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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와 예배 취소 논란
[353호 커버스토리]
[353호] 2020년 03월 19일 (목) 10:48:34 박영돈 goscon@goscon.co.kr

주일예배를 폐하다니!
주일예배 시간인데 평소 꽉 찼던 예배당에 교인 몇 사람만 앉아 있고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설교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얼마 전에 내가 꾼 꿈이다. 그런데 지난주, 그 꿈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예배 순서를 맡은 교인과 사역자 등 소수의 사람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 나머지 교인들은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했다. 신통한 능력이 있지 않은 내 꿈은 대부분 개꿈이나, 이번엔 우연히 들어맞았다. 나는 지난주에 평생 처음 경험해 보는 주일예배를 드렸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교회가 주일예배로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예배로 전환하는 것을 꺼리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린다. 이에 관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얼마 전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1%가 주일예배로 모이지 않는 것에 찬성했다고 한다. 신앙의 연륜이 깊을수록 반대가 많았고, 초신자일수록 찬성하는 비율이 높았다.

한 원로목사는 예배 모임을 취소한다는 교회의 결정을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교회가 함께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예배까지 폐하며 의학적인 관점으로만 바이러스 확산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큰 하나님의 징벌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 목사는 강직하고 개혁적이며 순수하신 분이다.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의식이 있고 상식이 통하는 분이다. 그런데도 예배 모임을 취소하는 것에 관해선 전혀 유연성이 없어 보인다.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답답하고 완고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꼴통 보수적인 사고라고 말하는 이도 더러 있다.


그럼에도 성급하게 판단하여 정죄하기보다는 좀 더 차분하게 그분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연배의 목사와 교인들은 어떤 난관과 핍박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일예배는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으로 평생 하나님을 섬겨왔다. 신앙인이라면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주일예배를 드려야 마땅한데,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는 가면서, 마트와 식당은 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남짓 드리는 예배를 취소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쉽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분들의 이런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온라인 예배는 매우 낯설다. 주일예배를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예배를 지속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우리 신앙의 선진들이 생명처럼 여겨온 주일예배를 쉽게 포기할 수 있냐는 그들의 우려 역시 교회는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온라인 예배가 회집 예배를 대체할 수 있는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번에 주일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기로 한 교회는 대부분 예배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에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또한 모이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에 미치게 될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피해까지 깊이 우려하고 있다. 온라인 예배가 회집 예배를 온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을 것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이러한 예배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이번 사태가 하루속히 종식되어 예배가 원상 복구되기를 원하며, 이후에 교인들이 온라인 예배를 선호하는 편리주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예배 취소가 불가피하고도 지혜로운 결정인가
그럼에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 상황에 대한 고려 때문이다. 치사율이 높지 않은 전염병에 걸리는 것이 두려워 예배까지 포기하기를 원하는 목사와 신자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신천지 교회 모임을 통한 급속한 바이러스 확산으로 교회마저 그들과 한 부류로 비난받고 교회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될 수 있다는 위험이 더 두려운 상황이다. 그리하여 신천지 이단이 온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한 데 교회가 일말의 책임을 통감하며 이 사회에 교회의 이름으로 피해와 불안을 더 가중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이 불가피했다. 이는 단순히 이 사회의 공공선을 도모할 뿐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도 적합한 결정이었다.

어떤 교회는 주일예배로 모였다가 신천지 확진자와 접촉하여 감염된 교인 사례가 생겨나 아예 폐쇄되었고, 사회에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 사과해야만 했다. 이런 일은 교회의 사회적 영향과 이미지를 깎아 먹는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교회가 이웃과 사회의 안녕은 아랑곳하지 않는 반사회적 집단으로 찍혀 전도 활동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결정은 자신이 아플까 두려워하기보다 이웃과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이웃사랑의 실천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재난을 극복하는 일에 교회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교회의 이미지가 사회에서 실추되지 않게 하려는 교회 사랑 역시 짙게 깔려 있다. 그리하여 주일예배를 한시적으로 비정규적인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어떤 목사가 허공에 대고 설교하기를 바라며 아무도 모이지 않는 적막한 예배당을 혼자 지키고 있기를 원하겠는가. 나는 처음으로 교인들이 모이지 못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면서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상호이해와 배려
이번 사태로 인해 예배 논란은 계속될 것 같다. 비록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의 입장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는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주일예배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모두 수구꼴통이며 신천지와 다를 바 없다고 섣불리 정죄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들은 꽉 막힌 사람들이고, 온라인 예배로 재빨리 전환한 이들은 의식 있고 깨인 사람들이라고 단순 대조하는 경솔함은 피해야 한다. 물론 정치적인 목적이나 헌금 등 순수하지 못한 이유로 모임을 강행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반대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믿음이 없거나 대세에 편승하여 신앙을 타협하는 일이라 비난하는 일도 지양해야 한다.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는 비굴한 행위라고 단죄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신천지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정부도 교회 모임과 집회를 자제해달라고 특별히 호소했고 교회가 자진해서 그 지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종교 탄압’으로, 그리고 그에 ‘굴하는’ 자세로 보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다.

우리가 모두 깊이 숙고하며 내린 결정이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재난 앞에서 더 숙성된 논의와 이해에 도달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각자 나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여 서로를 정죄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건 혐오와 반목의 바이러스이다. 또한 어떤 입장을 모든 교회에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여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 지역에 따라, 교회의 특성과 규모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적용될 수 있다. 대형 교회일수록 온라인 예배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라면 교인 수가 적은 교회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 형태까지 폐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교회는 최근 몇 주간 이뤄진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대비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 후에 교회는 왜 온라인이 아니라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관해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온라인 예배, 모이는 예배를 대체할 수 있나
이번 코로나 사태는 온라인 예배에 관한 신학적인 성찰을 촉구한다.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가 과연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대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교회가 전근대적인 예배의 형태만을 고집하는 데서 벗어나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예배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미국에는 예배뿐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 사역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대형 교회가 등장했다. 라이프 처치(Life Church)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새들백교회나 갈보리교회 같은 대형 교회의 많은 교인은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한다. 이런 온라인 예배로의 전환에 대해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가장 보편적으로 제기되는 반론은 온라인이라는 가상 공간에서는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에 대해 온라인 예배를 옹호하는 이들은 공동체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 비록 교인들이 육체적으로 함께하지 않으며 얼굴로 서로 대면하지 못해도 인터넷상으로 정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지속해서 유지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물론 육체적으로 모인다고 정서적이고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 함께했더라도 서로 깊은 교감 없이 피상적인 만남과 교제만 지속할 수 있다. 특별히 대형 교회에서는 거대한 청중의 한 사람으로 모였다가 예배가 끝나면 군중 속에 이름 없는 얼굴로 각자 뿔뿔이 흩어진다. 그렇게 교제가 심각하게 결핍된 현대 교회에서 가상공간은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그것이 온라인 소통의 유익이다.

동시에 온라인으로만 하는 교제는 인격적인 실체에 접촉하지 못하는 가상적 만남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서적인 교류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다. 육체성이 배제된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란 사실 도세틱(docetic) 인간 이해를 전제하지 않는 한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 육체는 인격이 밖으로 표출되어 타자를 대면하고 접촉하는 자아이다. 시공간 속에 육체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인격적인 교제의 기초이다. 영상을 통해서는 결코 전달될 수 없는 영혼의 신비가 우리 눈빛에서 흘러나온다. 서로의 육체를 통해 몸짓 언어를 전달하며 감정의 소리를 발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함께 식사하면서 깊은 교감과 유대 관계를 체험한다. 같은 시공간에 육체적으로 함께할 때 우리는 영육 통일체로서 전인적인 교제를 누린다.

온라인 예배가 훨씬 낫다?
교회의 대형화로 성도의 진정한 교제와 공동체적 친밀함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은 온라인 예배가 성행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다. 전에 한 대형 교회에 갔을 때 동네 주변에 흩어진 별관 예배실에 들어가 회색빛 벽을 바라보고 예배드렸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설교자와의 인격적인 교류는 물론 교인들 간의 친밀한 교제도 없었다. 교인들이 벽만 보고 삭막한 예배를 드린 후에 옆 사람과 가벼운 인사 정도 나누고 뿔뿔이 흩어졌다. 주차하기도 힘들었고 예배 후 차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는 데만 30분 넘게 걸렸다. 예배가 아니라 고행이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나았을 뻔했다. 

또 다른 대형 교회에 갔을 때는 4부 예배인데 강대상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설교자는 없었고 그전 예배 시간에 한 설교를 영상으로 재방하고 있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다른 교회에 헌신 예배 설교를 하러 갔다고 했다. 참 씁쓸했다. 이런 예배를 드릴 바에는 왔다 갔다 하는 시간 소비하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백번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극단적인 사례만 들어 대형 교회를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다. 대형 교회 안에도 활발한 모임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소그룹이나 셀, 가정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교제는 대개 소수의 인원에 국한될 뿐 나머지 대다수의 교인과는 단절되어 있다. 셀이나 가정 교회는 대형 교회라는 집단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목사가 자신이 목양하는 교인들이 누군지조차 모르며 교인들이 서로 낯선 군중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교회에서 진정한 예배와 교제란 불가능하다. 거기서 드리는 예배에서 교인들은 무대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감상하는 관람객이나 청중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인격적인 교제와 공동체의 친밀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모이나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나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온라인 예배가 오히려 번거로움과 수고를 덜고 더 편하게 예배드리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온라인 예배는 오늘날 공동체성을 상실한 교회의 부산물인 셈이다.
 

온라인 예배가 유용할 때
모여서 예배드리기를 힘쓰는 교회에도 온라인 예배가 유용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다. 우리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다. 첨단 미디어의 놀라운 기능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신자들이 영상으로 같은 설교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것을 가능케 했다. 교회가 이런 기술 문명을 지혜롭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감염 확산을 막음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과 교회의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 흩어져 예배드린다면,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잘 아시는 성령께서 온라인 예배를 특별한 은혜의 매체로 사용하실 것이다.

또한 온라인 예배는 출타나 입원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배당에 오지 못하는 교인들이 주일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 더불어 교인들이 주중에 세상 속에 흩어져서도 서로 교제하며 결속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서로 안부를 묻고 격려하며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교제의 채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교제의 폭과 장을 주일 모임에서 주중의 흩어진 삶으로까지 확장해줄 수 있다. 이런 온라인 예배의 유익과 가치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온라인 예배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온라인상의 교제는 매주 함께 모여 누리는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에 깊이 뿌리내릴 때 단순히 가상 공간 속 만남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를 연장하고 심화하는 장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모이는 것을 자제해야 할 때 드리는 영상예배는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모이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음에도 게으름이나 편리주의에 빠져서 모이기를 폐하고 영상예배로 때우는 것은 주님이 받으실 수 없는 불성실하고 진정성이 결여된 예배가 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영상예배를 택하는 이유가 단순히 편리주의나 개인주의에 치우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함께하고 싶은 건강한 공동체를 발견하기 힘들어서 그러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큰 교회뿐 아니라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와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대형 교회가 가질 수 없는 작은 교회만의 큰 장점이다. 그러나 인격이 덜 된 목사와 교인들이 모여 부대끼는 작은 교회는 인간의 부패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갈등과 고통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작은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친밀한 교제가 없어도 상처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대형 교회로 옮기거나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기성 교회를 견디지 못해 떠난 가나안 교인 중에도 영상예배를 드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지 못한 데 있다. 한국교회 앞에 놓인 시급하면서도 중대한 과제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이다.
 

왜 모여야 하나?
그러면 우리는 왜 모여야 하는가? 우리가 모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모으시는 데 대한 반응이자 응답이다. 보통 세상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예배할 대상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할 사람을 친히 선택하시고 부르신다. 그리고 예배자의 자격을 부여해주신다. 교회는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속되고 의롭게 되며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자매들이 하늘 아버지 앞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가족 모임이며 밥상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한 가족은 식탁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장차 완성될 그 나라를 함께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밥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말씀을 나눈다.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를 나눈다. 우리가 가장 친밀해지고 무장 해제되는 곳이 바로 밥상이다. 교회의 성찬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상징한다. 성찬의 자리에서 지상의 떡과 하늘의 떡이 결합된다. 따라서 제임스 스미스가 말했듯이 “기독교의 예배는 불가피하게 물질적이며 육체적이다.”

신앙생활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함께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서로를 섬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간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양해가는 성화는 교제와 공동체의 토양에서만 이루어진다.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나누며 그 말씀대로 사는 실천을 훈련함으로 함께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공동체로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접붙임 받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그 몸의 한 지체가 되지 않는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 분리되는 것은 마치 신체로부터 잘려 나간 손발처럼 흉측하게 손상된 실존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라고 부르셨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하게 하셨다. 

공동예배는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체현하는 중요한 장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사귐이라는 현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복음의 진리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어간다. 제임스 스미스가 말했듯이 예전은 형성적인 기능을 한다. 반복되는 예전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며 추구하는 습관과 성향을 우리 몸에 아로새김으로 행동과 삶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우리를 형성해간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그의 몸 안에 약동하는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에 포획되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활동을 구체화하는 미션을 수행한다.

모임과 흩어짐의 역학
예배로의 부르심과 세상으로 보내심은 성령 안에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자라도록 예배와 교제로 불러 모으시는 동시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능하도록 보내신다. 모이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교제, 양육을 통해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활동을 구체화하는 주님의 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모이는 교회 없이 흩어지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요즘 흩어지는 교회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모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모임과 흩어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두 축이다. 한쪽이 무시되고 약화할 때 교회는 불구가 된다.

모이는 교회에서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건강한 몸으로 자라가지 않으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흩어지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모이는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이로 신자를 구비하고 양육하는 훈련의 장이며 그 에너지와 동력을 공급하는 영적인 발전소와 같은 기능을 한다. 우리가 모여서 행하는 예배와 교제, 성례, 봉사, 양육은 궁극적으로 교회 안에 갇힌 신앙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의 미션을 지향한다. 이 모든 일이 함께 모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위력은 모이는 데 있다. 공산주의 국가가 교회를 말살하는 방법은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서구 교회는 개인주의와 편리주의에 빠져 스스로 모이기를 폐함으로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매주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므로 삼위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교회가 매주 모여 성령의 영광과 권능이 가득한 성전됨을 체험하지 못하기에 세상에서 샬롬을 강처럼 흘러가게 하는 이동 성전, 흩어지는 교회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교회가 모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과연 그동안 우리가 모이는 성전으로서 제대로 기능했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성령이 도저히 함께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말씀이 텅 빈 설교, 성령을 거스르고 근심시키는 목사, 하나님 나라와 의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세상의 번영과 평안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이용하려는 무리로 가득한 교회의 예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가득한 성전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탄식 소리가 가득할 뿐이다. 성전을 세상 탐심으로 가득한 장사꾼의 소굴로 더럽힐 때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그 성전을 멸하신다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기억하고, 우리 자신과 교회를 성령이 충만히 거할 수 있는 성전으로 정결케 해야 할 것이다. 

 

 

박영돈
미국에서 칼빈 신학교, 풀러 신학교, 예일 대학교,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했다(Ph. D). 고려신학대학원에서 22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다가 지금은 작은목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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