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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든 마을공동체든, 신뢰의 관계망이 기초입니다”
[338호 사람과 상황]
[338호] 2018년 12월 27일 (목) 15:21:44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 ⓒ복음과상황 오지은

마을공동체 사업. 서울시가 2012년부터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모든 활동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추진해왔다. 주민 주도의 마을기업, 문화제, 공동육아 등 마을 단위의 거의 모든 활동을 다양한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직과 공간 등의 자원을 갖춘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도 마을공동체 사업에 직접 뛰어들거나 사업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사업이 시작된 지 6년이 넘어가면서, 눈에 보이는 성과들도 많았지만 극복해야 할 한계들도 노출되고 있다. 소통의 부족에서 오는 서로 간의 갈등은 기본이다. 치명적인 것은 주민이 ‘주도’해야 할 마을공동체 활성화 활동이 지자체의 ‘정책’에 휘둘리는 경우다. 사업의 목적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 곳곳에 냉소의 시선이 없지 않다.

마을활동가들의 고민이 더 깊어만 가는 이즈음, 6년여 동안 여러 모양으로 마을활동을 해온 이용희 ㈔영등포마을 이사장을 만나 마을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봤다. 그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사회를 더 낫게 바꾸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밑바닥 신뢰’가 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번 커버스토리 주제가 ‘사회적 경제’인데, ‘마을’ 활동을 하면서 이 단어의 뜻을 곱씹었을 것 같다.
사회적 경제라는 단어 자체가 오역되기도 하고, 수입된 개념이다 보니까 외국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이 많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한국의 특성을 살린 설명이나 연구도 부족한 현실인데, 이걸 정책으로 도입하면서 공무원이 생각하는 사회적 경제 개념이 더해지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때는 학자들이 나서서 정리해줘야 하는데 그마저도 어려운 현실이다. 비주류 경제 담론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경제성장 담론의 비중이 워낙 거대해서, 사회적 경제는 ‘취미생활’이나 ‘양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 그래서 현장에서 몸으로 ‘사회적 경제’를 경험한 분에게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장(長)을 맡은 데만 열 곳 정도 된다. 한때 열여덟 곳이었는데 줄였다. 사람들은 그 많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 묻는데 충분히 할 수 있다. 전부 상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로 무슨 공동체 대표 같은 거다. 여러 일을 하니까 복잡한 건 사실이다. 그중에 주로 하는 일은 주민자치위원, 아파트 입주자 대표, 영등포산업선교회 신용협동조합 다람쥐회 회장 등이다. 영등포구에서 마을사업을 하며 ‘영등포마을넷’ 대표를 했었고, 그곳에서 여러 위탁사업을 하다 보니 더 안정적인 시스템이 필요해 사단법인 영등포마을을 만들어 초대 이사장을 하고 있다. 처음 마을공동체사업을 할 때 문래동 2가에서 마을공방으로 시작했다. 그 공간에서 동네 어머니들과 재봉틀로 소품도 만들고 수다도 떨면서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노동당 당원(영등포구 당협위원장)이기도 하고, 최근 문래창작촌에 임대료가 너무 올라가 상가임차인권리 상담소도 운영하였다.

― 특정 정당에서 활동하는 게 마을사업을 하는 데 지장을 주지는 않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공동체에는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다. 입주자 대표 회의도 그렇고, 주민자치회나 사단법인 회의도 마찬가지 여러 결정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관계된 여러 층위의 공동체가 어떤 결정을 할 때, 그 결정이 내 삶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다 관여하려다 보니, 여러 단체의 장도 맡고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 거다. 정당 참여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내가 ‘당원’이라고 하면, “정치하려고?” “선거 나가려고?” 물으면서 색안경을 끼고 본다. 삶과 엮인 여러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일상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다르지 않은데도, 많은 사람들은 ‘당’이라고 하면 굉장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 그만큼 우리 의식에서 ‘일상’과 ‘정치’의 거리가 벌어져 있는 것 같다. 
마을사업 활동하면서 나는 ‘선거 안 나간다’고 여러 차례 공언해왔다. 문제는 사람들이 안 믿는다는 거다. 현실적으로 우리 당에서 나를 공천한다고 해도 내가 당선될 일은 없다. 그래서 요즘에는 ‘선거 나갈 거다’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그마저도 이제는 안 믿는다.(웃음) 실제 마을 단위에서 자치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곧바로 선거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의식이 안 좋아진 측면도 있다. 아무리 순수하게 활동한다고 해도 주민들이 이질적으로 여길 수 있다. 

― 교회에도 다니는지?
미국에 있을 땐 여자친구 따라 교회 열심히 다녔다. 한국에 와서는 아내가 성당에 가자고 해서 성당에 열심히 잘 다니고 있다. 어머니와는 절에 가기도 한다. 성문밖교회에도 종종 가서 힘을 받아 간다. 홍보할 사항이나 나누고 싶은 일 있으면 더 자주 나간다. 돌아보면 딱히 종교생활을 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디를 가더라도 몇 년간 열심히 다니는 척 잘한다.

―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영등포마을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사단법인 영등포마을은 영등포 최초의 마을 법인으로 ‘호혜적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고 주민의 자치 역량을 키워나가는 활동’을 하는 곳이다. 주민자치를 위한 다양한 민주시민 교육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 예산이 얼마이며 어떻게 쓰이는지 등 민주주의를 준비하고 실현하는 모임을 갖는다. 지역의 공익활동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영등포 관련 의제가 있을 때 공론장을 마련한다.

―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데까지 어려움은 없었나?
앞서 말했듯, 처음 시작은 ‘영등포마을넷’이라는 모임이었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마중물로 공방 하는 분, 작은 도서관 하는 분, 북카페 하는 분, 딱히 공간 없이 모임 하는 분들끼리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안부도 묻고자 시작했다. 그런데 고유번호증만 하나 있는 네트워크로는 서울시나 영등포구와 연계하는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물론 법인을 준비하는 게 수월하진 않았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더 어려웠다. 법인을 만들 때 기본 재산으로 5천만 원이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마침 비영리 공익단체에 한해서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서울시 조례가 생겨 겨우겨우 법인을 만들 수 있었다. 

― 마을사업이라는 게 회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 시·구에서 위탁받은 사업을 진행할 때는 돈과 관련한 갈등도 많이 발생한다고 들었다.
내공이라고 하나? 그런 갈등을 풀고 해결하는 노하우가 부족한 것을 자주 느낀다. 사람들간 뒷담화도 정말 많았는데, 어느 순간이 지나면 오해는 풀린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서로 인정하는 틈이 생기면서 또다시 만나게 되고. 누군가 삐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그게 해결되면 돌아올 수 있다. 내가 회장이나 대표로서 노력하는 부분은 그런 논의들이 공적인 테이블에서 진행되게 하는 거다. 화난 분들도 회의에 나와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다. 공적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말하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사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이익이 더 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엄청 미운 사람이지만 공동체에 필요하다면 그와 같이 협력하는 길을 모색하려고 한다. 스스로 담대하게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런 마음의 힘이 절실하다.

   
▲ 영등포산업선교회 다람쥐회 파티에서 가족들과 즉석 공연 중


― 시·구와 협업하는 건 어떤가? 
2014년부터 영등포구와 협업해 왔다. 서울시 정책과 영등포구 정책이 다르고, 정책과 실무 공무원은 또 다르다. 공무원들은 시민들을 오랜 시간 ‘민원인’으로만 봤기 때문에, 시민이 ‘자치’를 한다는 것에 불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시에서는 구와 자치단체가 매칭이 되어야 돈을 지원하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 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구조적인 지원 없이 우리끼리 해보려고도 하는데, 그러려면 서로 돈도 내고 마음도 보듬어야 하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참 어렵다. 

― 여러 곳의 장(長)을 맡고 있는데, 고정 수입이 있나?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하지 않나. 마을활동가가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면 안 된다.(웃음) 고정 수입이 있는 곳은 한 곳뿐이다. 도시에서 존엄을 유지하려면 이런 카페에 와서 일하면서 커피도 한 잔 마셔야 하는데…, 뭐 그 정도는 된다. 돈을 번다고 말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활동 유지비 정도’라고 해야겠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둘 있다. 학원까지 보낼 돈은 없어서 회의 때 데리고 다니곤 하는데, 남들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버지로 봐주더라. 궁상이 한 끗 차이로 뭔가 있어 보이게 되는…. 어찌 보면 사실 자발적 백수다. 하기 싫은 일은 안 한다.

― 어쩌다 ‘이런’(?) 길에 들어섰나?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다 보니까 이 길을 걷고 있나 보다. 사실 나는 돈 걱정 안 하며 자란 미국 유학파다. IMF 때도 아무런 걱정 없이 미국에서 계속 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공부도 별로 열심히 안 한 것 같다. 자유롭게 살았다. 가족들은 대구에 있었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으로 미국에서 자유를 누렸다. 원래 한국에서 전공은 전자공학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사회복지(Socal Work)를 전공했다. 아버지는 이해를 못 하시더라. 사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는데, 사회복지를 공부한다고 하니까. 그래도 결국 졸업하고는 한국에 돌아와 아버지 회사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때가 사실 이쪽 길로 들어선 계기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노동자에게 하는 행동들이 거슬렸다. 회사에서의 아버지 모습을 처음 본 것이었는데, 노동자를 하대하거나 부품처럼 여기는 듯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이유가 경쟁사를 이기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건데…, 그 결과로 내가 혜택을 입고 있었던 거다. 그동안 내가 저분들 희생으로 유학도 가고, 누리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 지원이 딱 끊기면서, 세상이 만만치 않구나 절감한 것 같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 집 전전하며 살다가 친구 소개로 여의도에 있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러다 결혼까지 했다. 회사도 옮겨 봤지만, 출퇴근하고 야근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런 일을 하게 됐다.

― 돈 걱정 안 해본 ‘유학파’였기에, 불의를 합리화하며 편하게 살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내 성정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릴 때부터 불평등에 관한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고 하시더라. 회사에 다닐 때도 이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런 문제들이 대통령이 한 사람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항상 의문이 있었고, 마을과 지역 차원에서부터 변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같았다. 그래서 계속 문제제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본격적으로 마을활동을 한 건 2012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마을공동체지원사업을 진행하면서부터다.

― 불의를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층위의 역할이 있다. 요즘엔 마을활동, 시민운동을 하다가 공무원이 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고위 공무원이 되면 일을 더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는 부분도 있겠고.
그런 측면도 분명 있을 거다. 그런데 마을활동가로 열심히 하다가 공무원 된 분들이 오히려 마을 주민의 입장을 더 몰라주는 경우도 있어서 아쉽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조직과 구조에 몸담고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진정성을 갖고 출발했다고 믿는다. 정치인들도 다 처음엔 좋은 생각, 숭고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거다. 그들이 결국 정치를 ‘이권을 갖고 이권을 나눠주는 것’이라는 인식을 전 국민에게 퍼뜨린 주체 아닌가. 나는 정치가 더 일상의 영역에서 논의되고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마을에서, 더 미시적인 관계망을 통해 일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더 미시적인 집안일부터 잘하라’고 충고하겠지만.(웃음) 불의와 불평등을 없애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여러 차원의 접근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공무원으로, 누군가는 노조활동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소수자 운동으로…. 나는 마을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마을활동가로 살아간다.

   
▲ (사)영등포마을 주최 주민자치학교 포스터

― 회장으로 있는 신용협동조합 다람쥐회는 어떤 곳인가?
자료를 찾아보면 여러 설명이 있겠지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설명하는 게 좋겠다.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 내에 1973년 당시 인가받은 재무부 1호 신용협동조합이 있었다. 1960-70년대 여공들이 산선에 와서 공부도 하고, 노래도 배우고, 은행에 갈 시간 없으니 여기서 돈을 모은 게 시작이고, 그 모인 돈을 새로 오는 이에게 보증금으로 빌려주고 하면서 1969년에 신용협동조합이 만들어진 거다. 조합원 700명, 총금액 1,700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산선이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면서 정권에 위협이 되는 조직으로 찍혔고, 1978년 신용조합법 위반으로 관련 목사가 불구속 입건되기도 하고 조합원 명부를 제출하라고 하는 등 탄압이 있었다. 계속 버티다가 신용협동조합 인가가 취소되어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미인가’ 신용협동조합을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된 건데, 그 이름을 ‘다람쥐회’라고 지었다. 

― 왜 하필 다람쥐였나?
겨울에 다람쥐는 도토리를 많이 먹기도 하지만, 봄에 먹으려고 땅속에 숨겨둔다고 한다. 그런데 봄이 되면 어디 숨겼는지 잊어버린다는 거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 덕분에 도토리가 싹을 틔워 숲은 울창해진다. 우리가 우리 돈을 모아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생태계를 만들자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 이름으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1970년대부터 시작된 오랜 신용협동조합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다.
당시 기준으로는 돈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큰 돈은 아니다. 사회도 급격하게 변하고 영등포에 공장도 줄어들면서 여공들도 다 이사를 갔다. 그분들은 이사를 가면서도 돈을 빼 가지 않았다. 다람쥐처럼 돈을 넣은 것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다람쥐회가 존속되어야 할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산이 유지되면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쯤, 무엇을 해야 하나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그때 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다람쥐회는 다양한 공동체와 협동조합이 시작되는 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제 역할을 했다. 의료생협 만들어지는 데 출자금도 많이 내고, 협동조합 시작하는 분들에게 돈도 많이 빌려줬다. 교육모임, 공동식당, 반찬가게, 노숙인 저축사업 등을 지원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마을의 모임이나 사업을 돕는 다양한 정책이 생겨서 다람쥐회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도 다양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더 이상 우리를 찾지 않는다. 각자 영역에서 만들어갈 수 있게 된 거다.

― 서로 자립해가는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
오히려 각자 살아내기 바빠진 거로 보인다. 처음 생각은 서로 잘 되면, 출자금에 따른 배당금이나 대출금에 따른 이자 수익도 더 잘 들어올 줄 알았다. 그렇게 관계망도 더 넓어지고 교류의 밀도도 높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각자의 협동조합에 빠져서 연대가 더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안타깝다. 외국에 사회적 경제가 잘 이뤄지는 곳을 가보면, 핵심은 신용협동조합이다. 신용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탄탄하게 지원하고 어느 정도 안정된 수익구조를 만들면, 다시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다. 반면, 다람쥐회의 경우 점점 고리가 약해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시대와 조응하지 못하는 화석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조건이 맞지 않아서 다른 협동조합처럼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도 없다.

   
▲ 상가임차인 권리상담소 (사진: 이용희 페이스북)

― 좋지 않은 상황인데, 회장을 맡았다. 
다들 안 하려고 해서 내가 맡았다.(웃음) 장기연체 조합원에게 전화 거는 게 회장의 주된 일이다. 2010년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산선에서 밥상 모임을 열었다. 그 밥상 모임 통해서 선배 마을활동가들도 알게 되고 산선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가 다람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재정 상황도 알게 되고, 안정적 운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회장이 되면 뭔가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안정적 운영하면서 새로운 일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렵다. 이제 임기가 1년 남았다. 내가 다람쥐회의 설립 목적 중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행위로 한 사람의 경제적 곤경을 모든 사람이 나누어진다.” ‘구체적인 행위’라는 표현이 참 좋다. 그 행위를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발현할 것인지 찾는 중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활동했던 분들과도 매달 만나 이야기 나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지난 산선 60주년 토크쇼 때 패널로 나와 다람쥐회를 언급하던 중 울컥하셨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는데, 그 끊어진 이야기를 더 해줄 수 있는지?
다람쥐회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신용금고’였다. 앞서 말했듯 내가 하는 일이 장기 연체 조합원에게 전화해서 돈 갚으라고 말하는 거다. 계속 연락드리면, 그래도 돈을 일부라도 갚으신다. 그분들 형편 들어보면, 오히려 우리가 돈을 더 빌려드려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신다. 다람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분들 도우라고 그렇게 하시는 건데, 그런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행정적으로는 어쩔 수 없더라도, 우회적으로 누군가 또 그런 분들 사정을 알고 돕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기억들이 밀려와서 울컥했다. 자주 울컥한다.

― 지금 또 울컥하시는데, 그런 신뢰의 경험들이 일을 해나가는 동력이 될 것 같다.
지역의 여러 소규모 공동체가 형성되고 이것저것 재밌는 모임들도 생기는 중인데, 결국 관건은 신뢰 관계를 어떻게 만드느냐다. 그 관계의 제일 마지막은 돈이다. “해줄게” “노력할게” 같은 말잔치로는 절대로 맺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저 사람은 나에게 돈을 갚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 그 밑바닥 신뢰를 나는 다람쥐회에서 배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지만 저 사람은 어떻게든 돈을 갚을 사람이라는 신뢰다. 돈과 관련한 신뢰의 경험이 있어야 그 관계가 견고해지는데, 갖가지 협동조합운동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 현실에 두 발을 디디지 않은 운동은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적 경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고는 어렵다. 기반을 다지지 않고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다.

― 사회적 경제란 곧 신뢰다?
사회적 경제는 결국은 얼굴을 보고 하는 경제다. 관계망의 신뢰가 교환가치가 되는 경제이다. 그래서 마을활동에 사회적 경제는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신용협동조합에 돈을 모으는 조합원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일상에서 만나기도 한다. 서로의 얼굴은 물론 상황도 알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서 빌린 돈은 그 어떤 은행에서 빌린 돈보다 소중하다. 반드시 갚아야 되는 돈이자 신뢰다. 생협에서 쌀을 살 때 그 쌀을 농사지은 조합원 얼굴을 생각하면 조금 비싸도 기분 좋게 살 수 있다. 그래서 골목상권부터 시작하는 사회적 경제가 필요한데, 벌써 골목 구석까지 대형마트표 슈퍼와 편의점이 들어와 있다. 안타깝다. 

― 마을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수익 구조가 안정적이어야 할 텐데…, 지금은 정책에 기대야 하는 현실이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도 늘 수익 구조를 고민한다. 결국은 서로 내어주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믿음이 만들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수익구조가 갖춰지리라 본다. 그런 신뢰의 관계는 자신이 살고 있거나 생활하는 지역에서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마을활동’이라 부른다. 정책도 이런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활동비를 책정하고 있고, 나도 그런 정책으로 풀타임 활동을 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공익활동가들도 많이 있었다. 주민자치위원회 총무, 새마을부녀회 회장, 자원봉사단체 사무국장 등 각자 생업은 있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어 지역을 살피는 분들이다. 그러다가 선거운동에 나오기도 하고, 공공일자리를 맡기도 하고 그럭저럭 활동을 이어가신다. 개별적으로 만나면 모두 좋은 선배들이라 생각하지만, 일부는 자기를 그 자리에 있게 한 주민이 아닌 그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에게 귀속된 활동을 한다. 그렇기에 마을활동이 폄하되고 점점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한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할 말은 하는 스타일 같다. 지난 토크쇼 때도 “목사님들이 회의 때 말을 좀 줄이셨으면 좋겠다”고 일갈했었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어려워한다. 구청의 ‘높은’ 사람들 만나도 내가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민들을 대표해서 대변하러 간 자리이기에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것인데,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공무원은 엄청 큰일이 터진 것처럼 안절부절못한다.

― 열흘 전, 김건호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함께 활동했을 텐데, 어떤 분으로 기억하는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김 목사님을 많이 만났다. 관계가 아주 깊진 않았다. 일과 관련한 이야기, 돈 어떻게 모아서 누구를 어떻게 도와줄 건가 이런 식의 이야기만 주로 했다. 서로 어떻게 먹고사는지 이런 거 말할 기회는 없었다. 김 목사님은 주로 ‘중재자’ 역할을 많이 했다. 격론이 벌어질 때에도 중재를 하셔서 답답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기계적인 중립이 아니라, 변화를 어디서부터 꾀하는 게 좋을지 신중하게 들여다보신 거다. 이제는 그런 분이 안 계시니 걱정이 된다. 목사라기보단 활동가로 인식을 더 많이 했다. 낮아짐이 몸에 밴 분이었는데, 그분의 품성과 덕목은 예전부터 빈민운동을 하시면서 훈련받아 만들어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런 교육을 받을 곳이 없다. 그래서 그런 품성과 덕목을 교육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목사님과 함께 만들어보자고 이야기가 됐었는데….   

― 마을활동가들이 갖춰야 하는 덕목과 품성이라면?
언어로 딱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거칠게 예를 들자면, 빈민운동을 할 때는 그들의 언어로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필요한 운동을 만들어 가야 한다. 김 목사님도 노숙하는 사람들 이야기에 맞추어, 그분들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분들 차원에서 중요한 것부터 일이 진행된다. 전문가들 보기에는 답답하고 황당할 수 있다. 이런 접근은 시민운동의 한 버전이다. 지역사회 조직화(community organizing)의 창시자로 알려진 솔 앨린스키(1909-1972)는 빈민들을 어떻게 먹이고 어떻게 시민으로 키울 것인지 고민하며 지역사회 조직가를 전문적으로 양성했다. 당시에는 우파와 좌파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같은 이들이 이런 버전으로 운동을 시작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앨린스키가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다. 그가 쓴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cals)도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았던 이들이 미국은 물론 세계로 흩어져 어두운 지역사회를 조직한 거다. 한국 산선에도 그런 모습들이 남아 있는 것이고. 김 목사님도 이런 교육을 받았다. 나도 그 버전이 옳다고 본다. 마을을 조직화해서 정당 활동을 통해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활동가들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 맞는 방식인지는 고민이다.

―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겠다. 결과가 쉽게 보이지 않는.
김 목사님이 일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언제 수익이 나나’ 답답하게 지켜본 적도 있다. 나도 아직 성급한 거다. 목사님은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자원과 시간을 거듭 투입하다 보면 스스로 굴러가는 힘이 생긴다는 믿음을 갖고 나아갔다. 이런 것들이 다 마을활동가가 갖춰야 할 덕목과 품성이다. 이런 버전의 지역 활동, 마을사업이 많아져야 정책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생긴다. 

   
▲ 제물포 서부간선도로공사 지하수 유출관련 기자회견 (사진: 이용희 페이스북)

― 마을공동체를 실현해 갈 때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 있나?
공동체 만능론으로 들릴 거 같아서 덧붙이는 말인데, 사람들이 모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영등포구에는 다양한 재래시장이 있는데 하나의 상인회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곳은 한 시장 안에 심지어 4-5개 상인회가 있다. 상인회가 있는 건 좋지만 서로 싸우고 서로의 이권만을 지키기 위해 상인회가 만들어진다면, 그 시장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동체 내의 문화가 중요하다. 우리 상인회 일원만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상인회가 아니라 다른 상인회, 다른 공동체와 어떻게 조우하고 함께 공익을 위해 협력할 건가를 고민하는 문화를 일구어가야 한다. 공동체 안으로부터 그런 문화를 차근차근 만들어 놓아야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닌 좋은 사회를 만드는 공동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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