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호 특집]

본지 2019년 8월호 인터뷰 사진. 영락교회 예배당 앞에서. ⓒ복음과상황
본지 2019년 8월호 인터뷰 사진. 영락교회 예배당 앞에서. ⓒ복음과상황

최종원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는 가히 ‘주변성의 인문학자’라고 부를 만하다. 물리적으로 22년째 한국 땅을 떠나 해외에서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저술한 글과 저서, 인터뷰 등에서도 줄곧 ‘주변’과 ‘경계’를 강조해왔다. 성경과 교리라는 텍스트에 갇혀서 자신을 둘러싼 주변 콘텍스트를 살피지 못하는 교회 모습을 비판했고, 제국의 질서를 거슬러 주변으로 향한 대조 공동체인 수도회를 소개했으며, ‘영향력의 덫’에 빠진 교회를 치료하는 해독제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서 ‘인문주의’가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그런 그가 밴쿠버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온라인 인문학 플랫폼 ‘VIEWtiful 인문학’을 시작한다. ‘인문학적 관점(view)을 통해 아름다운(beautiful) 세상을 만들겠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VIEWtiful 인문학은, 인문학적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기초 강의를 제공하는 학습의 장이자, 교회와 사회에서 고민하는 주변인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자조 모임의 성격으로 기획됐다. 소셜미디어 소개 글을 보면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등 다채로운 인문학으로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지적 근력을 키워 나가는 글로벌 온라인 배움터”라고 적혀있다. 멋진 기획이다. 그러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새롭게 시작하지만 사실 그리 색다르게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온라인 아카데미의 등장일 뿐일까? ‘오호!!!!’ 하는 느낌표 네 개에 곧이어 ‘어허?’ 하는 물음표 하나가 따라붙는 이 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주변성의 인문학자는 자기 지향을 어떤 방식으로 아카데미에 녹여내고자 하는 걸까. 섣부른 억측 이전에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 했다. 답답한 현실 가운데 함께 모여 ‘꿈틀’이라도 해보겠다는 포부와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는 수줍은 목표 그사이 어딘가에서 고민 중인 최종원 교수를, 팔 할의 응원(!!!!)과 이 할의 염려(?)가 섞인 마음으로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17시간 시차를 넘어, 한국 시각 11월 27일 오전 9시 줌으로 진행했다.

- VIEWtiful 인문학을 2월에 론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과정에서 나온 기획인가요.

꽤 오래된 생각이에요. 코로나19 기간에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온라인으로 만날 기회가 꾸준히 생겼는데요. 《신데카메론》(복있는사람)으로 엮여 나오기도 한 10회의 기획 강의도 진행했고, 교회사를 주제로 한 3학기 강의에도 나라로 치면 15개국에서 250명 정도가 참여하셨습니다. 3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온라인 모임을 진행했는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신 분이 60여 명이나 됐어요. 많은 분이 이런 모임을 상설화하고 대중화하면 좋겠다고 피드백을 남겨주셨죠. 저도 그랬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VIEWtiful 인문학은 한국교회의 쇠퇴를 바라보는 인문학자로서 제가 내린 나름의 해법과 고민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중세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흑사병 이후 중세인들 사이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 꽤 유의미하게 다가왔어요. 기존 교회가 보여주는 성직 체계에 불신이 생기고, 성직주의와 스콜라주의를 넘어서는 아카데미로서 인문주의가 등장했죠. 이것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오늘날 상황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목회자 중심성이 지나치게 강해요. 현실적으로 일반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목소리에 자주 노출되는데, 그 메시지는 사회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과 무관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일수록 신앙과 사고 체계와 삶의 비대칭이 심화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성경적 사고의 틀을 넘어서는 사회와 문화를 향한 보편적 관심, 어떤 시류를 따라가지 않는 인문학적 기초를 다지는 일이 필요하다고 절감했습니다. 이를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연대의 장을 만들고자 VIEWtiful 인문학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 진행 방식과 커리큘럼이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는 1년 3학기제로 구성되고요. 학기별로 문학·철학·역사 등 3개의 ‘기초 강좌’가 제공됩니다. ‘기획 강좌’를 통해 다양한 현대사회 이슈를 살피고 신진 학자들 연구를 소개할 예정이고요. 실시간 온라인 강의와 함께 녹화본을 제공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 사이에 네트워킹과 연대가 이뤄지리라 기대합니다.

본지 2019년 8월호 인터뷰 사진. ⓒ복음과상황
본지 2019년 8월호 인터뷰 사진. ⓒ복음과상황

- 기독교 자장 안에서 비슷한 시도가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비기독교 인문·사회 계열에도 이미 여러 아카데미가 있고요. 대다수는 상황이 녹록지 않을 텐데요. VIEWtiful 인문학만의 색다른 지향이나 차별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분들은 기존의 좋은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갈급함을 나름대로 해소할 기회가 더러 있지만, 여전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많습니다. 특히 저처럼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 열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VIEWtiful 인문학은 밴쿠버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그런 물리적 진입 장벽을 허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제가 진행한 온라인 모임에 많은 수요가 있었고, 참석자들도 위로와 연대감을 경험하셨죠. 그런 의미에서 저희 일차적인 타깃은 한국에 있다기보다는 해외에 거주하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진입 장벽은 기존 프로그램들이 너무 전문적이라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특색이 강해서 보편적으로 접근하기에 녹록지 않은 부분도 있고요. 저희 소식을 듣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밴쿠버 버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었는데요. 느헤미야는 신학에 특화되어있죠. 느헤미야만의 분명한 몫이 있는 것이고요. 저희는 과하게 ‘신학’과 ‘성경’에 집중하고 있는 지형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인문학에 집중해야겠다는 필요를 느꼈습니다. 남성, 신학자, 유명 목회자 위주의 강사 구성도 피하려고 하고요.

- 그동안 여러 저서와 인터뷰에서 한국교회 핵심 문제로 ‘영향력의 덫’에 빠진 것을 지적해 오셨습니다. 중심을 지향하는 움직임에서 벗어나 ‘주변’과 ‘경계’로 향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고요. VIEWtiful 인문학도 당연히 그런 방향성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 종교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 종교의 자리가 여전히 있다면 중심이나 권력이 아니라, 주변에 서서 함께 손을 잡고 버텨주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해요. 손해를 보더라도 우직하게 말이죠. 그러려면 결국은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사람의 무늬’(인문)를 성찰해야 하고요.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규정하기에 앞서서, 인간의 존엄 자체에 대한 관대함과 수용성이 얼마나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지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쇠락하는 이유는 그런 지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이미 많은 분이 상실감 속에 주저앉았고, 교회 주변에 머무르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져버렸죠. 안타깝지만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저 역시도 그럴 수 있는 입장이고요. 그런 면에서 주변부에서 혼자 읊조리는 독백으로 끝나지 않고,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끼리 연대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마디로 ‘꿈틀’이라도 해보자는 거죠.

- 주변성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택한 것이 왜 하필 ‘인문학’인지, ‘지적 근력’을 키우는 일과 주변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VIEWtiful 인문학 소개 영상을 보니,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를 언급하면서 시작하시더라고요. 거기에 힌트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함께 직면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문학의 힘을 모습을 보여줬죠. 어떤 면에서는 “문학은 구원이다”라는 클리셰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핵심 이유는 사람을 향한 관심,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계에 대한 미시적 관심입니다. 저는 주변성을 지닌 작은 한 사람, 혹은 집단에 대한 관심으로서 인문학을 나누고 싶은 것이지, 어떤 학문적 성취로서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한강 작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이번 수상을 두고도 일부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있었죠. 많은 분이 기독교인들은 ◯◯◯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는 식의 강박적 질문에 얽매여 있습니다. 가장 좋지 않은 형태의 질문이에요. 그런 질문에 같은 방식으로 답을 주는 것도 올바르지 않고요. 인문학의 핵심은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주체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성경적 같은 전제는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고 봐요. 기독교에는 기독교의 몫이 있고 인문학에는 인문학의 몫이 있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인문학을 더러 위험하다거나 반기독교적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얘기는 차라리 귀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더 우려하는 건 오히려 다른 지점이에요. 인문학을 아무런 노력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것쯤으로 여기고, 나 정도면 이미 갖추고 있는 손쉬운 교양 정도로 생각해 무시하는 경향이죠. 특별히 성경만을 강조하는 목회자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인문학 경시는 사람을 향한 경시, 세상에 대한 경시와 무관하지 않아요. 텍스트를 넘어 주변과 세상을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지적 근력을 기르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기초 작업 자체에 훨씬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흔히 주변성(marginality)과 경계성(borderline)을 혼용해서 사용하곤 하는데요. 제가 느끼는 공간적 심상으로 ‘주변성’은 말 그대로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낮은 자리 혹은 가장자리라는 이미지고, ‘경계성’은 중심과 주변 그 중간에 위치해서 다리를 놓는다는 이미지입니다. 이런 개념 정의를 용인하신다면, VIEWtiful 인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주변성(비주류의 자조 모임)인가요, 경계성(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다리 놓기)인가요, 혹은 둘 다인가요?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그 둘은 섞여있는 것 같아요. 제가 22년을 해외에서 살았거든요. 물리적으로 항상 ‘경계’라기보다는 ‘주변’에 있었죠. 이민자는 삶 자체로 늘 주변성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민자라는 주변성은 스스로 선택한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민 사회를 가만히 보면, 정서적으로 중심을 지향하고 그것과 자기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분도 있지만, 우리만의 무엇인가를 지키고 살아가면서 중심을 부러워하지 않는 분도 많아요.

이런 종류의 주변성은 어찌 보면 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그 안에서 부닥치는 숱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의 주변성도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필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VIEWtiful 인문학에서는 주변성에 대한 고민을 더 확대하고 강화해나가고 싶습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소수자이자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공유할 수 있고, 그 가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도 분명한 기대가 있어요.

굳이 따지자면, 지금까지 해온 모임은 ‘주변성’을 지닌 사람들끼리의 연대이자 자조 모임이었죠. VIEWtiful 인문학이라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론칭한다는 것은 이 모임을 조금 더 대중적으로 확장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말씀하신 ‘경계성’, 그러니까 둘을 이어주는 것은 ‘주변성’의 연대로 발생하는 부차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로 가능할지는 사실 미지의 영역이지만요.

2021년, 복음과상황 30주년 축하 영상 중에서. ⓒ복음과상황
2021년, 복음과상황 30주년 축하 영상 중에서. ⓒ복음과상황

- 주변성과 경계성을 굳이 나눠 질문을 드린 이유는, 교회와 세상의 간극보다 교회 안에서 소위 지식인과 비지식인 사이의 간극이 훨씬 더 커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인데요. 교회 안에서조차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의 넘나들이가 너무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양자 사이에 다리를 놓기보다는 갈라져 나가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인문학을 ‘잘’ 배우면 이런 문제도 해결이 될까요?

잘 배운 인문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애초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웃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이런 거죠. 얼마 전에 생면부지의 어떤 분으로부터 아주 현실적인 고민을 토로하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사실 이런 메시지들을 종종 받습니다. 분명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는 도저히 풀 수가 없고, 그렇다고 맘 편히 교회를 떠날 수도 없는 분들이죠. 그렇다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도 쉽지 않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인 겁니다.

어디에나 이렇게 고민하는 10퍼센트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VIEWtiful 인문학은 그분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 의식이자 오지랖이의 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고민이 틀리지 않았다, 계속 고민하며 걸어나갈 만한 가치가 있다’ 격려하고, 동기부여를 할 수 있도록 연대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사실 그분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저 스스로도 언제까지 여기서 가르치고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존의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모임을 만든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생존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같이 연대하자는 말이지요.

- 중심을 비판하면서 우리는 주변으로 가겠다고 선언하거나, 저들로부터 얼른 분리되어 나와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자고 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손 내밀어야 하는 진짜 ‘주변’은 우리가 ‘중심’이라고 부르는 그들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해봅니다. 주변인들의 자조 모임이 자칫 기존에 있었던 경계를 더 뚜렷하게 만들거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자신이 있는 곳을 재중심화하는 역설로 이어지지는 않을까요.

VIEWtiful 인문학이 그 정도로 파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저희 목표는 가늘고 길게 가는 겁니다.(웃음) 거듭 말씀드리지만,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물론 말씀하신 점이 소위 대조 공동체가 지닌 취약한 점은 맞습니다. 자칫 엘리트주의에 빠지기도 쉬울 것이고, 반대로 대중주의에 포섭될 위험도 있지요. 저는 그게 바람직하지는 않더라도 종교인의 숙명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주류를 지향하는 것만큼이나, 엘리트 의식을 갖고 주변에 머무는 것도 똑같은 의미에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매년 한국에서 한 달 정도 보내는데요. 흥미롭게도 매번 갈 때마다 저를 부르는 곳이 조금씩 달라지는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지난여름에는 무교회주의, 가나안 교인, 메노나이트, 수녀회 모임뿐만 아니라, 중대형 교회 목사님들 모임에도 갔는데요. 심지어는 어느 교회에서 3박 4일 부흥회도 하고 왔어요.(웃음) 의외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열리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연합 모임에 2박 3일간 초청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중심이라고 부르는 곳들도 다 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뿐만 아니라 잘나가는 듯 문제없어 보이는 교회, 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들도 고민이 있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저 같은 사람을 부를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형편은 다르지만, 고민의 모습은 똑같더라고요. 결국 사람에 대한 고민, 사랑에 대한 고민이고, 어떻게 교회가 한국 사회 안에 아름답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VIEWtiful 인문학이 기존 교회를 대체하는 ‘파라처치’가 아니라 교회와의 긴장 속에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프로처치’라는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문학과 교회가 반드시 적대적으로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일종의 완충적인 범퍼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큰 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그 안에서 고민하는 주변인들에게 ‘그래, 이 안에서 조금 더 버텨보자’ 하는 정도의 힘을 주는 연대 플랫폼이 될 수 있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인터뷰는 줌으로 진행되었다. 오른쪽은 본지 여운송 객원기자.
인터뷰는 줌으로 진행되었다. 오른쪽은 본지 여운송 객원기자.

진행 여운송 객원기자
본지 객원기자.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개신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성직 청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월간 그리스도교 서평지 〈엠마오〉의 기획위원으로도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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