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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정상성의 몰락, 그 후를 상상하기
[342호 커버스토리]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1:35:07 홍혜은 goscon@goscon.co.kr

요즘의 나는 ‘청년’과 ‘젠더’를 다루는 여러 테이블에 불려 다니고 있는 사람이다. 기획자, 저술가,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대표, 〈계간 공덕동하우스〉 편집장. 많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2015년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다시 쓰자. 자연계에는 인간 말고도 무수한 생물이 있지만, 우리는 인간 중심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냥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 안에는 별 의미 값이 없다.

   
▲ 사진: '비혼지향생활자를 위한 계간 공덕동하우스' 페이스북 페이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살기
2015년 이전에 나는 사회가 정해준 정상 트랙에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던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그냥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성중심사회에서 곧잘 논의에서 누락되는 여자였고, 연령주의가 공고한 사회에서 내 말이 어디 가서도 잘 먹히지 않는 청(소)년이었다. 아무리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도 노동자 대접을 받을 수 없는, 학교를 다니면서 일하는 학생-아르바이트생이기도 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지금의 내 위치를 보다 정확히 알고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야만이 내가 스스로를 위해 내 권리를 말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내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방의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스무 살이 넘어서 서울에 올라온 내게는 제대로 된 생활비 지원도, 하다못해 월세 보증금 천만 원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의 힘듦을 버티며, 미래를 위해 이 사회의 기준에서 나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의 대학에 들어갔고, 학비는 장학금을 받았고, 생활비를 위해 돈을 벌었다. 그때 내 삶은 언제나 테트리스를 하는 것 같이 스케줄이 가득 차 있었는데, 전공 하나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복수전공을 하고 학점을 꽉 채워 들으면서도, 세 가지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일 정규 시간대에 시간표를 짜고 남는 시간에 근로 장학을 하고, 저녁 시간대에 과외를 하고, 주말에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이었다. 그밖에 학년이 올라가면서 외주로 일을 받아 교정교열이나 서평 원고, 언론사의 연예 기사 같은 걸 쓰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그러니까 나는 학생이지만 돈을 버는 사람으로, 남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글 쓰는 사람으로, 피씨방과 케이크 가게와 카페와 스터디 카페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는 사람으로 20대를 보냈다. 당시 내 이름은 다양했다. 소설가 지망생, 객원기자, 알바생, 근로장학생, 과외선생님, 학생, 아가씨, ‘저기요’. 나를 부르던 여러 호칭들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를테면 ‘지망생’은 무엇인가? 이는 ‘정식’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가 유예되는 삶이다. ‘객원기자’는 정규직 기자로 쓰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이름이다. 싼 값의 아르바이트비를 주고 내 글을 사겠다는 뜻이다. ‘근로’를 하는 ‘장학생’이란 무엇인가? 나의 일은 아무리 해도 정식적인 일이 아닌데, 그런 데다가 돈을 주니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외선생님은 ‘선생님’이지만, 정규 시험을 보고 임용된 교사만큼의 지위는 얻을 수 없고,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임시 선생님’이다.

하지만 나는 매달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월세도 낼 수 없고 밥값을 낼 수 없어서 굶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를 부양하는 생계부양자였다. 하지만 사회는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돌아갔다. 마치 나 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게는 아무런 완충장치가 없었다. 국가와 사회는 ‘4인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바라봤고, 나에게 당연히 돈 버는 아버지, 남성 생계부양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학생-아르바이트생이어서 월차, 연차, 유급휴가, 실업급여, 이런 선택지가 없었다. 학점을 꽉 채우고 일을 정말 많이 할 때는 평일과 주말을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채 1년 반 정도를 보낸 적도 있다. 그렇게 살 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에게 왜, 어떤 사회안전망들과 안전장치들이 필요한지 잘 몰랐다. 늘 불안함에 시달리는 상태가 일상이었다.

‘메갈리아’ 웨이브를 타고 페미니스트 되다
그 상태가 뭔가 잘못됐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나는 2015년 메갈리아가 생겨날 때 ‘메갈리아 웨이브’를 타고 여성주의를 알고, 고민하게 된 사람이기도 하다. 메갈리아는 많은 사람의 비판과 비난, 동시에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게 메갈리아가 소중했던 건, 가정과 학교와 아르바이트 장소 안팎에서 내가 삶에서 마주쳐 온 답답한 것들을 깨닫고, 나의 언어를, 보다 정확한 언어를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사실 배운 사람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시각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중심적인 언어와 논리를 다르게 비틀어서 보는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까지의 한국 여성주의는 몇몇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통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반해, 넷페미니즘의 물결은 정면으로 대중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중의 일부였기에 그 기회가 소중했다.

나는 메갈리아를 거치면서 보다 또렷하게 내 위치를 파악하고, 내 삶과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낫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했다. 처음으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녀 봤다. ‘아르바이트생’을 노동권을 인정 받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다시 명명하는 활동을 하는 ‘알바노조’를 찾았고, 1-2년마다 집을 옮겨야 하는 청년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는 ‘민달팽이유니온’을 찾아 후원금을 내기 시작했다. 2016년 여성의 날에는 한국여성민우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여성주의 활동을 하는 단체들을 찾아 후원을 권유했다. 그리고 이 활동들에 가능한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보내는 것과 별개로 나의 활동 또한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것은 주로 메갈리안-페미니스트들을 모으는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찾은 ‘현장’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있는 재개발 반대 투쟁 현장이었다. 그와 동시에 진보적이라는 평을 듣는 교회들을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교적을 옮겨서 뭔가 다른 교회를 만들기 위해 개척 멤버로 참여하기도 했다.

결론은, 나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모인 현장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들과, 신학생, 목회자 지망생과 목회자와 교인들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질려서 그 ‘판’에서 밀려 나왔다. 나는 그들이 성폭력 사건을 포함해 관계에서 일어나는 피해와 가해,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만든 커뮤니티도, 모인 사람들의 열심과 모임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생겨나는 많은 갈등을 제대로 다루기에 부족한 우리의 자원과 역량으로 결국 없어졌다. 그 후로도 나는 내가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몰라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우왕좌왕했는데,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찾아낸 나의 의제는 지금 ‘비혼’이다. 그래서 작년엔 ‘비혼지향생활공동체’를 만들었다.

같이, 또 따로 잘 살기 위한 고민들
결혼과 가족이 내게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자면, 목사인 아버지와 사모로 오랜 삶을 살아온 엄마의 이야기를 풀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는지, 엄마에게 얼마나 심한 말을 많이 했는지, 나에게는 좋은 성적이나 여자다움 같은 것을 얼마나 강요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간략한 언어가 생겼다. 요약하면, 아버지는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른 가정폭력 행위자였다. (법률상 “가정폭력”이란 가정 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물리적 폭력이 일어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정신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 일어났다. 아버지는 엄마를 정말 많이 ‘여자답지 않다’ ‘사모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깎아내렸고, 내게 있는 엄마 같지 않은 부분을 칭찬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엄마는 그럴수록 다른 인간관계를 미루고 더욱 ‘하나님’에만 의존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현실에 발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교회가, 기독교가 나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소위 말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이다. 다시 메갈리아에 대해 조금 더 말하자면, 다른 메갈리안-페미니스트들이 피해자 정체성 정치, 또는 ‘여성 혼자 성공해서 잘 살기’ 같은 이야기를 하며 각자도생에 몰두할 때 내가 조금 더 쉽게 ‘같이 살기’에 대한 상상력을 가진 운동을 하고 싶어 했던 건 분명 나의 기독교인 정체성 영향이다. 교회는 공동체고, 나는 공동체적 삶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는 게 수월한 위치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 가족에게 교회는, 기독교는,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미쳤다. 교회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나누고 판에 박힌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곳이었다. 교회는 ‘순결주의’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고, 결국 제대로 된 성 지식을 접하지 못한 채 여성들이 성폭력에 쉽게 노출되게 하는 구조적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목사라는 이름의 성범죄자는 너무 많았다.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만들어진 가족은 서로가 행복하지 못하고 폭력적이면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어야 했는데, 엄마는 주변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조언으로 “이혼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묶여버렸다. 폭력에서 벗어날 타이밍을 잡지 못했고, 엄마는 갈수록 고립됐다.

지금, 비혼지향생활공동체를 말하는 이유
나는 지금, ‘정상성’에 대한 열망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문제들을 다루는 데 관심이 있다. 내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이성애중심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인데, 그걸 ‘비혼’이라는 이름으로 풀어내는 중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은 결혼이 그저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의 낭만적이고 영원한 결합으로 논의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그 무엇보다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애주기 통과의례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특히 결혼은 계층 대물림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결혼하는 사람은 중산층 이상일 확률이 높다. 결혼을 몰계급적 시선으로 보면 곤란한 이유다. 다시 말해 결혼은 지킬 게 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다시 지킬 것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었다는 의미다. 올해 1월 24일에 있었던 가족구성권연구소 창립 심포지움 최현숙의 축사에 따르면, 이미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결혼과 가족은 해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 분석에 적극 동의하고, 이런 현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결혼은 여성에게 불평등하다. 언론은 너무 쉽게 비혼을 “결혼하고 싶어도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결혼 못하는 사람들”로 조명하면서 다 죽어가는 결혼 제도를 살려 내고 싶어 한다. 비혼 담론을 ‘불혼’ 담론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에겐 ‘젠더’의 렌즈가 필요하다. 몰성적 관점을 걷어내고 페미니즘의 눈으로 이 현상을 다시 보면,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못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불평등한 가족 제도 안에서 차별과 부조리를 겪은 여성들의 마음은 돌아섰다. 서울에 거주하는 결혼 상태 아닌 25-34세 여성 100명 중 단 3명만이 결혼을 필수라고 생각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1월 통계조사 결과)

결혼은 이미 몰락했다. 우리에겐 그다음 단계의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이가 ‘결혼’의 반댓말은 ‘혼자 살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쓸쓸히, 홀로 늙어 죽기만을 우리의 미래로 상상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고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논의를 다시, 제대로 해내기를 바란다.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그리고 기독교
나는 지난 몇 해 간 기독교와 나의 관계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을, 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 특히 엄마에게 하나님은 별로 좋은 영향을 준 적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내가 이렇게 힘이 드는데도 왜 기독교를 쉽게 놓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봤는데, 그 끝에는 이런 결론이 있었다. 지금의 기독교는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 그때의 나에게는 사후 세계를 위한 종교였다. 이 기독교는 우리에게 ‘지금’을 살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지금이 힘들고 점점 더 나빠져도 나중에 죽고 나면 좋은 데로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또 지금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는 두려움과 공포가 내게 기독교를 쉽게 버릴 수 없게 하는 핵심이었다.

이걸 깨닫고 난 뒤, 나는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최소한 그가 나를 ‘지옥에 처박을까 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믿는 사이로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후에야 나는 천국과 지옥(과 연옥)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진 역사가 있는지, 종교는 사람들에게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종교가 그 어느 것이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그 종교는 잘못됐다고 말이다. 사람은 지금을 똑바로 마주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고, 지금을 확실히 마주할 수 있고 우리가 더 잘 함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 기독교가, 교회가 필요하다.

현재 보수 기독교계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거의 모든 논의에 딴지를 걸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비혼 운동의 중요한 의제는 생활동반자법의 입법이다. 이것은 결혼 외에도 다양한 가족이 결합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가족 만들기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 법의 입법을 첨예하게 반대하고, 논의의 장을 열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게 보수 기독교 진영이다. 나는 새로운 가족과 결합 제도들을 논의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공적으로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성애-정상연애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 모두의 합의와 약속으로써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 후에는, 지금 삐걱거리는 이 사회의 많은 것들을 위한 새로운 제도를 더 구체적으로 촘촘히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더 잘 살기 위한, 정말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들을 말이다.


홍혜은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대표.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글을 쓴다. 제도 안팎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친밀성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다양한 관계 맺기와 가족의 형태를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그리는 데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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