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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교회를 만날 때
[344호 신학자의 말] 교육, 형성, 그리고 선교
[344호] 2019년 07월 01일 (월) 17:18:52 제임스 스미스 goscon@goscon.co.kr
   
▲ ⓒ복음과상황 이범진

실천 공동체로서 교회와 캠퍼스 사역의 기반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선 제가 한국과 미국의 교육적 맥락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아가 이번이 저의 첫 한국 방문이기에, 이 주제에 대해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는 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저의 문화적 맥락과 경험에 터하여 분명하게 논지를 전달할 때, 구체적인 언급이 제 논지를 여러분 자신의 맥락으로 ‘번역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우리의 대화를 좀 더 수월하게 해줄 것입니다. 또한 제가 대학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제안하는 몇 가지 논점이 국공립대학이나 사립대학을 포괄하는 일반 대학에서의 캠퍼스 사역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 《가르침과 기독교적 실천》(Teaching and Christian Practices) 같은 책에서 이루어진 제 작업의 상당 부분은 기독교와 대학 사이의 연관성을 다시 구상해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재고하는 사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속한 미국적인 상황에서 이것은 기독교를 하나의 ‘세계관’, 믿음이나 신조의 한 체계로 축소하는 데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판은 기독교를 지적인 체계로 여기는 관점으로부터 실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다시)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크레이그 다익스트라(Craig Dykstra)가 요약했듯이 “기독교 신앙생활은 많은 행습(行習)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혹은 브래드 칼렌버그(Brad Kallenberg)가 요약한 대로 “기독교는 그 특유의 실천적 요소를 언급함 없이는 해명되거나 이해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고 불리는 전통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실천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와 대학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면, 이는 기독교를 단지 하나의 믿음 집합체가 아니라 삶의방식으로서, 더 공동체적이고 통전적이면서 실천적인 이해를 회복하는 일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 주장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다면, ‘교회와 동떨어진 기독교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저는 통전적이고 형성적인 기독교 교육이 학생들에게 기독교적 ‘관점’ 내지 세계관을 갖추게 할 뿐 아니라 기독교적 활동의 실천을 통해 학생들을 형성해내기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실천에서 나온 형성만이 우리의 상상력을 적절하게 포착하고 습관을 바꾸어 세상 안에 사는 우리 삶의 방향과 행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세계를 위해 바라고 계신 샬롬을 지향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 대학이나 일반 대학의 캠퍼스 사역이 기독교 세계관을 인식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 예배를 통해 양육되기도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적 복음에 대한 형성적(形成的)·예전적 “이해”가, 기독교 예배의 역사적이고도 의도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실천들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비결”, 곧 이런 실천적 지식(praktognosia)은 간편하게 정리된 명제들로 적당히 번역될 수 없고, 쉬운 말로 의역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습니다.

캠퍼스 사역과 기독교 예배의 관계
이런 점에서 기독교 예배(와 여타 관련된 기독교적인 실천 행위)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과제에 유익할 뿐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를 실행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이론적인 활동을 포함해, 우리의 행동을 빚어내는 암묵적인 비결을 습득하게 됩니다. 이런 실천 행위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백성이자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미리 구현하는 백성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입으로 분명히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기독교 예배를 수행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본능적으로 내면화하여 흡수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면, ‘세계관’을 갖기 위해 ‘예배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기독교 대학이나 일반 대학의 캠퍼스 사역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채 문화를 가꾸고 만들어나갈 학생들을 형성해내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학생들이 기독교적인 “개념”을 가르침 받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형성적인 기독교 신앙의 실천으로 초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형성적인 기독교 교육과 캠퍼스 사역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인류에게 주어진,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명”이라고 하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의 선교를 위해 학생들을 빚어내는 총체적인 노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형성은 올바른 사고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을 수행하는 가운데 우리를 형성하게 한 다음, 다시 한 번 더 파송되도록 몰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중심을 벗어나 바깥으로 향하는 원심적 목적은 기독교 예배 가운데에 우리가 시연하는 이야기(the Story)의 핵심요소입니다. 즉 파송은 예배의 내적 논리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행위가 기독교 예배의 목적 내지 텔로스(telos, 궁극의 목적)임을 강조하는 것은 예배를 도구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배라고 하는 드라마에 재연되는 이야기,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가 창조세계를 가꿈으로써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있는 “온 세상에 대한 참된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그 이야기와 기독교 예배의 실제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로 인해 이제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되고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의식입니다(롬 8:1-17). 그와 동시에 성령님은 우리가 예전적 동물이자 구체적인 행위자로 존재하는 곳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변화시키시고, 권능을 부여해주시는 은혜의 통로인 훈련과 실천의 “특별한 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와 형성에 있어 중심에서 바깥을 향해 나아가는 원심적 목적이 존재하는 것이 맞지만, 거기에는 우리 스스로가 그 이야기의 중심에 다시 자리잡게 하여 우리 으로의 통합(incorporation)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심화시키는 구심점 같은 정례적인 초청 또한 존재합니다. 이는 예배 또는 선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혹은 세상, 예배당 혹은 도시 등 그릇된 이분법에 직면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예배하고, 파송을 위해서 모여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집중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내는 명령에 이끌려 도시를 개혁하고자 예배당에서 자신을 개혁합니다. 따라서 형성을 요구하는 것은, 정확하게는 광범위한 사명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적 실천이 가진 형성력을 의도적으로 요구케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행위의 선교적 목적인 것입니다.

   
▲ 제임스 스미스 교수 ⓒ복음과상황 이범진

칼뱅의 ‘수도원 제도 비판’: 일부 엘리트만이 아닌 모든 신자를 위한 기도와 예배의 실천
형성과 행위, 예배와 선교 사이의 이 역동적 상호작용은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이 제네바에 대한 칼뱅의 비전을 명쾌하고도 도발적으로 설명한 글에 멋들어지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위해 칼뱅이 가졌던 비전의 핵심은 일상적인 삶의 성화로, 교회와 도시 모두를 개혁하려는 비전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예배 순서를 다시 정하고 갱신할 뿐 아니라 모든 문화적 삶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반영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육신의 주님이기도 하시며, 하늘만이 아닌 땅의 통치자이기도 하십니다. 복음서는 전쟁을 수행 중인 영혼을 위한 구조계획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물을 구원하신 창조주에게서 비롯된 말씀이기에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골 1:15-20).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를 넘어 세상에 대해서도 파급효과를 가지는 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파송은 그 이야기에서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종종 칼뱅주의 전통과 연관되는 “행동주의”를 행하게 됩니다.

하여 칼뱅이 자신과 반대되는 정서를 상징하는 중세적 기관인 수도원 제도와 수도 생활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밝힌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칼뱅이 보기에 그것은 일상의 번잡함과 가정생활의 특성을 회피하는 엘리트주의였습니다. 그러나 볼턴이 아주 세심하게 지적한 것처럼, 칼뱅이 수도원 제도에서 거부한 것은 형성적인 수행과 영적 훈련을 정례적으로 준수하던 수도사들의 헌신이 아닙니다. 칼뱅은 수도원 제도의 엘리트주의와 분리주의를 거부한 것이지, 그것과 결부되어 있었던 “의례”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칼뱅은 공동체의 훈련 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가진 분리주의적 속박상태로부터 이 형성적 수행 행습을 해방시키기 위해, 말 그대로 “수도원 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볼턴이 주장하기를, “칼뱅에게 있어, 수도원 제도가 잘못되어버린 것은 바로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상적이고 접근하기 쉬우면서 공통적이어야 하는 것, 곧 시편을 노래하는 것, 매일의 기도생활, 성만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같이 교회의 독특한 훈련 레퍼토리를 통해 형성되는 인간 삶의 모든 양상을 어렵고 희귀한 엘리트의 전유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칼뱅의 수도원 제도 비판의 결과는 탈의례화, 설교 중심, 주지주의적 경건이기보다 수도회적 실천의 일반화, 곧 “모든 신자들의 수도사화”에 대한 찬양입니다. 여기에서 칭송된 것은 정확하게는 수도원 훈련에 내포된 교육적인 지혜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영적 형성과 관련해 교회의 지혜가 가진 엄청나게 오래된 유산입니다. 수도원에 의해 수행된 훈련의 “특별한 장”은 “교회의 오래된 수련 보고(寶庫)”인 고대 기독교의 파이데이아(paideia)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 파이데이아에 들어가는 것이 도시의 노동에서 벗어나 고립된 광야로 은둔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도시를 일종의 광야로 다시 만들 필요는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네바 종교회의가 그 도시에 거주하는 도축업자, 제빵업자, 촛대제조업자 같은 일반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선물이자 그들의 성화를 위해 주어진 은혜의 통로인 이 형성적 영적 훈련에 스스로를 몰입시킬 기회를 충분히 갖게 해주었다면, 적어도 칼뱅이 뜻한 대로만 되었다면, “제네바 전체가 대(大) 수도원이 될 수 있었겠지요.”

볼턴이 논평했듯, “칼뱅은 궁극적으로 성소를 교회 예배 공간의 담장뿐 아니라 그 너머로까지, 제네바 시의 성벽 밖으로 뻗어 나간 모든 길, 아니 기독인 제자의 삶과 노동이 미칠 수 있는 한계까지,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창조세계의 끝까지 확장시키고자 했습니다.” 칼뱅의 관심사는 이런 실천이 직업을 가진 모든 기독교인에게 접근 가능하고 실행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 적절히 만들어지고 빚어지기만 한다면,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그들은 자신의 사명인 천직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뱅에게 있어서 (고대 기독교 신앙과 유사하게) 그리스도의 덕을 “옷 입는” 방법(골 3:12-15)은 기도와 예배의 실천에 깊숙이 잠기는 일이었습니다(골 3:16-17). 교회의 예배 활동과 영적 훈련은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맡은 사명과 천직을 수행할 수 있는 행위자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교수법적 레퍼토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세상 속으로의 파송’
다시 여기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호작용에 주목해보겠습니다. 즉 개혁에 대한 칼뱅의 비전은 그 영역에 있어서 분명 창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만물을 구속한 우주적인 구원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았고, 그렇기에 도시 구석구석의 모든 것이 다 중요하며, 따라서 온갖 문화 노동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르게 질서 잡힌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문화 노동을 감당하는 것(골 3:17)은 그분의 창조세계에 대해 그분의 원하심에 부응하여 우리 습관과 욕망을 규칙적으로 훈련하기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그리스도 안으로 재조정하는 실천과 훈련의 레퍼토리에 우리 자신이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칼뱅이 수도원 은둔과 재세례파의 ‘대안적 대조사회’를 거부하긴 하지만, 여기서 그는 여전히 궁극적인 안티테제(반정립, antithesis) 하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칼뱅이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본 것은 “그가 살던 시대의 관습적 일상생활”이 “기독교적 경건에의 요구와 크게 상충”되기 때문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의 대응책은 다른 학문과 다른 예전이 가지는 형성적인 힘에 대항해 반대급부적으로 형성적인 기독교 훈련에 몰입하게 할 규칙적이고 영속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세상”으로부터 광야로 은둔하는 것을 그다지 옹호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적 삶의 구별됨을 여전히 강조합니다. 볼턴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매우 잘 요약합니다.

칼뱅에게 기독교적 삶은 구별되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지리적이고 사회적인 은둔을 통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세상”과 “성향의 부패”로부터의 실질적인 물러섬이라고 하는 도덕적, 실존적 명분으로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칼뱅은 일상을 지배하는 유형과 규약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온 성향의 굴절이 일상의 일들에 뿌리내려 잔존하는 것에 확실하게 관여하는 개혁된 생활방식을 꿈꾼 것이다.

이제 제 주장의 핵심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파송되기 위해 모이고, 다시 행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기독교적 활동의 실천을 감당하기 위해 파송됩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약칭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조해왔듯이,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성향, 아비투스,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정념의 방향 설정을 따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교, 직업, 문화 창조에 대한 기독교적인 강조점이 더 근본적으로 “성향의 굴절”을 염려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입니다. 교회가 선하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위임받은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이들을 파송하는 원심 분리기라 해도, 성향의 개혁을 위해 내부 구심점으로 모여드는 하나의 실천 공동체이기도 하다는 점 역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와 단과대학, 종합대학 같은 여타의 선교 기관도 그런 성향의 굴절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개혁과 갱신의 행위자로서 일꾼을 파송하는 데 주력해온 선교적, 형성적 기독교 기관은 우리의 습관을 개혁하는 일에 반드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 각주는 지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K. A. 스미스
개혁주의 전통 및 현대 프랑스 철학을 연구했고, 현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왕을 기다리며》 등 문화적 예전 시리즈와 《습관이 영성이다》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 《해석의 타락》 등이 있다.

번역_박효은
‘베리타스포럼 고려대’ 스태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동양미술사를 전공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기를 사모하여 성실한 학자로 살기를 소망하는 미술사가이다. 홍익대학교·숭실대학교·고려대학교 등에 출강했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워싱턴DC 프리어새클러갤러리 연구원(ARIAH Fellow)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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