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3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 / 2018년

언젠가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부모가 발언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날’ 이후 수도 없이 반복했을 말을 하던 그는 어느 순간, 말을 멈추고, 허공을 보며 가슴을 쳤다. 고통이 너무 깊으면 언어를 압도한다. 그렇게 언어를 지운 고통을 삼키며 수많은 사람이 모인 그 광장에서 그는 홀로 소리 없이 통곡했다. 그 순간 나는 그 고통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 고통이라는 게 있다. 아니, 대부분의 고통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내 고통을 모른다.”

광장뿐 아니라 곳곳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고통이 자신을 베고, 서로를 찌르는 사회를 살고 있다. 저마다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모자라 고통을 생중계하는 플랫폼이 만들어지고, 그 플랫폼에서 고통은 전시되고, 소비되는 ‘콘텐츠’가 된다. 이토록 고통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고통에 관해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고통의 당사자이고, 피해자인 사회에서 서로에게 닿을 수도, 쉽게 해결의 길을 모색할 수도 없는 고통은 어떻게 서로에게 닿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을 세밀하게 나눠 지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 권김현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학자 엄기호의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의 지질학’이다. 그는 고통의 절대성과 전시성이 횡행하지만 정작 고통의 ‘말할 수 없음’을 간과하는 사회에서, 고통에 함몰되어 겉과 안이 붕괴한 개인들이 어떻게 ‘고통의 곁’을 구축할 수 있을까에 관해 고민한다. 이를 위해 고통 자체의 지층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통이 전시되고 소비되는 사회적 지층을 경유하여,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곁’이라는 지층을 탐구한다. 이렇게 고통의 지층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만나는 고통의 형태는 어떤 모양일까?

고통은 세상에서 나의 고통이 가장 크다는 절대성, 누구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외로움, 이 고통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무의미성, 이 고통은 끝이 없다는 영속성을 자양분 삼아 우리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다. 고통이 깊으면 안(내면)은 곧 붕괴한다. 안의 붕괴는 겉, 즉 관계의 붕괴와 사회의 붕괴로 이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통의 곁’이다. 고통의 곁은 고통의 당사자는 가지지 못한 ‘언어’를 가지게 한다. 이 언어가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안과 겉을 만들고 “고통의 개인화”를 넘어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발견하고 해결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고통의 곁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고통의 곁’에 놓일 또 다른 ‘곁’이 필요하다. ‘곁의 곁’이 없이 ‘곁’만 강조한다면, 그 곁은 붕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의 곁, 그 곁의 곁이 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 고통의 언어를 살리는 게 필요하다. 고통 자체는 말할 수 없지만, 고통의 곁은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 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말을 빌려 ‘해상도’를 높일 것을 제안한다. 사람과 상황을 쪼개어 세밀하게 볼 수 있는 해상도를 높인 사유와 글쓰기는 고통의 곁에 언어를 주고, 그것이 결국 ‘고통의 곁의 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론장’이 필요하지만, 쉽게 정보를 찾고 즉각적인 판결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상도’를 높일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지적처럼 고통 그 자체는 말할 수 없다. 단지 우리에게는 고통에 관해 어떻게 말하고 함께할 수 있을까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 문제를 숙고해야 우리는 고통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고민하다 보면, 이 책 제목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관한 대답이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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