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호 커버스토리] ‘무대 뒤’의 운동가, 경영 컨설턴트 황병구 (재)한빛누리 상임이사

   
▲ 황병구 한빛누리 상임이사겸 본부장 ⓒ복음과상황 이범진

기독 비영리단체(NPO)의 역할과 과제를 듣고자 공익경영센터 NPOpia 설립과 운영을 기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황병구 한빛누리 상임이사겸 본부장을 찾았다. 그는 십수 년 동안 10여 개 이상의 기독 NPO와 실무자들을 직·간접적으로 꾸준히 지원해 왔기에 누구보다 기독교 NPO 운동의 생태계를 잘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서울의 기온이 40도까지 치솟은 8월 1일 한빛누리 사무실을 찾아, 비영리 운동가이자 경영 컨설턴트로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NPO가 처한 상황과 과제, 한국교회와의 연대, 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본지 264호(2012년 11월호) <연중기획: 87년형 복음주의여 안녕> 인터뷰 이후 6년만이다. 당시 기윤실, 성서한국 등 15개 기독교 NPO에 이사나 감사 등 여러 모양으로 관여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가.
다행히 더 늘어나진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단체에 관여하고 있다. 몸으로 뛰는 일은 좀 줄었다. 젊을 때는 직접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일이 잘 되고 있는지 살피는 입장이다. 이제는 등기이사를 할 정도로 나이가 들었고, 그전엔 드물었던 감사 역할을 많이 하고 있다. 특히 교회재정건강성운동에 참여하면서 감사 역할이 늘어난 거 같다. 주로 운영의 합리성이나 책무성, 투명성을 살피고 있다.

― 소위 복음주의 NPO들을 지원하고 돕는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회전문 인사’(?)이기도 한데,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들을 것 같다.
일을 부탁하는 쪽에서는 그런 말이 안 나오고, 집이나 가정교회 공동체에서는 일을 말리는 분위기이다. 확실히 한 사람이 여러 단체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슬픈 특징이다. 정확한 건 제대로 조사해봐야겠지만, 직관적으로 보면 ‘책임 구조’로 운동을 하던 시절, 그러니까 일생을 걸고 운동하던 세대와 이제는 운동을 직업으로 혹은 자원봉사로 하는 세대의 차이가 반영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연령으로 구분하긴 어렵지만 지금 40대 초반들은 자기 운동을 했다기보다는 ‘불려 와서’ 일한 사람이 많았던 것도 같다. 좀 비극적인 건 우리 세대는 떠나기도 어려웠다. 뭔가를 같이 책임지자고 할 때, 정서적으로 피해가기 어려운 일종의 ‘품앗이’ 문화가 있다. 사실 기업 구조에서 이사나 감사는 어떤 경력이나 기여가 있고, 그래서 돈을 주고 모셔온다. NPO는 좀 다르다. 이사들이 돈도 내고 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까진 명예직이라기보단 결정적인 일에 품을 들여야 한다.

― 학부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노래운동 ‘뜨인돌’의 작곡가이자 연출가, 선교한국대회의 무대연출가로도 활동했다. CTS PD로도 일했고, 뒤늦게는 미국에서 MBA를 공부한 뒤 한빛누리 전문경영인으로 돌아왔다. 개인적인 질문일 수 있는데, 그 선택들에 지금도 만족하는가?
지금까지 내가 줄곧 해 온 역할을 늘 ‘무대 뒤’(back stage)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서기를 했고, 교회나 선교단체에서는 회계나 총무를 맡았으며, 공연단체에서는 연출을 했다. 돌아보면 축적된 부르심 아닌가 싶다. 진로 전환을 생각할 때도, 공학을 계속하면 교수로서 이름을 걸고 강의나 연구성과를 끊임없이 내야 할 거라는 부담이 있었다. 그렇다고 신학을 한다면 ‘무대 위’에서 설교자로 서야 하는 게 걸렸다. 계속 ‘무대 뒤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경영학을 선택했다. 한빛누리 재단은 부정적으로 보면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고 좋게 보면 플랫폼인데, 중간지원조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좀 어려운 개념으로는 ‘메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뒤에’ ‘너머서’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메타 운동은 후위에서 어떤 운동을 지원하는 운동인 거다. ‘NPO를 위한 NPO’라고 할까. 이를테면 일반 영역에서는 연구소, 도서관, 법률자문 같은 것들인데, 인프라를 통해 본령이 되는 운동을 지원하는 일이다. 지금 하는 이 일을 선택한 것도 무대 뒤 운동을 하기에 적절해서였다. 내가 한빛누리에 참여할 때는 이런 메타 운동 그룹이 너무 없었고, 개교회나 목회자가 지원을 해주는 구조가 대다수였다. 문제는, 그런 지원 구조는 교세가 줄거나 목회자가 교체되면 끊기기 쉽다는 거다. 게다가 목회나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이 사회적인 운동을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메타 집단이 활성화되어야 앞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애초에 미국으로 MBA를 공부하러 떠날 때부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떠난 거 같다. 비주류 쪽에서 일하다가 CTS 방송국에서 일했던 이유도, 어쨌든 당시는 방송이 주류였으니까 거기 가면 인프라가 받쳐 주지 않을까 하는 모종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CTS 방송국에서 경험한 시스템이라는 것도 사실은 시스템이라고 할 게 없고, 사업에 성공한 기독 기업인, 돈 있는 장로를 거느린 목사 등으로 이뤄진 정치판이었다. 방송을 자신의 기회로 여기는 포식자들이 방송국을 장악하는 이른바 ‘아사리판’이었달까. 그래서 당시엔 경영학을 공부하고 와서 혹 ‘정치 장로’가 된다면 CTS든지 CBS든지 사장이 되고 싶다는 농담을 하곤 했었다. MBA 출신 사찰집사가 되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말도 했었고.

   
▲ "교회가 왜 사회운동을 하지 않는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현재 몸담은 한빛누리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무대 뒤에서 ‘무대 위’를 지원하는 메타 운동이라는 개인 관심사에 부합하는가?
한빛누리는 2004년 12월에 설립됐고, 나는 2006년 3월에 합류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사업은 크게 정림건축 창업주였던 재단 설립자 고 김정철 장로님의 유지를 따르는 일과, 공적 필요에 맞춰서 개발해 온 일,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다. 김정철 장로님은 운영하시던 사업 규모에 비해 개인적으로 부를 크게 축적한 분이 아니었다. 가족들에게도 일부 남기고 직원들에게도 자사주로 분배하고, 또 일부 유산은 공적 필요를 위한 재단 설립에 기탁했다. 그중 한빛누리 재단은 기독교 선교를 위해 세워진 재단이고, 건축문화진흥을 위한 재단도 있다. 설립자의 유지 중 하나는 북한의 다음 세대를 돕는 일로, 그중에서도 한국교회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상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남북 민간교류가 끊긴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우리 나름의 방법으로 교류하면서 전체적으로 급감하던 인도적 지원을 계속 늘려 왔다. 그래야 남북 관계의 해빙기에 곧바로 교류가 활발해질 수 있으니까. 이뿐 아니라 어린이 교육과 관련하여 기독교 교육관에 근거를 둔 어린이집을 직영하며 육성하기도 했고 콘텐츠를 전수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역시 교회의 정체성으로는 하기 힘든 일들, 기독교 NPO를 위한 변혁적 메타 운동을 해왔다. 독자적인 모금시스템을 개발·운영하기 어려운 기독교 NPO들을 위한 공동모금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 그 공동모금 시스템의 기획자이자 창안자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나는 전산 시스템에 대한 선이해가 있었고, 금융·재무·법률 관련해 통합적으로 단체를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생각해냈다. 이 공동모금 시스템을 통해 독자적으로 후원 모금을 벌이기 어려운 작은 단체들이 큰 단체들에 준하는 공신력 갖도록 돕고자 했다. 2007년에 기독교 대중 후원자들과 운동 단체를 연결하기 위해 처음으로 실험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교회개혁실천연대와 성서한국 두 단체가 시스템을 활용했다. 지금은 50개 단체가 사용하고 있고, 러빙핸즈나 공익법센터 어필처럼 ‘명예졸업’(독립)을 한 단체들도 있다. 공동모금 시스템을 활용하여 운영되다가 이제는 독자적으로 법인화했거나 모금 시스템을 구축해서 운영되고 있어 ‘명예 졸업’이라 부른다.

― NPO 운동을 지원하고 관련 실무자를 교육하는 공익경영아카데미(현 공익경영센터 NPOpia)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한빛누리를 기반으로 하는 메타 운동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공익경영아카데미(공경아)다. NPO들의 재무 관련 문제를 공동모금 시스템으로 접근했다면, 공경아는 NPO의 인사와 교육 문제에 대한 접근이다. 나는 종종 기독교 안팎의 NPO 판을 보면서 장기판의 ‘마상포차’(馬象砲車)가 없다는 말을 해왔다. 인력 구조에서 균형이 깨져 있는데, 세대와 젠더가 분절되어 있다. 대부분 5060세대 남성 대표와 2030세대 여성 실무자가 짝이 되어 일하는 구조로, 그 사이에 3040세대 경력직이 없는 상황을 늘 목격한다. 운동을 처음부터 돌파하면서 끌고 온 개인을 빼놓고는 마상포차가 없고 사(士)와 졸(卒)만 있다. 이는 인력 구조의 문제, 곧 인사 이슈다. 그래서 빈 자리를 어떻게 메워야 할지 리서치를 해왔고, 아카데미를 시작한 것이다. 올가을이면 공경아는 ‘공익경영센터 NPOpia’로 ‘명예졸업’한다. 2008년에 사전 연구를 병행하며 ‘공익혁신아카데미’라는 이름을 걸고 시작했지만, 이 일이 활성화된 것은 2013년부터로 올해까지 5년 정도 운영되어왔다.

   
   
 

― 공경아의 지난 5년을 평가한다면?
지금까지 교육생을 6기까지 배출했다. 성비는 여성이 조금 많았다. 다만 최근 해외연수 1기만 보자면, 여성 실무자가 1명으로 성비 불균형이었다. 할당제를 통해서라도 여성 실무자의 참여를 더 독려했어야 했는데, 1기 해외연수는 성사 자체에 목적을 두어서 성비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중견 실무자보다 비교적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있는 현직 대표군이 참여했다. 단체들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냉정하게 말해 앞으로 공경아의 수요는 대폭 확장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수료자나 동문들이 어떤 집단력을 발휘하는 단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공경아에서 배운 것들을 자기 자리에서 개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콘텐츠 측면에서는 개인과 조직의 성찰과 성장을 위한 내용으로서 이미 객관적 검증이 되었다고 본다. 공경아를 수료하고 나서 NPO 일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정리한 분도 있는데, 이는 오히려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맞지 않는데도 계속 일을 하다가 회복 불가능한 어려움을 서로 겪기 전에 미리 분별이 되어 자기 길을 걷는 것이 낫지 않은가. 올 가을께 공익경영센터가 독립하면 전임자도 세우고 공간도 마련하고 법적 정체성도 갖추게 된다. 

― 그간 일련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지원하면서 지켜본 한국 기독 NPO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나.
직관적으로 본대로 말하자면, 일반 교회가 해야 하지만 못(안)하는 일들을 기독 NPO가 여전히 감당하고 있다. 시민운동인 기독 NPO들이 일종의 ‘패러 처치’(para-church, 교회동역단체)로 존재해 왔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다. 교회가 못 하는 일을 해왔다. 정부나 기업이 못하는 일을 NGO(비정부기구)와 NPO들이 하는 것처럼 교회가 못 하는 일을 기독 NPO가 하는 거다. 제자훈련이나 예배운동, 해외선교는 교회 밖에서 진행되다가 교회 안으로 상당 부분 들어갔는데, 시민사회운동은 교회 성장에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서인지 교회가 나서지 않는다. 그러니,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하던 사람이 계속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교회가 왜 사회운동을 하지 않는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나마 온누리교회나 삼일교회 같이 배우려고 하는 지역 교회가 사회운동에 좀 더 나서도록 격려하고 압박해야 한다. 나도 한빛누리에서 교회가 못하는 일을 해온 셈인데, 이런 상황 자체가 균형이 깨진 교회의 사역 구조에 대한 직면이기도 하다. 목양, 제자훈련, 문화사역 같은 분야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왜 공공의 영역인 시민사회운동만 멀찍이서 관망하느냔 말이다. 신학교 교과목을 통해 인권 감수성도 가르치고, 제자훈련 과정에는 젠더 감수성을 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이라는 날개를 포기하면 균형을 잃어버린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제 교회(에 대한 노력이나 기대)는 포기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꾸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맞지만, 특정 개체의 생존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게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지만, 나들목교회(김형국 대표목사)는 교회 안에 ‘사회변혁센터’를 두고 있고 이사님이 책임을 맡기도 했다. 이런 모델이 확장될 가능성은 없는가?
물론 기성 교회 중에 그런 일을 할 교회를 설득하고 요청하고 연대해서 함께할 수도 있다. 이를 성서한국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선교’의 모양새가 될 테고 ‘사회선교사’를 공식 파송하는 것으로 가시화할 수 있을 거다. 내가 속한 나들목교회에서도 사회선교사를 파송하여 활동을 공식 지원한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신경 쓸 수 없다면 연대 모델을 구축해서 진행할 수도 있겠다. 교회는 고향 집이나 엄마 품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시민사회운동을 지지하는 형태로 가는 모델 말이다.

― 기독 NPO들의 소위 사업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복음과상황>(복상)을 놓고 생각해보자. 복상 같은 매체운동이 사업적으로 꼭 성공해야 하는가? 과거 복상이 비즈니스 측면에서 누적된 적자로 인해 폐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복상이 사업(business)이 아니라 운동(movement)이자 사역(ministry)이라고 설득하면서 폐간에 반대했다. 다른 예로, 과거 출판 시장이 그나마 괜찮았을 시기에는 선교단체 산하 출판부가 낸 수익을 모 기관으로 기부하는 구조였는데, 지금은 적자를 면하기 쉽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 선교단체의 출판운동을 맡은 출판부는 사업적으로 수익을 내지 못하니까 문을 닫아야 하는가? 아니다. 해당 출판부가 여전히 의미 있는 ‘운동’이자 ‘사역’이라면 이제는 다른 부문의 재정에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 사업성과 관련하여 NPO 운동의 ‘지속가능성’ 또한 중요한 이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이 많이 오염되어 있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고 할 때는 숲이 있고 숲 속에 사슴이 있을 때, 사슴이 아닌 숲의 지속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기업이나 개인, 혹은 한 운동이나 개별 NPO가 지속가능한지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개체의 생존가능성(survivabilty)과 그 개체가 속한 환경의 지속가능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맞지만, 특정 개체의 생존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게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 공동모금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전체 판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일이지 개별 단체의 생존가능성을 위한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한 개체의 주기는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다. 미션에 따라서 궤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 한국 사회에서 복음의 공공성과 관련하여 기독 NPO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선, 현재의 주류 교회는 대부분 개혁 대상이라서 논의의 주인공이 되기는 어렵다. 기독교 NPO는 주지하다시피 한국 교계에서 소수이고, 수치로 따지면 굉장히 미미하다. 최근에 꽤 오래 전 SNS에 남긴 글을 다시 본 일이 있는데, 2007년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에 낸 광고였다. 대선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편향된 설교를 해온 목회자들에게 복음주의 NPO 관계자들이 예언자적 경고를 보내는 광고였다. 수백 명의 이름이 연대 서명인으로 적힌 광고였는데, 그게 당시로선 결코 대세를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남길 필요가 있다. 교계에 큰 경종을 울리지는 못하겠지만, 손봉호 교수님의 ‘선지자적 비관주의’처럼 그럼에도 마땅히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던 날, 그 광고를 다시 SNS에 올렸다. 볼 수 있는 목사님들은 다시 보라고. 그 광고를 역사의 증인처럼 남겨서 교회가 내지 않는 선지자적 목소리를 다시 내는 것이다. 이상향을 목표로 삼는 것은 좋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큰 경종을 울리고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기독 NPO 운동도 있겠지만 말이다. 

― 앞서 지난 6월에 있었던 공경아 해외연수 1기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인솔 교수로 동행하면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마이크로크레딧 기관에 소액 대출을 해주는 비영리 기관인 ‘키바’(Kiva)가 기억에 남았다. 키바를 방문했을 때, 단체 소개를 인턴이 맡아서 한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단체 대표는 아프리카에 가 있고, 2년 여 일한 인턴이 별 어려움이 자기 단체 소개를 잘 해내더라.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조직이 인턴에게 대외적인 소개를 맡길 정도로 인턴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는 점이 와닿았다. 그 인턴이 소개한 내용은, 자기 단체와 조직 구조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20명을 앞에 두고 설명을 잘하더라. 적절한 트레이닝과 신뢰, 그리고 위임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러한 조직 문화가 기억에 남았다. 그런 기회를 통해 인턴이나 신참도 자기 단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고, 아울러 스스로 성장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우리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힘써야 하는 점 아닌가 싶다.

― 과거 복상 인터뷰에서 “미답지를 향하는 일관성”으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근래 새롭게 눈에 띈 ‘미답지’는 없나.
한빛누리가 내게는 도전의 자유가 있는 그런 미답지였고, 4년 전부터는 아내와 함께 ‘꽃친(꽃다운친구들) 운동’을 병행해왔다. ‘꽃친’은 중학교 졸업 후 1년간 고등학교 배정을 미루고 봉사와 여행, 친구 사귀기와 놀이 등으로 자기 탐구와 자기 호흡을 돕는 1년간의 방학생활 공동체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새로운 스토리들이 생기고 있다. 다른 인생의 결을 살아온 친구들이 인생의 여러 문제를 안고 나를 대화 파트너 삼아 찾아온다. 그들을 만나 고민들 듣고 조언을 해줄 때 그동안의 내 삶의 궤적이 도움이 된다. 청소년인권운동(꽃친), 교육운동(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기독교개론 강의(서울여대) 등의 경험들이 요즘 만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싶다. 회사 경영에 관한 조언을 구하는 친구도 있다. 영리 기업의 경영자들도 관계나 자기 극복에 있어서 한계에 부닥치는 순간이 오는데, 마치 청년들이 진로 고민하듯이 ‘회사를 그만 접어야 하나?’ ‘직원을 해고해야 하나?’ ‘손실을 계속 감수해야 하나?’ 등의 외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들에게 대화 상대나 조언자가 되는 일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상인데, 그런 일들이 잦아진다. 그런 점에서 결국 미답지는 내가 개척하는 게 아니라 나를 찾아온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청년 때는 내가 주도적으로 개척했다면, 지금은 새로운 사람과 상황이 나를 찾아온다.

― 근래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상황 역시 ‘무대 뒤’의 일인 듯싶다.
지금은 ‘공공재’로서의 삶을 생각한다. 내 삶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인데, 컨디션이 좋을 땐 그나마 괜찮은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굉장히 힘들다. 에너지가 많이 모자랄 땐 ‘인생이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젠가 누가 농담처럼 내게 “정체가 불분명해서 어떤 직함도 붙일 수 없는 사람”이라면서, 차라리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 문제가 한번에 해결될 것 같다”고 말하더라. 맞는 말 같다. 예전에 진로를 바꿀 때에 반대하시던 아버지에게 “목사나 선교사는 아닌데 그분들이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정확히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한다.

진행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정리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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