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호 이슈 톺아보기] 낙태죄 이슈에 관한 기독윤리학자의 제언

윤리, 누가 만들었나?
윤리’(倫理)란 공동체(사회)를 다스리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원리를 열심히 습득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려는 윤리적인 사람들이 정작 놓치는 것이 있다. 그 원리가 이미 주어진 것인지 만든 것인지, 만들었다면 누가 만든 것인지를 성찰적으로 묻는 작업이다. 자연법칙과 다르게 사람이 모여 사는 원리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신률’(神律)로 절대화하는 윤리 규범들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이를 계시로 받은 사람은 보편성공정성의 원칙을 지킨 채 온전히 법령을 전달했는지 물어야 한다. 이는 윤리가 적용되는 과정에서 생명과 행복을 위협당하는 피해자들을 발견하기 위함이고, 그들이 배제되고 착취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자주 사용하는 사례가 십계명 마지막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들어가 공동체적 합의를 했던 이스라엘의 절대적 계명이었다. 신분제 사회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던 이들이 사람을 귀족과 천민의 수직 위계로 나누지 않고 모두 이웃이라고 응시하고 호칭했다는 것부터가 놀랍다. 왕과 같은 권력자라고 함부로 남의 아내를 빼앗는 행위를 하는 것은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일 수 없다는 금지 명령이다. “, 하나님께서 주신원칙이라서, 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서, 이리 보편적이고 공정했구나!” 감탄할 만하다. 성경 윤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위 각론인 셈인데, 바로 뒤에 네 이웃의 소유에 해당하는 목록이 등장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2017)

이 모두가 신률일까? 아니면 어디까지가 신률인가? 21세기 시민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라면 어느 부분이 만든 것인지, ‘누가만든 것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다. “, 자유인 남자가 가산(家産)을 갖는 주체라는데 이의가 없는 공동체에서 자유인 남자가 신률의 권위를 가지고 자유인 남자들에게 선포한 내용이구나!” 그래서 이 공동체에서 윤리적 선택의 옳고 그름은 이웃의 아내나 남종, 여종, , 나귀를 빼앗거나 상해를 입힌 문제만 논의 대상이 된다. 아내나 남종, 여종이 과연 소유 목록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없다. 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없다면 공동체의 답도 없는 법. 그렇기에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고 새벽에 내팽개친 베냐민 지파 부랑아들의 행동에서 패륜의 피해자는 레위인의 첩이 아니라 레위인이 된다. 남자들이 분노한 것은 여자가 당한 수치와 공포가 아니다. ‘감히이웃의 가산을 폭력적으로 침해한 부분이다. 열한 지파가 합력하여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는 과정 중에 강간·살해에 토막까지 쳐진 여성의 생명권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19-21장 참조)

그러니 신률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률(人律)과 구별하는 작업은 기독교 윤리에서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나는 ’()’()를 구별하자고 제안해왔다.*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유한성을 초월하여 모두가 이웃이라는 말씀은 분명 신률이요 이다.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특수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걸 받아 적고 공동체에서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던 사람들, 즉 남자요 가산을 소유한 주인들은 특수한 입장에서 수많은 를 윤리 목록에 더했다. 물론 모든 에 위배된다거나 거짓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는 분명 시대적 한계와 계층 혹은 성차별적 제한성을 가진다. 그래서 윤리 규범의 는 새 시대 새 사람들에 의해(물론 은 제대로 잡고서) 늘 새롭게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 ‘경’은 인간이 만든 유한성을 초월하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복음, 즉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서’는 경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시대, 문화,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세부 항목이다. -필자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이 진행한 ‘그리스도인x낙태죄 완전폐지 기자회견’이 지난 10월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렸다. 이들은 “사람을 처벌하고 통제하는 법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살피고 지원하는 법”을 요구했다. Ⓒ복음과상황 김다혜
성과재생산크리스천포럼이 진행한 ‘그리스도인x낙태죄 완전폐지 기자회견’이 지난 10월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렸다. 이들은 “사람을 처벌하고 통제하는 법이 아닌 사람의 삶을 살피고 지원하는 법”을 요구했다. Ⓒ복음과상황 김다혜

살인하지 말라! 누구의 생명을?
이 이야기가 도대체 낙태죄를 없애자는 세간의 발칙한시도에 신앙의 이름으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윤리 선언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살인하지 말라는 것,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이 땅에서 풍성하게 살아내라는 것, 이는 만들어진 것도 더해진 것도 아닌 이요 신률이 아닌가? 맞다. “살려내라.” “생명을 지켜라.” 이건 명백히 이다. ‘신률이다. 신앙인이 받은 말씀’(계시)이다. 인간의 모든 특수성과 유한성을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권리이고 의무이다. 다만, 제도를 짓고 살아가면서 어떤생명만을 옹호하고 어떤생명은 가리고 버리고 착취해온 것이 인간 역사였다. 그렇다면 낙태혹은 임신 중단의 문제로 갈등하는 오늘, 기독교 윤리는 무엇을 의 이름으로 사수하고 무엇을 의 이름으로 재고(再考)해야 하는 것일까?

2기 여성주의 물결이라고 불리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낙태죄 폐지 논쟁은 성() 해방 운동의 맥락 안에서 등장했다. 여성의 성을 오직 재생산 안에 가두는 것은 가부장 제도의 특수 윤리라는 깨달음에서 온 저항이었다. 오랜 사회적 논쟁 끝에 서구 시민사회가 결국 임신 중단문제를 형사 처벌의 항목에서 제외한 까닭은 기가 센 여자들에게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들이 비로소공동체의 법적 합의 과정에 주체적 목소리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공동체적 다스림의 원리가 변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적 시민사회의 인권 신장과정이었다는 말이다. 한때 사람으로 온전한 권리를 존중받지 못했던 흑인, 노예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동등하게들려지고 반영되면서, ‘의 규범들이 바뀌게 된 것이다. ‘드디어여성도 사람으로서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주체가 되었다.

이 입장의 지지자들은 보통 프로-초이스’(pro-choice)로 소개된다. 당사자들 역시 그 언어를 사용하여 윤리적 입장을 어필한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가부장제 안에서 주체이기를 거부당했던 여성들, 그래서 아기 주머니’ ‘정액 봉지정도의 응시와 대접을 받던 여성들이 한 인간으로서 주체 선언을 하려니 선택이라는 단어가 핵심어가 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선택을 곧 태아를 죽일 권리와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물론 선택권을 주장한 여성들은 임신 중단을 선택할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고 했다. 내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하지만 선택권으로 번역된 영어 ‘Procreative choice’란 정확히 재생산권에 대한 전반적인 선택 권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그 선택 안에는 임신 중단만이 아니라 임신 지속과 출산을 포함하여 재생산(임신)과 관련된 모든 선택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낙태 선택이라고 번역해버리고, 이를 자유냐 살인이냐는 극단적 논쟁으로 몰고 간 것은 옳지도, 온전치도 못한 일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라. 임신 상태를 이어갈지 중단할지 그 최종 결정을 임산부가 할 수 있게 하라.” 이 윤리 명령을 들었을 때 겁을 먹을 사람, 불편해할 사람은 누구인가? 만약 개별 여성이 재생산권을 함부로남용하여 태아에 대한 살인을 저지를까 봐 신앙인으로서 우려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시급하게 물어야 하는 윤리적 질문은 형사 처벌로서의 낙태죄 존속 여부가 아니다. “여성은 언제 자신의 임신 상태를 중단하기 원하는가?” 이 질문이 먼저다. 옷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태아를 떼어내는 여성은 없다(만약 그런 가벼움이 있다면 이는 생명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이며 또 다른 윤리 논쟁의 영역이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임신 상태를 중단하기 원한다면 이는 살아내려는자신의 생명권이 위협당하는 위기 상황임을 시사한다.

산모와 아기의 공존은 매우 독특한 공생 관계이다. 보통 개체 생명은 독립생존이 가능한 경계를 가지는 법인데, 임신 상태에 있는 동안 여성은 개체 생명으로서의 경계가 중첩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건 태아도 마찬가지이다. 출생과 더불어 개체 생명으로 분리되어 나오기 전까지 태아의 생존은 어머니 몸이 공급하는 영양과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임신을 지속할 것이냐 중단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여성의 몸은 다른 어떤 생명 충돌의 현장보다도 긴급하고 치열한 전장(戰場)이다. 그러니까 임신 중단문제는 자유나 살인이냐가 아니라 생명권과 생명권이 불가역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처절한 윤리 선택의 영역이다.

 

생명권 대 생명권, 생명 선택의 원칙
윤리학은 선택 앞에 놓인 사회 구성원들에게 올바른원칙과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 그야말로 어렵고 무거운 책무이다. 더구나 생명권의 충돌과 같은 불가역적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윤리학자라고 해도 개인의 생각에 전문가의 권위를 얹어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윤리학자 자신도 자기가 주장하는 원칙과 규범을 놓고 끊임없이 를 구별하기 위한 싸움과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내 경우 이 투쟁에서 에너지를 아끼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그리스도인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을 먼저 찾아내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게 합의되어야 이후 머리를 맞대고 를 만들어내는 지점을 구체화하고 좁힐 수 있다. “여성을 온전한 주체로, 생명으로 응시하자.” 이것은 인가? 답이 예스라면, 임신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는 결코 형사 처벌의 영역일 수 없다는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는 임신 상태에 있는 자기 생명의 지속 여부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태아의 생명은 어떻게 지키라는 건가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기독교 윤리적 이다. 태아는 생명인가? 몇 주부터 온전한 생명인가? 의료계의 보편적 합의와 별도로 신앙인들은 태아의 주수와 상관없이 수정되는 순간부터 생명으로 받아들인다. 생명의 기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나에겐 선물이 아니에요. 내 사회적 생명과 물리적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라구요!” 이렇게 선언하는 교회 자매를 비윤리적으로 내몰기 위해 태아 생명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태고지(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할 것임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편집자)를 듣자마자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한 마리아처럼 주류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태아가 모태에 존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생명이라는 신앙고백을 해왔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실은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던지고자 함이다.

태아의 생명권을 지켜야 한다면서 지금 낙태죄 폐지에 대해 신앙의 이름으로 발끈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1973년에 소위 모자보건법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 살인에 대해서는 침묵했는가? “우생학적 혹은 유전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부모일 경우, 특수 전염성 질환이 있을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이나 친인척 간인 경우, 이하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치고 있는 경우”(모자보건법 제 8)라는 살인 허가 법령은 왜 가만히 두는가 말이다. 정신 질환을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태아는 생명이 아닌가? 친오빠 혹은 친아빠에 의한 임신이면 태아 살해가 정당화되는가? 실은 가려졌을 뿐, 인류는 계속해서 생명권을 놓고 선택이라는 것을 해왔다. 그리고 생명 선택의 기준은 임산부 당사자 입장이 아니라, 전염병이 두렵고 기존의 시스템이 약화되거나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드는 구성원의 출생을 기피하는 기득권자들의 선택이 반영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질문은, 이번에 제안된 낙태죄 개정안에 사회적 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15-24주 이내’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상담이나 ‘24시간의 숙려기간등이 더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안전한 의료 환경과 임산부 생명의 질은 확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형사 처벌의 문제로 접근하는 한, 우리는 결국 살인의 정당성을 선택하는 기준에 합의를 할 뿐이다.

아니,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적 은 모든 아기를 다 낳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임신 중단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행여 형사 처벌을 피한다고 해도 신앙적으로는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다. 방점이 틀렸다. 기독교 윤리의 입장에서 낙태혹은 임신 중단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면 이를 살아라살려라가 충돌하는 생명 선택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코 생명과 살인 사이의 택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를 선택하고 가까스로 살아낸 임산부라면 위로하고, ‘를 살려내는 선택을 한 임산부라면 격려하자는 말이다. 그 어느 쪽도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임산부가 살아내는 일살려내는 일사이에서 전쟁과도 같은 사투를 겪는 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하는 가 있다면 두 생명의 공존 가능성을 높이는 생명 지지의 네트워킹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임산부가 자신의 생명으로 살아내면서도 태아를 살려내는선택을 기꺼이 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말이다. ‘윤리적 책무이거나 법적 제한이어서 억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심리학적, 사회경제적, 신앙적 보호 속에서 안전감을 느끼고 관계적 힘을 믿으며 자발적으로 공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이다. 그럼에도 만약 임산부가 임신 중단을 선택했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괴감은 그 여성의 선택에 우리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음에 대한 것이어야지, 그 여성의 선택을 비윤리적이라거나 불법으로 규정하는 쪽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낙태죄 개정안을 놓고 한 두 조항을 더하거나 빼는 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한 생명 사수를 천명하며 정작 다른 생명이 물리적, 사회적으로 잔인하게 죽어가는 것은 외면하는 신앙인들을 직면하여,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내가 고백하는 의 제안은 여기까지이다. 이제 남은 에너지는 생명의 네트워킹을 만드는 일에 쏟게 되기를.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회 및 시민단체에서도 강연하며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드라마 속 윤, 》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등이 있다. 상호주체적 성경읽기로 평신도들을 초대하고자 유튜브 채널 so young한 인문신학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공저 포스트 코로나 사회》 《혐오와 한국 교회와 신간 드라마에서 긷는 영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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