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렌즈로 읽으면, 한국교회가 더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 최종원 교수 ⓒ복음과상황 이범진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교수는 인문주의의 눈으로 교회사를 읽는다. 신학 중심의 교회사 읽기를 너머서 문화와 사회의 결을 따라 교회사를 읽는다. 신학적 접근이 아닌 인문학적 접근으로 교회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약 1년 6개월 전, 너무나도 뻔한 주제였던 ‘명성교회 세습’에 관한 그의 페이스북 글이 대중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러한 독특한 (더욱이 한국에서는 드문) 교회사 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시작된 본지 연재글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역시 박제되어 전달되던 역사 텍스트에 생생한 콘텍스트를 입히는 작업이었고, 한국교회의 개혁을 고민하는 이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사이다’였다.

방학을 맞아 한 달여 한국 일정을 소화 중인 최종원 교수를 서울의 한 대형교회 인근에서 만났다. 1년여 만에 인기 강사가 되어 한국 일정이 빽빽한 그에게 ‘연재 필자’의 인연을 핑계로 다소 무리하게 인터뷰 일정을 요청했다. 앉은자리에서 두 시간 동안 인문주의자가 바라보는 2천 년 교회 역사가 펼쳐졌다. 그 이야기는 암흑기를 지나는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동시에 개혁의 길을 비추기도 했다.
 

― 한 달 남짓한 한국 일정이 빽빽하게 계획되어 있습니다. 한국에 온 지 열흘 정도 지났는데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여러 질문이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여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죠.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은요. 그럼에도 지난해와 올해, 한국교회의 모습은 참담하리만치 더 추락한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이에 대한 고민을 하던 분들이 저와 생각을 나누기 원했던 것 같아요. 여러 모임에 초대되었고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하자면 ‘이제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습니다.

― 무엇이라 답하셨나요?
사실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죠. 그 질문에 답변하기보다는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상에 대한 가감 없는 분석과 비평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오지랖 넓게 페이스북(페북)에 한국교회에 대한 여러 문제의식, 안타까움, 아쉬움 등을 담아 최대한 명징하게 분석하고 비평하는 글을 쓰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한국교회의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현상 이면의 큰 흐름, 심층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 2년 전 갑자기 등장하셨어요.
제가 원래 대외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딱 18개월 전쯤이에요. 처음 페북에 올린 글이 복상에 연재가 되었어요. (복상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그때 굉장히 반응이 뜨거웠는데, 솔직히 말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제 단상, 단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2,000자 이상 되는 글을 읽고 사람들이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캐나다에 있었지만, 사람들의 호응과 공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 기억이 납니다. 복상에 실린 글들도 공유가 많이 되었습니다. 폭발적인 반응의 이유를 스스로 어떻게 분석하고 계신가요?
한국교회의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걸 조금씩 풀어서 설명하고 정리하는 글이라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많은 이들이 답답해하는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에 비하면 외부인이잖아요. 외부인의 시선으로 교회 현상을 분석했기에 세습, 동성애 등 답답한 부분을 들추어 말할 수 있었고, 그런 게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은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씁쓸해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건전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면 제 글이 지금처럼 반응이 좋지 않았겠죠. 그냥 여러 목소리 중 하나로 지나가 버렸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글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한국교회가 사회의 문젯거리로 전락한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해요.

― ‘외부인’으로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목회자나 신학자, 각각의 역할이 있죠. 제도 교회 내 목회자나 제도 신학교 신학자가 저랑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저처럼 발언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공감하고 인정합니다. 그런 분들이 제 페북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기도 하더군요. 당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가 대신해준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분들처럼 실천적인 목회 방향을 제시하거나 신학을 가르쳐주지는 못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또는 두 발 앞서가서 대리 발언을 해주는 거죠. 그렇게 되면 목회자나 신학자가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지기도 하겠죠. 예를 들어 저는 ‘난 인본주의자다!’ 강하게 선언하면서 일단 사람들을 쫄게 만들어요. 한국교회는 인본주의/신본주의라는 근본 없는 이분법이 팽배하잖아요. 인문주의가 아니었으면 종교개혁도 일어날 수 없었는데, 그런 맥락도 모른 채 ‘인본주의’라는 말을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죠. 목회자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잘못된 것을 알지만, 성도들에게 말하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하는 거예요. 그분들이 제 입을 빌려서, 혹은 더 순화하여 교인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싶어요.

   
 

― 비난하거나 문제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제가 페북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3-4개월 뒤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제가 속한 학교에 연락해서 VIEW의 입장을 묻는 분들도 있었어요. 몇 번 그런 경우가 있었죠.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기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위축되어 사는구나 싶었죠. 그런데 사실 몇 번 그런 이야기 듣는다고, 그게 뭐 엄청난 고초나 희생은 아니잖아요. 국내 제도 신학교에 있으면서 강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제 직을 걸고 하는 의미가 있는 거겠지만, 지금의 저는 ‘키보드 워리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더 부지런히, 더 냉소적이지 않게, 더 성실하게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하죠.

― ‘냉소적이지 않게’ 쓰시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다른 사람을 최대한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소통하는 게 제 목표거든요. 아주 전통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분들도 불편함을 덜 느끼고 들어볼 만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그게 제 글쓰기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죠. 제 감정이나 아이디어를 배설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이에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게 목적이거든요. 그래서인지 단문으로 쓰는 게 부담스러워요. 짧게 쓰다 보면 오해할 여지들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내고자 길게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제 수업을 듣는 어느 분은 제 글을 보고는 ‘가식적’이라 농담을 하기도 해요. 수업할 때보다 글이 더 조신하다는 거죠.(웃음)
 

― 최근에 나온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에 ‘민중신학을 외친 것은 엘리트 신학자들이었지만, 민중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은 오중복음 삼중복음을 내세운 순복음교회였다’라는 표현이 뼈아팠습니다. 교수님께서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글을 쓰려는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의 분리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도 루터의 종교개혁 못지않게 타락한, 소위 말하는 ‘타락한 종교’, 즉 교회의 타락은 늘 있었죠.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은 하나의 교회가 분열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일인 거죠. 만약 가톨릭 교회가 타락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기능하며 내부에서 정신을 차려 자정을 할 수 있었다면 교회 분열은 없었을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저는 당시 가톨릭 교회가 가진 스콜라주의로 대표되는 대학의 신학, 상아탑의 신학이 대중을 읽지 못한 탓이라고 봅니다. 그 시기는 자국어 문학이 많이 발전했던 시기예요. 영어,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되면서 대중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자기 신앙에 눈을 떠가는 시기였는데 여전히 가톨릭 교회는 엘리트 중심의 신학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종교개혁을 엘리트 신학과 대중 신앙이 분리된 시기라고 보는 거죠. 그런 면에서 루터는 굉장히 불행한 인물입니다. 만약 엘리트 교회가 대중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진지하게 상호관계를 맺고자 했다면 가톨릭 교회가 변화할 수 있었을 거예요. 실제로 중세에는 몇 차례 그런 변화의 움직임들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대중과 유리되어 있을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나 클뤼니 수도회 등이 아래(민중)로부터의 움직임을 견인하거든요. 종교개혁 때는 가톨릭 교회가 그걸 듣지 못한 거죠.

— 한국교회 역시 엘리트 신학과 대중 신앙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한 걸음 떨어져서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가장 크게 보이는 게 엘리트 신학과 대중의 유리거든요. 제가 신학자가 아니라서 가지는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한국 사회에서 쏟아지는 신학 담론, 이를테면 톰 라이트나 바울의 새 관점 등 이런 주제들이 실제로 대중들이 처한 실제 삶의 현장으로서의 교회와 너무 크게 유리된 거로 보여요. 사람들이 읽는 텍스트는 바울의 새 관점이고 톰 라이트이고 칼뱅이고 루터인데, 한국교회를 둘러싼 콘텍스트는 전광훈 목사의 망언, 사랑의교회와 오정현 목사의 불법, 명성교회 세습 등을 넘어서지 못하는 거죠. 물론 엘리트 신학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신학이 대중들에게 소화되어서 연결되고 있는가 고민하자는 거지요. 누군가는 다리를 놔줘 연결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신학도 한국교회 현상에 대해서 해답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신학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야죠. 중세로 비유를 하자면, 성직주의에서 내려와야죠. 대중에게 정말 진실되게 형제자매로서 다가가야죠. 그렇지 않으면 전광훈 같은 엉뚱한 세력들이 대중을 설득하는 비극이 초래됩니다.

— 책에 ‘대중 독재’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책에 자세히 썼지만 ‘대중 독재’라는 표현은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박정희 시대를 평가할 때 쓴 말이에요. 박정희의 일방적인 독재가 아니라 대중의 합의와 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대중 독재의 시대라 칭해 화제가 됐죠. 더 단순화해서 얘기하면, 대중의 인식 수준이 그 시대의 맹점을 분석할 정도로 주체성을 갖지 못했다는 거예요. 국가의 홍보나 국정 정책에 휘둘리는 대중이었던 거죠. 오늘의 한국교회는 상당 부분 그런 대중 독재 시대와 유사한 면이 있어요. 실제로 한국의 독재정권 시기 박정희라는 ‘한 위대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그 밑에 ‘백성’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회 규모와 상관없이 담임목사가 ‘한 영적인 아버지’로 대변됩니다. 영적인 아버지…, 이건 가부장제거든요. 그래서 교인들은 ‘좋은 아버지’를 찾고, 목사는 ‘좋은 아버지’가 되어서 화목한 교회를 꾸려가는 게 목표죠. 그런 교회에서 단순히 목회자가 아닌 영적 아버지가 어떤 결정을 할 때, 교인들은 그저 ‘백성’으로 전락합니다. 거의 무비판적으로 좇아가죠. 지난 3월에 사랑의교회 공동의회에서 오정현 목사 위임 청원 찬성이 96.42%였어요. 굉장히 슬픈 현상이지요. 그 속에 있는 분들은 상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능력을 상실한 겁니다. 단순히 오정현 목사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그 속에 있는 대중이 그것을 추인한, 대중 독재의 한 형태인 거죠. 이와 관련해 저는 교회가 건전한 시민의식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 ‘건전한 시민의식을 키울 수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는군요.
어느 교회나 ‘다음 세대’에 관한 문제의식은 많죠. 교회에서 중고등부가 없어지고,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양심에 손을 얹고 스스로 솔직하게 물어볼까요? 오늘의 한국교회 구도에서 교회에 청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 전체 맥락에서 보면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요.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요. 지금은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못해요. 시민의식을 견인하기는커녕 인권, 평등, 복지 등 사회개혁을 위해 제시되는 담론들을 소화조차 못하고 허둥대고 있죠.

― 역사에는 교회가 시민의식을 견인한 사례들이 있죠?
프랑스 혁명기 때 민중들 삶이 참 엄혹했지요. 바다 건너 영국은 좀 나았을까요? 마찬가지였어요. 아동들이 18시간씩 공장에서 노동하고, 노동자들은 술에 의지해 살았어요. 그때 ‘복음주의자’라는 자의식을 가졌던 25명 남짓한 운동가들이 사회개혁을 주창합니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알려진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도 그중 한 명이었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은 사회적인 죄악이라 여겨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죠. 데이비드 베빙턴은 이를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 표현했죠. ‘계몽’에 대해 안 좋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망각과 무지몽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계몽은 사회적으로 선(善)이지요. 기독교가 담지하고 있는 선의 가치가 사회를 더 선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고요. 이런 사회개혁에 참여하는 일은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복음서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아요. 당시 영국 교회가 비록 엘리트 귀족 계층이었지만 민중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는 비판도 받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사회를 더 낫게 변화시키고자 행동했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 교수님께서 글을 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인지요?
저는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진 않습니다.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내 생각이 많은 그리스도인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기쁨이 제가 글을 쓰는 동력이죠. 아주 보수적인 대형 교회를 다니는, 그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구원을 받아 행복하게 다니는 분들을 바꾸고자 애쓰기보다 한국교회에 개혁·갱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들과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싶은 거죠.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분들과 새 흐름을 만들어 보여주는 게 개혁이라고 생각해요. 대형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단번에 계몽해서 작은 교회에 다니게 하는 것? 그런 기대는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닌가 싶어요. 역사는 한 번도 그런 사례를 보여준 적이 없어요.
 

   
▲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분들과 새 흐름을 만들어 보여주는 게 개혁이라고 생각해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그럼에도 교수님 글에는 대중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이 보입니다. 게다가 비난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고, 애정으로 글을 쓰고 계십니다. 혹시 화가 나서 쓴 글도 있나요?
그동안 페북에 글을 올리면서 마음에 분노를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에 지식인은 있는가?”라는 글을 쓸 때 마음에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아내에게도 “내가 처음으로 글을 쓰면서 화가 난다”라는 말을 했어요. 댓글에도 어떤 분이 ‘분노가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좀 과하게 나갔구나, 그런 생각도 있었죠. 제가 분노한 지점은 이런 거였어요. 한국에서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기독교인들의 위선이 보였거든요. 정치·사회·교회 이슈를 바라보는 시각은 굉장히 개혁적인 이들이 자기 교단의 핵심 쟁점인 여성의 목사 안수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모습이 화가 났어요. 자유한국당 지지자 같은 매우 보수적인 분들이 그런다면 화는 안 날 텐데, 사리 분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들이 침묵하는 모습은 화가 나더라고요. 기득권이라고 해야 할까요? 꼰대 의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그 모습이 굉장히 불만이었어요. 지식인들의 위선 때문에 생긴 분노였죠. 불법으로부터 신학교를 지키고자 외친 말들과 여성,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관점 사이에 괴리가 너무 컸어요. 그런 이중 준거와 위선이 한국 기독교 엘리트들의 대표적인 모습 아닌가 합니다. 
 

   
 

— 《혐오의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공저)에 쓰신, ‘혐오와 배제의 피해자’였던 기독교가 제국 종교가 되면서 가해자로 변했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이전에 혐오와 배제를 당하던 피해자가 다수의 위치에 서게 되거나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경우도 벌어집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되기 굉장히 쉽습니다. 단순히 이 문제를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느냐’ 물으면 답이 안 나와요. 선거운동 때는 굽실거리던 사람이 국회의원만 되면 어깨에 힘 들어가면서 안색부터 싹 바뀌죠. ‘변하지 마라’며 당위로 풀어나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국회의원이 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 권한과 권력을 유권자들이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듯, 핍박하는 종교가 되어 버린 기독교의 맥락을 면밀히 살피고 대처하는 게 순서겠지요. 기독교는 왜 핍박하는 종교가 되었을까요? 기독교 맥락에서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이 되면서 인정받는 종교가 되었는데요. 그 이면에는 국가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기능하기를 기대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죠. 종교 이념 때문에 핍박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국가주의가 결합하면서, 기독교 스스로 국가의 일에 부역하게 되면서 핍박을 하게 된 것 아닌가 싶어요. 324년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고, 그곳에서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공의회를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된 공의회로 의미를 부여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제도 국가(제국)가 교회 문제를 통제하게 된 공의회였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제국이 교회 문제를 통제하게 되었어요. 황제 입맛에 맞게 말이죠. 앞으로 기독교 역사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전조였던 겁니다.

— 국가주의와 결합하면서 ‘핍박하는 종교’로서 변질된 거군요.
이런 맥락에서만 바라보면 당시 치열하게 다툰 정통과 이단의 문제, 혹은 종교와 그것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는 겁니다. 지구상에 고등종교로 인정받는 동서고금의 어떤 종교도 혐오와 핍박을 내세우지는 않아요. 다만 종교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집단 이데올로기와 결합되면서 타자를 혐오하고 탄압해요. 본인들은 정통을 지킨다는 선한 의도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핍박하는 거죠. 아주 가까운 예를 들면, 요즘 태극기부대에 기독교인이 아주 많죠. 실제 그분들을 추동하는 힘은 종교나 성경이 아니에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이죠. 한국 기독교 진영에서 이주 노동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발언을 일삼는 분들 보세요. 대다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자기 확신에 가득 찬 분들이에요. 타인에 대한 혐오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분들은 스스로는 종교적 신념을 당당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원에는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가 있는 거거든요. 그 배후의 메커니즘을 읽어내야죠. 우리는 이데올로기화한 종교와 종교 자체를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렇게 혐오 발화를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종교가 이데올로기화한 것과 종교 자체를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콘텍스트를 읽을 능력이 없으니 텍스트로 돌아가겠다는 말이죠. 콘텍스트는 복잡다단해서 골치 아프다는 거죠. 콘텍스트를 이해할 자신은 없고, 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은 있고, 그러니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속 편한 얘기를 하는 거죠." ⓒ복음과상황 김다혜

—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후 맥락을 살피기보다는 단순하고 확실한 문장 안에 안주하며 머물기를 바라지요. 설명을 좀 길게 하려 하면 ‘그래서 동성애가 죄라는 거냐 아니라는 거냐’ 따져 묻는 식이지요. 복음이 텍스트 안에 갇혀 있는 현실이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제가 느끼는 처참함도 그 지점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건이나 논쟁의 콘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게 너무 취약한 것 같아요. 예컨대, 동성애에 관해 목회 차원에서 충분히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이슈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봐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물의(?)를 일으키는 사회 이슈에 대해서는 늘 ‘성경으로 돌아가는’ 간편한 선택을 합니다. 콘텍스트를 읽을 능력이 없으니 텍스트로 돌아가겠다는 말이죠. 콘텍스트는 복잡다단해서 골치 아프다는 거죠. 콘텍스트를 이해할 자신은 없고, 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은 있고, 그러니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속 편한 얘기를 하는 거죠.

— 그게 현실의 콘텍스트와는 괴리된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텐데요.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분들은 성소수자나 난민, 이주 노동자 등과 접촉하려 하지도 않잖아요. 기회가 없어서 그런 측면도 있을 텐데, 일단 드러나면 돌 던질 준비부터 하는 교회에 누가 들어서겠어요? 사회의 보편적인 시민의식 수준도 기독교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죠. 경험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어요. 제가 가르치는 학교가 신학교는 아니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목사님들이 많이 오세요. 처음에 와서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죠. 캐나다에는 성소수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요. 여장한 남자 선생님도 있어요. 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 ‘괜찮냐?’고 물으면,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게 그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상황이니까 보수적인 교리를 가진 분들도 뭐라 할 수 없는 거죠. 이런 경험들이 쌓여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어떤 이슈나 현상을 꼭 분별하고 판단 내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성애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저에게 묻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그게 저를 검증하려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고민이 해결 안 되니까 불안해서 묻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데, 자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 사안이 ‘결론’이 나야 하나요? 교단이나 개인에 따라 신학적으로 결론은 내릴 수 있어요. 그런데 성소수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런 결론을 내린다는 점이나 이데올로기적 공방은 굉장히 무례한 겁니다. 분당우리교회 논쟁에서 정작 성소수자들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논쟁을 일으킨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그분들을 사랑한다면, 그분들 존재를 두고 그렇게 무례하게 공개적으로 논쟁할 수 있었을까요? 전혀 상대를 고려하지 않았어요. 거기에는 이데올로기화된 소수자, 이데올로기화된 시각만 있는 것이죠. 타자를 규정하는 종교로 전락해버린 거예요. 규정하고 답을 내려야 하는 강박 때문에요. 다른 전통, 다른 시각을 두루 경험해야 규정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무언가를 규정하는 것은 서방 신학의 전통이지, 동방 신학의 전통은 규정하지 않아요. 또 다른 기독교 전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겸손하게 신비로 여기고 지켜봐 주는 거예요. 하지만 유독 한국교회는 그런 것을 제한합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교만한 겁니다.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다는 태도거든요. 

—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사상일 텐데요. 그럼에도 타자의 존재를 혐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흔히 기독교인들은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명령을 종교적인 언설이나 선언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이웃 사랑, 좋은 거라 알고 있으면서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내 이웃이 누구냐’라고 물음으로써 벽에 부닥치죠. 서로 생각하는 이웃이 다른 거예요. 본인은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심층을 들여다보면 가부장으로서 시혜를 베푸는 것인 경우도 많아요.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열등한 이들을 도와주는 경우도 많고요.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은 ‘말 잘 듣는 형제자매들’이죠.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자기들 범주 안에 있으면 알아서 도와줄 텐데 자꾸 도전을 하니까 더 싫어하는 측면도 있겠죠.

—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할 때, 한국교회가 일반 시민의 선택을 받기는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종교는 없어지고 버림받습니다. 교회의 타락한 모습에 대항해서 민중들은 교회를 버리지요.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는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을 하기도 했어요.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단 논쟁 차원을 말하겠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이 집단 개종 현상을 바라보면 엄연히 복음의 실패라 말할 수 있겠지요. 국가종교가 된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요.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그들이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을 한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타락한 모습 때문입니다. 민중들이 교회를 버린 거예요.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보다, 더 인간적이고 온건하다고 판단한 이슬람을 선택한 거지요. 7세기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교회는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집니다. 이런 역사들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는 ‘구원은 양방향적’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구원을 주기도 하지만, 민중들이 기독교를 선택하지 않으면 기독교 역시 구원받지 못하는 겁니다. 이를 아주 냉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북아프리카의 사례겠지요.  

— 당시 이슬람교가 급속도로 빠르게 성장한 이유도 민중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이라는 말로 이슬람의 확장을 설명하는데요. 굉장히 단편적인 이해입니다. 모든 종교가 빠르게 성장한 데에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당시에는 가장 관용적인 종교가 이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 콥트 교회가 있고, 이란에도 많은 기독교인이 있어요. 심지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내각에도 기독교인이 있었고요. 흥미로운 점은 예배 장면만 보면 누가 무슬림이고 누가 기독교인인지 구별이 안 된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교에 나름의 관용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오랜 기간 그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편견 중 하나가 서로 다른 종교는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인데요. 우리도 익히 경험하고 있듯이 종교 자체가 우리의 모든 삶을 규정하는 유일한 상수는 아니잖아요. 그때 이슬람교는 자기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유럽보다도 문명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죠. 당시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기 이전의 유럽은 내륙에 갇혀 있던 반면, 이슬람 문명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개방적이었어요. 십자군(Crusades)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 저질렀나요? 지금도 유럽에서는 ‘crusade’라는 말은 금지어예요. 그런 잔인한 십자군들이 이슬람 지역에 와서 선진 문명을 본 것이죠. 물론 그럴 수 있었던 데는 이슬람교가 지중해 지역을 무대로 했다는 게 결정적인 요인이지요. 문명의 교류가 활발했고 공존을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슬람의 이런 개방적인 전통을 콘비벤시아(Convivencia)라고 불렀어요. 

― 바꿔서 표현한다면, 대중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더 나은 가치를 설파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네요. 특히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문명을 만들어가면서요.
그렇죠. 중세 유럽 역사에서는 12세기를 르네상스라 부릅니다. 대학이 이때 생겨나요. 이 르네상스를 이끈 단 하나의 요인을 꼽자면 이슬람 문명입니다. 이슬람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생겨났어요. 역사의 사례에서 보면,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을 통해 서로 발전합니다. 이쯤에서 다시 앞의 북아프리카 기독교(도나투스파)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기독교가 이슬람교보다 우월하지 못했던 겁니다. 정말 기독교 사상과 문명에 자신이 있다면, 타자와의 경계를 허물고 지경을 확장할 수 있어야죠. 정말 기독교 복음이 옳고 그 텍스트가 어느 시대에나 유의미한 정합성이 있다고 확신한다면, 무엇이 두려운가요? 어떠한 시대이건, 기독교 가치를 구현해낼 자신이 없는 기독교인들이 문을 걸어 잠근 채 문을 열려는 이들을 신학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혐오하기에 이른 거 아닐까요?  
 

   
 

― 2019 성서한국 전국대회의 주제가 ‘오늘, 여기에서 복음을 묻다’입니다. 교수님께서도 ‘초대교회사 속에 나타난 복음’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앞두고 있는데요. 무작정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실 것 같진 않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다룬 《초대 교회사 다시 읽기》(홍성사)에도 자세히 썼지만, 초대교회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가장 큰 시사점은 변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유대 지역에서 가장 멸시를 당하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복음이 시작되었죠. 그 복음이 고대 역사의사상적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칠 때는 세상의 가치에 휩쓸려가지 말고, 변방에서 더 숭고한 가치를 전해야 한다는 다짐이 묻어나야 하는 거죠. 그러한 가치를 따르는 것이 나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고 해도,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실천을 멈추지 말아야죠. 이런 다짐이나 결단 없이 단순히 맹목적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은 허망한 구호일 뿐입니다.

―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다가 비대해지고 강력해진 한국교회가 변방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스스로 변방으로 내려가진 못한다고 봐요. 그러나 변방의 소리가 중앙을 추동하고 움직일 수는 있겠죠. 조용기 목사에게 설교 그만하라고, 모두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하기가 어렵죠. 본인은 내려놓고 싶어도 못 내려올지도 몰라요. 교회에서 허락해주지 않겠죠. 성도 수가 줄어들 테니까요. 명성교회를 세습한 김하나 목사도 스스로 내려오는 것을 기대하긴 어렵죠. 그러나 변방의 소리가 모여 흐름을 만들고, 그런 흐름이 서로 연대하고 있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특히 지금의 시대가 끝나면…, 말이지요. 한마디 덧붙이자면, 대형 교회들의 성취를 폄하할 생각은 없어요. 20세기 콘텍스트에서 대형 교회가 이룬 성취들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기독교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대형교회 출신이 아닌 ‘리더’를 찾기 어렵잖아요. 지금의 한국교회는 탑다운(top down, 위에서 아래로 하향 진행)은 되지만 바텀업(bottom up, 아래에서 위로 상향 진행)은 안 되는 현실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끝나고, 밑의 목소리가 조직화되고 연대하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실제로 지난 국정농단 때 범복음주의 청년들이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때 많이 나왔잖아요. 광화문 세월호 천막을 지키기도 하고요. 복음주의권에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냉소하기 쉽지만, 그러지 않고 겸손하게 어떤 식으로든 몸부림치는 그 흐름이 있기에 복음주의의 가치로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겁니다.  

― 성서한국 전국대회에는 그러한 복음주의 청년들이 모이는 장입니다. 교수님으로서는 이번이 두 번째 참여하시는 것인데요.
지난 대회 때 의외로 참석자가 적은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단순히 하나의 대형 집회를 여는 차원이 아닌, 범복음주의 진영에서 한국교회와 사회를 고민하는 분들이 모여 생각을 나누는 담론장이잖아요. 많은 분들이 올 거라 기대했는데, 기대한 수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좀 마음이 아팠죠. 이 진영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취약하구나, 안타까웠죠. 이제 대형 집회는 안 되는 건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고요. 대형 집회가 효용성이 없다면 안 해도 되지만, 성서한국이 한국교회에 갖는 독특한 지평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작년에 합동 총회에서 성서한국, 복음과상황, 교회개혁실천연대, 좋은교사운동, 청어람ARMC,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연구대상으로 조사하겠다고 결의를 했죠. 제도 교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들을 싸잡아 견제하려고 한 것인데요. 그래서 저는 거꾸로 이 단체들이 한국교회에 대안을 제시하는 곳이라는 ‘인증’으로 받아들였어요. 타락한 제도 교회가 불편하게 여기는 단체들에서 대안적인 흐름이 나오겠구나, 나와야 한다 생각했죠. 성서한국 전국대회는 변방에서 그런 대안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어요. 준비하는 분들이나 참여하는 분들이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면 좋겠어요.

― 신영복 선생은 변방에 머물면서도 중심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교수님도 개인적으로 변방에 머물고자 노력하는 편인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방랑 기질이 있어요. 지금도 사실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변방-중앙에 대한 의식조차 잘 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아요.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커요. 한국교회를 위한 애타는 사명감보다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저는 그렇게 비장하지 않아요. 제가 글 쓰고 강연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놀이에 가까워요.
 

   
▲ "왜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오나 당혹스럽기도 했는데, VIEW에서만 줄 수 있는 경험이 있구나 싶더라고요. 이분들이 나중에 한국에 가서 다시 사역을 할 때 굉장히 유용한 경험과 지식을 얻어갈 수 있겠다 싶어서 뿌듯했고요." ⓒ복음과상황


― 보수적인 선교단체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의 변화가 온 계기가 있었나요?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흔히 말하는 사회적 복음에 대해 눈을 뜨게 됐죠. 요즘에는 복음의 공공성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제가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역사를 공부하게 된 맥락은 ‘복음이라는 것이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었어요. 선교단체에서 큰 도움을 받고 신앙적인 성장과 경험을 했기에 감사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을수록, 거기서 자랄수록 자기중심성으로 회귀되는 것을 경험했어요. 이런 회귀는 한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흐름이지요. 자기중심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 시각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계기이기도 했고요. 지금 작업하는 것들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이지요.

― VIEW에서 만난 학생/교수들과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어떤 분들에게 입학을 권하시나요?
한국 사회 맥락에서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을 캐나다에서 경험할 수 있어요. 지금은 한국의 대다수 선교단체 간사들이 VIEW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을 했어요. 지난 학기에는 평균 입학 연령이 30대 중반이었어요. 왜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오나 당혹스럽기도 했는데, VIEW에서만 줄 수 있는 경험이 있구나 싶더라고요. 이분들이 나중에 한국에 가서 다시 사역을 할 때 굉장히 유용한 경험과 지식을 얻어갈 수 있겠다 싶어서 뿌듯했고요. 인생의 갈림길에서 밀도 높은 고민을 하고자 학교에 온 분들은 만족도가 굉장히 높아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강사를 불러서 커리큘럼을 짜기 때문에, 학생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우리 학교가 ‘아주 좋은 학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좋은 학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학교라 자부할 수 있어요. 그냥 하나의 학교가 아니라 한국교회에 유의미한 기여를, 작지만 임팩트 있는 기여를 하기 위해 애쓰는 학교 중의 하나입니다.

― 여러 출판사가 주목하는 필자이신데요.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요?
지금 몇 건의 저술이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만, 한국교회에 알려진 여러 지성인을 인터뷰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봤어요. 한국교회 지성인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대담집을 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실현 가능성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한국교회 생태계가 너무 편향되지 않고 건전하게 구축되는 데에 필요한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가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시간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제가 보탬이 되고 싶어요.

― 그 인터뷰는 복상에 연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웃음)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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