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故 김건호 목사를 추모하며

   
▲ 유투브 영상 갈무리

바울을 떠올려보자. 그는 예수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지금만큼 매체나 언론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바울은 늘 아웃사이더였다. 예수와 함께 살았던 사도들과 교회는 처음에 바울이 예수를 안다고 말했을 때, 의심부터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바울, 당신이 예수에 ‘관해서’ 대체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 밥상을 한 번 같이 앉은 적이 있느냐,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느냐? 더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기나 했던 자가 어떻게 예수를 알고 전한다고 말하느냐?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그렇게 사도를 중심으로 한 예수운동의 중심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자기들 공동체를 ‘안으로-안으로’ 조직해 갈 때,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와 떨어진 이방 지역에 예수를 전했다. 정확히는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이방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와 함께했다. 고향으로부터 흩어져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린 공동체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그의 죽음과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 그들의 입장과 처지에서 설명해주는 괴짜 사도가 바울이었다.

예수를 찾아 ‘밖으로’

얼마 전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던 김건호 목사도 바울과 유사한 점이 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교회라는 안락하고 안전한 터전에서 예수를 찾고, 성경(텍스트) 안이라는 확실하고 빛나는 구원을 논할 때, 그는 바깥에 있는 예수와 텍스트를 찾아 헤맸다. 사도 바울이 한 교회에서 머물며 세력을 구축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며 사역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나갔듯이, 김 목사 또한 어떤 한 곳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유랑민처럼 새로운 꿈과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가장 먼저는 산동네 아이들과 함께하는 ‘작은 나무 공부방’에서 손을 보탰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스스로 ‘암하아레츠-도시빈민선교회’라는 서클을 조직하여 곧 ‘땅의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위 ‘하늘의 뜻’을 구하는 척하며 슬그머니 자기 주머니나 챙기는 사람들과 애초부터 결별한 것이다. 이후 신대원에서 지역사회선교회를 조직하고 신림동의 신양교회를 거쳐 일산두레교회의 개척 멤버로 사역하기까지 그는 늘 그 바깥에서 머물고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교회는 커져 가고 품이 넓어지는데도 ‘여기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라는 물음이 그의 관심이었다. 이러한 ‘바깥으로의 지향’은 여느 운동의 창립자들이나 초창기 멤버들 마냥 내부에 자리 잡고 단체와 조직을 어떻게 키워낼까 생각하는 관심이 아니라, 변두리 혹은 성문 밖으로 스스로를 반복해서 내치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이사야 11장을 꿈꾸던 사람

‘바깥으로’라는 지향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몽상가였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사실 빈민 ‘운동가’라는 정체성보다는 오히려 빈민들과 함께 꿈을 꾼 ‘몽상가’에 가깝지 않나 싶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그저 무모함의 연속이라 여길 수도 있다. 치밀한 운동가나 가질 법한 운동의 단계들, 차근차근 이것 다음에는 저것, 저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무엇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떠올렸고, 그저 말했고, 그저 움직였다.

그의 행동과 말은 그가 생전에 사랑했던 성서 구절, 이사야 11장의 내용, 곧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는 말들처럼 매우 직관적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그가 그리는 그림들이 정확히 무얼 가리키고 최종적인 그림은 무엇인지 지금도 뚜렷하게 아는 이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우리가 다다르지 못한 세계,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는 어떤 등장인물들과 풍경이 있어야 하는지 늘 상상하고 일러주는 사람이었다. 거기엔 가난한 사람들, 내쳐진 사람들, 온갖 상처로 마음과 몸을 꽁꽁 싸맨 자들이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자기 목소리를 뚜렷이 내는 자유인이 되며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고 내던지는 풍경, 바로 그게 그가 그리는 그림이었다.

앞선 자이나 뒤따르는 자

그래서인지 본디 성향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늘 우두커니 산업선교회관 마당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인 듯 지내고, 그 마당을 묵묵히 거닐었고, 가벼운 농담처럼 한마디 던져도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가 되어서야 그 말의 묵직함을 느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가 협동조합 노느매기 이사장과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원으로 참여하면서도, ‘리더’라 하기에는 다른 이들에 비해 너무나 느긋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실무자들과 조합원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올 수 있고, 공간을 즐길 수 있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까에 대해 늘 강조해왔다. 조직은 어느 정도 성취되면 소멸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듯, 조합원들을 더 채근하여 조직의 성과물을 짜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당신들보다) 자신이 뒤에 있을 터이니 조금 늦게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실패와 좌절로 얼룩져 있는 과거로 인해 지금 또한 뒤처지리라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만의 속도를 지키고 긍정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사람에 대한 이런 무한한 신뢰나 기다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1999년 김 목사가 빈민 사역을 하며 만났던 한 중학생과 겪은 일화는 그가 사람에 대해 어떻게 관점을 바꾸게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부모가 이혼하고 사춘기가 되면서 칼로 부모를 협박하는 등 비뚤어진 삶을 살게 된 한 남자아이를 김 목사가 교회에서 정성으로 돌보았는데, 그 보살핌에 선한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무력감과 마주했을 때, 그 아이가 발화하는 ‘작고 세미한 소리’에 대해 단 한 번도 경청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면하고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일화는 조만간 출판될 김 목사의 생애사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실 빈민 사역의 가장 큰 어려움은 김 목사 스스로 토로하였듯이 ‘끝없는 무력과 절망’과 마주하는 일이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에 대해 동정을 갖기는 쉽고, 구조의 정의로움에 대해 당위를 웅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니면 아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많은 후원과 그들을 위한 번쩍거리는 사업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들을 이용해 간판으로 내세워 대중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소비하도록 하는 마케팅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쉬운 길들을 모두 내버리고 그들이 더 온전하게 스스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도록 좁고 험한 길을 선택했다. 바로 앞선 자이지만, 뒤따르는 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저만치 앞선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걸 이용해 다른 이를 구속하거나 자신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 서비스를 베푸는 자이거나 서비스를 매개하거나 유통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서비스를 받는 그 줄에 함께 그리고 그 줄 맨 뒤에 서기로 선택한 것이다.

남겨진 자들의 몫, 희망

그렇게 가난하고 지친 사람들을 데리고 세상에 없던 그림들을 그리며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그가 이 세상에 육체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길에는 김 목사의 생전 모습처럼 순박한 하얀 눈이 묵직하게 소리 없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한 기억이 있는 모든 사람은 비통해했고,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함께 어깨를 걸머지고 같이 꿈을 꾸었던 공동체는 더없는 슬픔에 잠겼다.

아무도 예상 못한 그의 죽음의 시간과 그가 떠난 빈자리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통증, 부채감, 죄의식 같은 여러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그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그가 영감을 주고 ‘사랑으로 이루었던’ 공동체들과 우리 한 명 한 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최종 목적지가 없을 수도 있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닿을 수는 없을 거라는 ‘비관주의’나 (그것과 정반대로) 한없이 합리적이고 예측적인 추론만으로 미래를 오로지 긍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아예 그런 것들과 별개로서의 ‘희망’, 곧 “예측된 성공과 애초부터 관계없었던 ‘희망’”에 대해서 말이다. 김건호 목사가 늘 그러했듯 최종적인 모양새는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 주변에 작고 세미한 목소리로 실존하는 고통의 현상 속에 감추어진 잠재의 문턱을 하나씩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희망-하기’ 말이다.

김윤동
협동조합 노느매기 청년 활동가이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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