체적 시도를 할 때, 사회적 경제는 그 틀과 내용을 잡아주는 훌륭한 기독교적 도구가 됨에도 말이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사회학적 파상력》에서 근대화, 산업화, 세계화의 비전이 무너지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기본적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이 시대에 마음의 부서짐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과 정의’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게 세상을 치유하고 절망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소명을 부여하는 말이다. ‘공동체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실과 정의를 전하고 구현할 기독교 사회적 경제 기업들이 건강하게 생겨나고 성장한다면. 작은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고, 마침내 흐름을 바꾸기까지.
강선규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교육사회학을 공부했다. 네팔 아동청소년의 교육 지원 및 인권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바보들꽃’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아동청소년 인문 교육 시리즈(전6권) 《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행복한 노동자가 될래요》 등의 공동 기획·집필에 참여했다. 현재 서대문구 사회적경제마을자치센터장으로 일하면서 하.나.의.교회를 섬긴다. 《영혼의 친구, 부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한 소명 찾기》 《하나님 나라의 경제 비밀》 등 다수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