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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아스땀에서 보내온 편지
[342호 커버스토리]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1:30:52 유랑 goscon@goscon.co.kr

나의 벗 나무 안녕! 유랑이에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저는 낯선 곳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여행에 익숙해졌어요. 제 친구 찌루와 한국을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네요.

지금 저는 네팔의 트레킹 코스에 있는 아스땀이라는 마을이에요. 이 마을은 어찌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샨띠’라는 힌디어가 정말 잘 어울려요.

어제까지는 산 밑 도심 포카라에 있었는데, 아침에 찌루가 저를 흔들어 깨우는 거에요. 옥상에서 히말라야가 보인다면서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부리나케 뛰어올라갔는데 곧바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춘 거 있죠. 눈앞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데 누군들 안 그러겠어요! 그 빛깔이 어찌나 하얗던지, 제 평생 본 하얀색 중에 가장 흰 하얀색이었어요. (적고 나니 말이 조금 바보 같네요. 그렇지만 나무는 이해할 거라 믿어요.)

사실 10분 전까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펜을 안 들 수가 없어서 무작정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편지처럼 적어보아요. (이 책은 모두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쓴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 사진: 유랑 제공

비대학생으로 긴 여행 중인 나는요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이 여행에서 얻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아오는 거였죠. 정말 기적처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자연스레 한국에서의 삶이 떠올라요. 얼른 나무에게 이들의 소식을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지만,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할까 해요.

지난겨울에는 이모가 사촌동생을 데리고 집에 잠시 올라왔어요. 사촌동생의 대학교 설명회 때문이었죠. 그가 서울에 있고 취업 전망도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인지 엄마는 이모의 얼굴이 편해 보인다고 말했어요. 대학생이 아닌 저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으응”하며 말꼬리를 흐렸어요.

“내년 계획은 어떻게 되니?”
이모가 물었어요.
“인도에 갈 거예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제가 말했어요.
“너 참 용기 있구나.”
이모가 말했어요. 저는 아하하, 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어요.
“너희 엄마 참 힘들겠다. 그건 알아야 돼.”
이모가 다시 말을 이었죠.
“그럼요.”
저는 다시 아하하, 멋쩍게 웃었어요.

이모는 제 이야기를 들으며 웃으면서도 찡그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어요. 제가 잘 알고 있는 표정인데 어쩌면 나무에게도 익숙할지 모르겠어요. 그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제게 먼저 기특하단 말을 꺼내고는 꼭 이런저런 걱정들을 늘어놓았거든요.

그날 이야기는 제가 자러 들어간 뒤에도 새벽까지 이어졌어요. 아빠에게 제 삶이 불안하지 않으냐고 묻는 이모의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새해가 밝아도 대학 대신 여행을 떠나는 삶을 말하는 거였죠. 그런 이야기는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그날 밤도 제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온갖 불안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건지 고민하며 잠에 들었거든요.

대학, 단지 수많은 선택지 중 단 하나일 뿐
그때는 대학에 가지 않은 지 1년이 조금 넘었던 때인 것 같아요.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니고, 번지르르한 계획 하나 없는 저에게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하느냐고 자주 물었죠. 처음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팡질팡했어요.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어떤 때는 브라질 악기 연주가가 되거나 독서광이 되었어요. 그냥 쉬는 백수일 때도 있었고 친구들과 알 수 없는 프로젝트를 여는 스무 살이 되기도 했죠.

어떤 이들은 ‘도대체’ 왜 대학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냐면서요. 누군가는 제게 무책임하다 했지만, ‘그냥-’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어요. 저한테 대학은 수많은 선택지 중 단 하나일 뿐이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요, 선택. 제게 대학은 그저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에요. 언제라도 배우고 싶은 게 생긴다면 가기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이요. 그때 저는 확실한 꿈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않았던 거예요. “취직을 위한 발판”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대학은 필수니까” “다들 가는 곳이니까” 등의 말로 저를 설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휴. 그러기엔 그 어마무시한 등록금이 너무 아깝잖아요. 물론 대학의 목적이 그런 거라면 사실은 존재해서도 안 되는 거고요. 그래서 나무가 대학입시 및 수능을 거부하는 ‘투명가방끈’ 활동을 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어요. 잘못된 교육과 사회에 대한 불복종 선언이라니.

8개월의 고된 아르바이트 끝에 인도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 저는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데도 재수를 하는 친구, 주말까지 학원에 나가는 동생, 어딘가 삶에 순서가 정해져 있는 한국의 모습이 많이 답답했거든요. 반면 제가 얼핏 봤던 이 바깥세상은 아주 넓어 보였어요. 이제부터 들려줄 얘기는 바로 이 바깥의 이야기에요. 제가 살던 세상의 바깥, 한국의 바깥, 지금까지 보고 들은 이야기의 바깥 언저리요.

여행하며 만나는 바깥세상 사람들
인도 자이푸르에서는 이스라엘의 노아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이스라엘은 남녀 모두 3년간의 군복무가 필수래요. 전역을 하면 다들 여행을 떠난다죠. 노아 역시 1년 동안 인도를 여행 중이었는데 그가 남긴 명언이 있어요. 이 세상이 자신의 학교라는 거죠! 그 말에 제가 얼마나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찌루가 제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니까요.

덴마크에서 온 니콜은 사무직 일을 하다 요가 선생님이 되려고 인도에 왔대요. 한국에서는 ‘갭이어’(Gap year)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만, 이곳에서는 이 한 단어로 모든 게 설명이 되요. 니콜은 갭이어가 덴마크에선 아주 흔한 일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모두에겐 쉼이 필요하고 우리는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해주었죠. 먼 곳에 가서야 내 선택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다니. 가슴이 조금 벅차오르더라고요.

프랑스 친구 니니는 대학에서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했어요. 어린이들을 엄청 좋아해서 지금도 카트만두 고아원에서 봉사 중이에요. 그런데 니니는 인도에서 명상과 요가를 하고, 마사지를 배우면서 더 좋아하는 일을 찾았대요. 그래서 5월에 프랑스로 돌아가면 당분간 스파에서 일할 예정이에요. 여행이 니니에게 또 다른 꿈을 안겨 준거죠.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친구, 전공이 맞지 않아 학교를 자퇴하고 여행을 떠난 친구, 돈을 버는 대로 여행을 다니는 친구. 이곳에서 만나는 여행자들은 그 고향과 언어만큼 하는 일도 가지각색이에요. 사실 우리는 한국에서는 무슨 일 하느냐는 질문에 질려했거든요. 설명할 거리가 너무 많으니까요. 설명을 하면 한국 사회의 루틴을 벗어난 우리에게 쏟아지던 지나친 관심과 걱정에 바스라지곤 했어요.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기도 했죠. 제 선택을 폄훼하는 이들에게 구태여 그럴 필요 없었는데도요.

여기서도 종종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지만, 중요한 건 제 삶을 낱낱이 밝혀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곳에선 쉬고 있다 대답해도 뭐라 하는 이 없어 얼마나 맘이 편한지 몰라요. 그저 싱거울 정도로 ‘그렇구나-’ 정도로 그들의 궁금증은 마무리되죠.

젠더, 나이로 차별하지도 받지도 않는 시간
젠더와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또 배우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요. 이들 속에 있으면서 다시 한국을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지죠.

부모님이 입시코디네이터를 알아보았다는 얘기, 입시 생활이 너무 힘들어 매일 운다는 친구 얘기, 원하는 대학이 지방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입학 취소를 했다는 얘기.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책상 상품이 품절되었다는 뉴스를 봤을 땐 정말 온몸에 소름이 쫙 돋더라고요. 드라마 속의 치열함이 그저 드라마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게 어찌나 화가 나고 속상하던지.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의무지만, 동시에 권리라고 생각해요. 바깥에서 보게 되는 한국 사회의 청소년들은 이 권리를 잃고 있는 것 같아요. 자고 싶을 때 잠을 자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사소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선택들을 할 수 있는 권리요.

나무, 저는 이곳에서 자유를 만나요. 제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자유요. 요즘 저는 스스로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어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 지금 어떤 걸 가져가고 또 놓치고 있는지요. 이곳에서 전 그저 또 한 명의 여행자일 뿐이에요. 제 삶을 걱정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없어요. 칭찬을 하거나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죠. 스무 살이라는 딱지도 ‘비대학 청년’이라는 이름표도 당연히 없어요. 오롯이 저라는 사람만 존재할 뿐이에요. 이상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유랑으로요.

최근 나무가 써 준 편지를 다시 읽었어요. “유랑이라면 잘할 거예요”라뇨, 세상에. 나무의 담담하고도 단단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눈물이 찔끔 났던 걸 굳이 숨기지 않을게요.

나무가 저를 믿어주었던 것처럼 저도 나무를 믿어요. 누군가 했던 말처럼 우리 삶이 또래 청년의 속도보다 한 템포 느릴 수는 있어요. 불안한 요소가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어느 누가 완벽히 안정된 삶을 살겠어요. 이미 서로 알고 있듯이 우린 잘 해내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잘 할 거예요. (물론 잘하지 못해도 당연히 괜찮고요.) 지금처럼 용기 내어 우리답게 살아가봐요. 어쨌든 우리만이 만들어갈 수 있는 삶이니까요.

여행이 끝나고 제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어요. 일단은 이 지구별을 계속해서 떠돌아 보려고요. 이곳 어딘가에 저 하나 머무를 곳은 있겠지요.

저는 오늘도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삶의 튼튼한 틈새 만드는 법을 배워요. 지금 저는 행복해요. 나무의 2019년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쉬어가는 거 잊지 말고요. 늘 응원해요.

 

2019년 4월 12일
다름이 틀림이 아닌 한국이 되길 바라며.
네팔에서 나무의 벗, 유랑.

 

유랑(필명)
Antevasin. 한국말로 풀면 역마살 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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