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호 여정훈의 독서일기] 《아들을 경배함》

   
▲ ⓒ복음과상황

‘연대’에의 강요?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이 몸을 잔뜩 부풀린 복어 같았다. 한 쪽이 백만 명을 주장하자 다른 한 쪽은 천만을 외치기 시작했다. 내가 조국이냐 아니냐를 논하며 만 단위의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던 그 시간, 200여 명의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경상북도 어딘가에 있는 도로공사 로비에 앉아 몇 주간의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간이 외로웠던 이유는 세력을 자랑하는 양쪽 진영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동지들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처럼 진영의 반목이 아닌 ‘나’ 혹은 ‘우리’ 밖의 목소리를 인식할 수 없음에서 우리 시대의 슬픔은 비롯한다. 한병철이 여러 권의 얇은 책을 쓰며 지겹도록 반복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이제 외부에서 개인을 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 속 깊은 욕망으로 자리해 자아성취의 기쁨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크 피셔 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의 성취가 우리네 상상력을 사로잡아서 더 큰 만족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소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의 삶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기독교 철학자인 제임스 스미스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설교한 바 있다. 만족을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소비를 반복하는 삶의 형태는 예배가 되어 우리 마음을 훈련시켰고, 우리 시대 사람들은 그런 방식의 삶을 종말론적 차원에 두었다고. 그래서 다른 이의 목소리는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순수한 ‘나’를 왜곡하며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이에 따르면 연대를 구하는 목소리를 ‘연대에의 강요’로 받아들이고, 그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상식일 것이다.

얼마 전 읽은 대니얼 키팅의 《남들보다 더 불안한 사람들》은 스트레스 조절장애를 다룬 책이다. 키팅은 임신 중 어느 시점부터 출생 후 1년 사이의 기간 동안 받는 스트레스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다소 우울한 이야기를 한다. 그 시기 동안 생긴 유전자 차원의 변화가 스트레스 조절 시스템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못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합리적인 판단을 못 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당장 ‘대안’이 없을지라도…
최근 유럽과 미국에도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한 발 떨어져서 보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책들이 많이 소개됐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와 폴 블룸의 《공감의 배신》이 특히 그런 책들이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로슬링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만난 세대들을 향해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으니 걱정을 덜라고 호소했다. 폴 블룸은 정서적 공감만으로는 일을 그르치기 쉬우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을 하며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로슬링과 블룸의 의견에 마냥 끄덕일 수 없는 까닭이 있다. 며칠 전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한국노총과 함께 이끌어냈다는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도로공사 사이의 합의에 동의하지 못하고 여전히 기약 없는 기다림을 품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세상은 왜 그들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만을 약속하는가? 그들에게 물러서기만을 요구하는 체제는 그들의 스트레스 수치만을 높일 뿐이다. 이 스트레스를 명상으로 해결하면, 그들 앞에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나? 새로운 기회는 더 유연해진 일자리로 가는 첩경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유연한 일자리는 경쟁에 적합한 인간을 키워내는 교육을 촉진할 것이다. 이런 교육은 분명히 스트레스에 더 취약한 사람들을 길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나 만든 세상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변화를 위해 연대하는 일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개인들이 산산이 흩어진 세상은 플랫폼 산업으로 무장한 글로벌 기업들의 낙원이겠지.

여기까지가 요즘 지인들을 만나면 내가 자판기처럼 쏟아내는 얘기들이다. ‘대안이 있냐?’ 물으면 나는 ‘아니, 모르겠는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 최태섭이 《잉여사회》의 결론으로 ‘생존할 것’을 요구한 것을 보고 대체 어쩌잔 말이냐 하며 답답했던 적이 있는데, 이제는 내가 매사에 그 꼴이 되었다. 변화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양성해서 조직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세워야 할 텐데 이것은 단시간에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기회를 보며, 충분히 답답해하며,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으며 살아남아야 한다.

‘다른 세상’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양식
래리 허타도의 《아들을 경배함: 초창기 기독교 예배 의식 속의 예수》는 이렇게 다른 세상을 기다리는 이를 위한 ‘나그네의 양식’으로 손색이 없다. 허타도는 1세기 유대교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예수 경배가 아주 독특한 현상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에 대한 경배는 매우 이른 시기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천사들이나 인간 지도자들에 대한 유대교의 대우와 비교할 때 이례적인 사례였다. 천사나 지혜 같은 천상의 존재나 아무리 추앙받는 지도자도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향한 경배 방식이 유대교 내부에서 나타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는 ‘계시’라고 여길 만한 결정적이고 강렬한 종교적 체험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의 존재를 강렬하게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설 수 있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경배를 예수에게 드리며 그들은 담대해졌고, 더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되었다. 그 힘으로 그들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가능성을 본다.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체험이 그들을 불안과 조바심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더 관대한 사람이 되게 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사람들 역시 변화의 계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계기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먼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허타도의 가설이 옳다면, 우리 역시 그 하나님의 아들을 예배함으로써 새롭게 양육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예배는 우리에게 세상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는 훈련이다. 그 훈련은 다음과 같은 감각을 일깨워준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분과 본질을 공유하시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성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시고 사랑하셨다. 세상은 그를 미워하여 죽였으나 의인의 편이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고, 우리 또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 신실하신 약속으로 인하여 끝내 승리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만드시고 성자가 출몰하는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 충돌한다. 세상은 빅뱅으로 시작되었고, 인간은 진화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러면 어떤가?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지 체계 안에서 패러다임적 지식과 내러티브적 지식은 따로 작동하며 우리 정체성은 내러티브적 지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것을 안다면 성자가 출몰하는 세상을 향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여정훈
대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공부하던 중 공부에 재능 없음을 느끼고 기독교 시민단체에 취직한 후 자신이 일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을 만들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