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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일구고 싶다
[342호 커버스토리]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1:23:56 이철빈 goscon@goscon.co.kr

처음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서는 정말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을 계속해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한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문득, ‘잘 쓴 글’이란 어떤 글일까 의문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볼 때,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칭찬받았을 때는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내 방식으로 잘 드러난 경우였다. SNS에 글을 끼적이거나 내가 손편지를 적어 보냈을 때 사람들이 해준 피드백 중에는 의외의 말이 있었다. 글을 쓴 내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고, 그런 말을 하는 내 모습이 글에서 ‘음성 지원된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 서로 간에 진한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느꼈다. 정리하자면, 그 사람만의 가치관, 개성, 분위기, 표현 방식이 뚜렷하게 나타날 때, 다시 말해 ‘자기다움’이 잘 드러나는 글이 잘 쓴 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사진: 이철빈 제공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답게 사는 것, 그것이 정말 잘 사는 것 아닐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답게” 산다는 것만큼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는 말이 없다. 분명히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내가 맞을 텐데, 정작 나는 또 스스로를 너무 모르겠다는 생각, 다들 한 번 쯤 해보지 않았을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나는 뭐가 되고 싶은지, 이건 아닌 거 같으면서도 다른 선택지는 뭐가 있으며,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그런 고민들.

내 10대를 지배한 고민은 그랬다. 나는 나를 모르고, 하고 싶은 것도 흐릿하고, 주어진 선택지도 별로 없는데, 그게 또 마음에 들진 않고, 뭔가 찝찝하고 불편한데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고, 제발 어느 현자가 내 대신 나를 좀 해석해줬으면 바랐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곤혹스러웠던 순간은 희망직업, 꿈, 인생의 좌우명을 적는 시간이었다. 나는 정말 되고 싶은 게 없는데, 공백으로 둘 수는 없어서 대충 적고 남에게는 둘러댔던 기억이 난다.

더 싫었던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었다. 부모님은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 잘 받아서 얼른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들어가고,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집 사고 차 사고, 애 낳고 부모님 부양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범적 삶’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한 번은 내가 그런 삶의 끝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 거냐고, 그러다가 나 죽으면 뭐가 남는 거냐고 물었다가 어린 애가 벌써부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단호한 말만 들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어른이나 친구 중에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던 그 시절은 정말 우울했다. 심지어 삶과 구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교회에서도 이런 고민은 털어놓기가 어려운 분위기였기에, 마침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회의감이 생긴 시점에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로 교회를 떠났다.

회심은 했지만
10대의 통제받는 환경에서 벗어난 스무 살의 대학 생활은 정말 재밌었다. 그중 재미있어 보이는 선배들이 있어 들어갔던 선교단체 활동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신앙은 없었지만 교회 문화는 익숙했던 터라 모임 참석에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신앙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에 푹 빠졌다. 사람이 좋아서 따라다니다가 선교단체 연합 수련회도 별생각 없이 참석했다. 그런데 첫날 설교부터 내가 묵혀왔던 고민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어졌다. 설교를 들으면서 이전에 응어리진 것들이 풀리고 회개 기도가 자연스레 나왔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확고한 정체성, 출발점이 생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뜨거운 수련회’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흔히 경험하는 차가운 시련은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인으로서의 내 삶과 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나의 삶이 어떤 접점을 가질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 나라 등의 개념을 접하면서 ‘보냄 받은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겠다’라는 희망의 빛줄기를 본 것 같으면서도, 대학 생활 내내 진로와 취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자본주의의 정점인 내 전공 경영학이 반기독교적인 것처럼 느껴져서 참 답답했다. “기업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교수님의 질문에 “이윤의 극대화요!”라고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다른 학생들과, 돈만 벌면 위법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국내 대기업들의 모습이 겹쳤다. 돈이 최고인 세상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내 전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나한테 맞는 일인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다. 아예 기독교계에 종사하면 그런 고민을 덜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몸담고 있던 선교단체 간사를 해볼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선교단체 간사를 만만하게 보았던 나의 엄청난 교만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직면하게 되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스스로에게 묻고, 공부할 이유를 찾았다
군대 생활을 전후해서는 스스로 재정비하는 시간이었다. 지난날부터 돌아봤다. 내가 어떻게 자랐고,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여정을 거쳐 지금까지 이르렀는지를 글로 적었다. 그리고 신앙의 내실을 다져가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이며,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고, 내게 어떤 것을 요구하시는지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면서 또 한 번의 회심을 경험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답변을 주신 것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네 이웃은 누구냐?”라고 넌지시 질문하신 누가복음 10:25-37 본문이 새롭게 다가온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이해해온 내용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본문이었다. 나는 왜, 언제 선한 사마리아인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나서 나를 도와줄 건지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도움을 넙죽넙죽 받아먹을 생각만 하고, 내 중심적으로만 어떻게 잘살아볼지 전전긍긍하던 나는 그 비유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나?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 건 아닌가? 나는 왜 “나의” 학업, “나의” 진로, “나의” 취업을 그렇게 고민했을까? 너무 좁고, 자기중심적인 내 성경 이해는 본래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있으며, 내 사고도 제약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강도 만난 자녀,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징병제 하에서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군대 제도 때문에 직간접적 피해를 당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도 진실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 올해 71주년을 맞이해서야 조금씩 진상 규명에 더딘 걸음 내딛는 제주 4.3의 피해자들을 비롯한 비극적 현대사의 수많은 피해자들, 2016년 봄에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의 피해자들, 수많은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 등이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빚내는 청년들’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죄스러웠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장학제도가 잘 되어 있고, 부모님의 재정적 지원도 받은 덕택에 나는 잘 지내고 있었다. 전공이 잘 안 맞는 것 같다거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배부른 투정을 부리면서. 하지만 같은 시간에 누군가는 제발 돈 걱정 없이 학교 다니고 싶다거나, 집 구색은 갖춘 방에 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소망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알바를 하고,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강제당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을 하며 청춘을 갈아 넣는 그들의 상황이 나의 상황과는 극명하게 비교가 되어서 너무 부끄러웠다.

동시에 왜, 누군가는 별일 안 해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누구는 쉼 없이 일해도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살아가는데 걱정해야 할 것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 다른 비용은 왜 오르기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보다 경제 규모가 작아도 행복하게 사는 외국도 많은데, 우리는 왜 이렇게 팍팍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모두가 점점 더 불행해지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면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자본주의를, 경제를, 경영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희년, 새로운 상상력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하나의 계기는 되었지만, 변화를 가장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좋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와 같은 측면이 있어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면,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물건을 내려놓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가 더 좋아하는 것을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좋은 모델,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대안이 제시된다면 기존의 것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행히, 성경에 굉장히 훌륭한 모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복음과상황〉을 꾸준히 구독하면서 ‘희년’이라는 개념과 기독교 시민단체 ‘희년함께’를 접했다. 희년이란,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되어 50년이 되면 토지가 원 소유주에게 돌아가고, 채무가 탕감되고, 노예가 풀려나 가족에게로 돌아가도록 하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사회의 시스템이다. 희년함께 활동을 지켜보면서 희년 개념을 잘만 적용한다면 한국 사회 부동산 문제, 부채 문제, 노동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지난 2년의 세월은 과연 희년을 내가 어떤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진로와 연관 지어 폭넓게 고민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본 시기였다. 희년함께 인턴을 하면서 시민단체 활동가의 삶을 고민해보기도 하고,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업해서 역량을 쌓은 다음에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는 방식도 생각해봤다. 여러 가지를 탐색해본 이후에,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가치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창출하는 소셜벤처에서 일하는 것임을 느꼈다. 그 과정에서 희년의 가치를 바탕으로, 비어 있는 공간들을 시간 단위로 공유할 수 있게끔 이어주는 공간공유 플랫폼 기업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 회사에서 공간과 도시, 부동산 등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공간, 그리고 하나님 나라
내게 있어 잘 사는 것이란 행복한 사회에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편히 쉴 수 있는 주거 공간,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업무 공간, 사람들에게 물건/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한 상업용 공간,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모임 공간 등 다양한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높은 공간 사용료를 요구하고, 그렇지 않아도 얇은 지갑 사정을 더욱 빈약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꾼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문화예술인들이 공간 걱정 없이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는 사회, 치열하게 살다 은퇴한 이후에 더 치열한 자영업 시장에 뛰어든 소상공인이 임대료 때문에 거리로 내몰릴 일이 없는 사회, 자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도 쾌적한 환경에서 거주할 수 있고 필요한 주거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로 변화할 수 있기를 꿈꾼다. 적정 비용을 지불하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진다면, 사람들의 행복도는 분명히 올라간다고 믿는다. 그런 방향으로 한걸음씩 내딛을 때, 우리 사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나도 내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열망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희망차고 설레는 비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우리가 그 나라를 더욱 간절히 소망하게끔, 그 나라가 어서 이루어지도록 꿈을 꾸게 만드신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미가서 4:3-4, 새번역)

그 꿈이 내 일상에서는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을까? 먼저, 내 삶이 어떻게 지나왔는지, 하나님께서는 그 여정 동안 나를 어떻게 빚어가고 계신지 한 번 돌이켜보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누구를 바라보며 아파하시는가 생각해보자.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일의 교집합을 발견할 때, 내가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좀 더 뚜렷해지지 않을까? 결국 그리스도인의 자기다움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를 발견해갈 때, 그 메시지가 나를 열정적으로 살게 할 때 가능한 것 같다.

 

이철빈
그리스도인, 민주시민, 사회혁신가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혼자 노는 것이 재미없어서 재밌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재밌는 일을 벌일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술 한모금 안 하고 밤새 수다 떠는 특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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