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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살림이 먼저입니다
[353호 커버스토리]
[353호] 2020년 03월 19일 (목) 10:39:10 이재영 goscon@goscon.co.kr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1-5)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재난이 죄에 대한 심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불시에 재난을 당하여 회개할 기회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된다는 경고입니다. 재난이 우리가 하는 정죄의 당위성을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들이 어떤 죄로 죽었든 우리도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동일한 처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가장 적절한 시간은 바로 현재이며 회개의 우선적 주체는 항상 ‘나’이고 ‘우리’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자신의 옳음으로 여기는 착각이 만연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느라 자기에게 임한 위험은 낌새도 못 채는 기독교인들의 태평함이 안쓰럽습니다.
 

‘너희도 똑같이 망하리라’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면서 질병으로서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정신적·영적 바이러스가 만연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믿는다는 사람이 카카오톡 대화방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주여,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제발 주사파 정권이 무너지게 해주소서.” 공개적으로 올린 기도문인데 다른 사람들의 생명보다 자기가 추종하는 정치 성향이 더 중요한 최고의 선이요 의라는 착각에 빠져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인데, 마치 급진주의 이슬람 테러리스트식 주장과 닮아 있어서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지 않으실까요?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면적 이단자들입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안에 잠복해 있던 독종 바이러스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드러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이 사태 앞에서 회개를 종용하는 어떤 이들의 외침이 다른 사람들을 마음 놓고 정죄할 기회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의로움을 확인하려는 위선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자신의 죄부터 먼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언제든 임할 수 있는 심판 같은 재난의 위급성을 오히려 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이의 재난 가운데서 자신 또한 회개할 것은 없는지 찾아보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합니다.

중국 정부가 선교사들을 핍박하고 추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로 우한에 코로나19 사태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것은 무능한 좌파정권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난민들에게 온정 베풀기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는 일에 압력을 가하는 우파적 이기심은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실까요? 이 모든 말들의 공통된 특징은 “나/우리가 아니라 저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너희보다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하리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적·정치적 지향만이 유일무이한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 무례함조차 불사하는 것이 신앙적 충정인 양 착각하는 사람, 막말과 허위조작뉴스까지 1,000% 활용하면서 자기들의 뜻만 관철하려는 사람 중에 기독교인들의 독기 어린 어릿광대 모습이 단연 두드러진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고전 13:5)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마 5:43-44) 예수님께서는 만약에 원수가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망하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6:27-28) 우리가 빈 축복이 그에게서 합당하게 되는 날에는 형제를 얻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복이 기도한 사람의 몫이 될 터이니,(마 13:12-13) 이러나저러나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는 탁월한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인들은 예수님 말씀보다 자신들의 목표나 주장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그 또한 교묘하게 신앙적 명분으로 포장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찾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단언컨대,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하한 거룩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우상이 됩니다. ‘말씀의 실천’보다 ‘해석된 의미’에 빠지는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고, 본질보다 차이를 더 중시하는 차이의 우상숭배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들은 분열의 당위를 말하면서 줄기차게 분열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원수도 사랑해라, 가라지도 뽑지 말라는 것은, 분열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일절 없다는 뜻 아닐까요? 그래서 우파니 좌파니,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서로 적대하고 교회를 분열하는 일체의 행위도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의 진위성 여부는 말씀의 논리적 잣대가 아니라 사랑의 실체성이어야 합니다. 진리의 원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는 ‘실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의 실체성을 지향하며 그 종착지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의 사랑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기에 사랑 외에는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하는 말씀의 종착지를 향해 낮고 낮은 곳으로 계속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실체성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데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도 말이 아니라 몸(실상)으로 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 Panel 12, The Good Samaritan Window, Chartres Cathedral. (사진: 위키피디아)

강도보다 강도 만난 이웃을 보라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이 집단 발생하면서 병상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수련원이나 기도원 등 환자 수용이 가능한 건물이 있는 교회들은 앞장서서 건물을 제공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교회당까지도 환자 수용시설로 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성금 모금과 자원봉사에도 적극 나서야 합니다. 신자 개개인의 자원봉사만이 아니라 교회가 조직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모든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질 때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중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되느냐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요 4:21, 23)

또 예수께서는 화목하는 일을 예배의 전제 조건 즉, 우선하는 것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마 5:23-24) 

이웃들의 원망을 들으면서 교회당 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건 또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인데 위험을 무릅쓰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랑과 생명 살림을 위한 위험 감수일 때만 복음적 가치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 나간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병마를 피해 마을을 떠났지만 오로지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은 사람들만이 마을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전염되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에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표상입니다. 우리도 재난의 때를 당하여 시시비비나 책임 소재를 논하기에 앞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원죄가 이끈 재앙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 전염병은 10년 주기, 7년 주기… 점점 그 간격을 좁히면서 우리를 더 매섭게 위협할 것입니다. 인류가 이루어낸 첨단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갑니다. 통제 불능의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전염병뿐이겠습니까?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 파괴된 환경으로부터 오는 재앙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항상 두 얼굴을 지닙니다. 한 면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주지만, 다른 한 면은 그 대가로 빈곤과 재앙을 초래합니다. 기술 발전은 경제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실업은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어 오히려 경제의 발목을 잡습니다. 사람이 할 일을 점점 기계가 하게 되니 실업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린 도시는 편리함도 많이 있지만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에 취약합니다. 특히 세균전, 화학전, 자살폭탄 공격 등 여러 형태의 테러에 무방비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는 아파트의 구조와 삶의 방식은 정서불안과 각종 정신질환자를 양산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아프리카 정글 깊은 곳까지 도로를 내 온갖 희귀 야생동물을 포획하여 박제하거나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인간 사회와 안전거리를 충분히 둠으로써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던 세균과 바이러스가 이제는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예상할 수 없는 전염병에 걸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산업 발전에 따른 대기오염과 온난화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 지구를 만들었습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곳곳의 육지가 물에 잠기는가 하면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는 농작물과 인공사료로 사육되는 가축 등도 경제 시스템 안에서 탐욕의 수단이 됩니다. 그러니 몸에 좋지 않은 먹거리가 대부분입니다.

70억이 넘는 세계 인구가 먹을 식량은 충분하지만, 탐욕의 경제 시스템에 막혀서 지구 인구 3분의 1이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갑니다. 발전과 탐욕이 멈출 수 없는 톱니바퀴를 이루어 당면한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예기치 못한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절제되지 못하고 무책임한 발전 지향이 곧 죄임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원죄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원수·가라지도 함께 오를 피난 방주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까지 탐하므로 인류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탐욕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시면서 당신의 출현이 하나님 나라의 출현임을 역설하셨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게 된 원죄를 회개하고 참사람이 되어라, 여기에 참사람의 원형인 내가 너희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발전은 아편 같은 안락함을 안겨주면서 인류를 점점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변모됨으로써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갈 때 자연도 에덴의 모습으로 자연다워질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을 고대하는 자연(롬 8:19)이 걸어오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이 허락하는 것과 그들이 거절하는 것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달라이라마)

절약과 책임 있는 소비를 통해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년을 만들 때 자연의 안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점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개발과 정복이 능력이 아니라 서로 보호하고 함께 화평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요 질서 회복의 근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질서의 반대 또는 대안을 그냥 질서라 하지 않고 화평이라고 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 진정한 질서는 통제가 아니라 화평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류와 모든 피조물 사이에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8-19)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 하는 죄는 하나님처럼 되려 한 원죄임을 깊이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모습으로 우리의 삶과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합니다. 이제 곧 본격적인 재앙의 시대가 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곧 종말의 때가 와서 고난당하는 시기가 온다고 한 것입니다.(딤후 3:1-5) 지금이 그때임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때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가 금지되는 시대라고 합니다.(계 13:16-17) 우리가 성경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같은 재앙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발전 지향의 원죄를 회개하고 매매가 필요 없는 피난 방주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때에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대재앙들에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 오두막공동체에서는 이때를 대비하는 ‘생태자립마을 복지공동체’를 설계하고 꾸려나가는 중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탈(脫)바벨론 하지 않으면 모두가 같은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계 18:4) 우리는 충분히 대비하기 위해 속히 결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이 말하는 ‘소돔이 망한 진짜 이유’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합니다. 에스겔은 오늘날 우리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경고했습니다.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주하는 소돔이라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하지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의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겔 16:46-50)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긍하면서도 중요하고 세세한 주님의 말씀 실천은 경히 여기며, 교리에 대한 신봉만으로 구원에 이를 줄 믿고 여유작작하며 태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당할 심판적 재난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재난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강도보다 ‘강도 만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먼저 그리고 최선을 다해 베푸는 일입니다. 또 강도들이 우글대는 바벨론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원래적 삶의 장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피난 방주입니다. 나만을 위한 피난 방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웃과 자연 모두를 아우르는 방주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원수와 가라지도 함께 탈 자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판단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사랑의 길만 갈 때 우리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렇게 자유케 된 자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고자 찾고 계십니다. 

 

 

이재영
경남 합천에서 아내 최영희 권사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는 말씀에 따라 출소자, 중독자, 장애우 등 연약한 자들과 함께 생태자립마을 복지공동체를 꿈꾸며 살고 있다. 지난해 30여 년 공동체 이야기를 담은 책 《오두막》을 출간했다. 본지 309호(2016년 8월호)에 인터뷰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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