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호 이슈 톺아보기]

* 이 글은 2020년 12월 8일 국회 법사위 주최로 열린 〈낙태죄 관련 공청회〉에서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종교인 자격으로 진술인으로 참여하며 발표한 글입니다. 개신교 신학자가 입법 기관인 국회라는 공적 공간에서 신학적 입장을 발표한 드문 기회였기에, 발표문의 추가 보완이나 수정 없이 그대로 싣습니다. - 필자

 

저는 오늘 낙태죄개정 관련 공청회에 그리스도교 윤리신학자로서는 드물게 낙태죄 전면 폐지 측의 진술인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진술이 낙태법 존치에 앞장서 온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교회의 일반적 입장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윤리신학적으로도 다른 관점과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법 관계자 및 국민 여러분께 알려드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인간의 실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옳고 그름의 명백한 기준을 신학적으로 논하는 학문이지만, 실제로 훨씬 많은 경우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명백하지 않아 매우 어려운 윤리적 난제 혹은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을 다룹니다. 낙태 혹은 임신중지로 부르는 이 행위도 그에 속합니다. 그러나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일수록 가치 판단의 장에서 이해 당자사들 간의 형평성이 깨져 있기 쉽습니다. 판단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전통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딜레마 상황을 모면하는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이에 오늘 저는 확실한 편들기를 하려고 합니다.

원치 않는 임신이나 위험한 임신으로 임신중단을 고려하는 여성에게 태아의 생명을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도덕적으로매우 옳은 말 같이 들리지만, ‘윤리신학적으로너무나 원론적이어서 복잡한 인간실존의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말입니다. 특히 임신이 본래부터혹은 더 이상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하거나 헌신한 이들의 관점에서 낙태법 전면 폐지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일은, 실제로는 자신들은 지킬 수도, 지킬 필요도 없는 법을 통해 수많은 가임 여성들의 생명과 삶이 국가 권력에 의해 근본적으로 통제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한 통제는 특히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적 선택을 할 조건이 충분치 않은 빈곤 여성들, 청소녀들, 장애인 여성들, 친족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자들에게 훨씬 잔인하게 이루어집니다. 이에, 인간 실존의 고통을 최초 인류 조상의 타락에서부터 해석하는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낙태법 전면 폐지가 어떻게 주장될 수 있으며, 나아가 이 법의 폐지야말로 여성과 태아 모두의 생명과 삶을 실제적으로 더 많이 살릴 뿐 아니라, 오히려 주체적이고 윤리적 모성을 확산하는 일의 진정한 출발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낙태죄에 힘을 실어온 가부장적 그리스도교 신학 해석
첫째, 낙태법 (전면) 폐지에 반대하는 전통적 입장은 임신중지를 태아의 생명권을 빼앗는 여성의 이기적인 자기결정이라고 비난합니다. 인간의 도덕에서 성인이 소인을, 강자가 약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배려하는 일은 당연히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를 지키지 못했거나 포기했다고 해서 임부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당연한 것인가는 윤리학적으로 분리하여 따져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기성을 윤리학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논리상 그 행위의 발생 원인과 책임 한도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임신은 여성과 남성의 양자 간 성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노력과 책임을 여성에게 전적으로 부담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모든 노력과 책임을 다해 임신을 방지하려고 해도, 임신을 완전히 통제하여 막기란 영구적 불임술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임신을 원치 않는 기간에 일어나는 매회의 성관계마다 남성 파트너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 원치 않는 임신을 완벽하게 방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현재 음성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낙태술의 과반수 이상이 친숙하고 안정적인 관계(연인 및 부부 간의 성관계)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성적 만족도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피임에 부주의하거나 안일하게 대처하는 남성 파트너의 태도야말로 원치 않는 임신발생의 최소 50%에서 최대 100% 원인제공자임을 분명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원치 않는 임신의 중단을 실행하는 이에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최소한 논리적으로 말이 되려면, 그 임신을 유발한 성관계 양자 모두의 이기성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공평하게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책임의 분배를 완벽하게 따지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임신 책임을 제대로 따지기 위해서는 성적 관계를 맺는 각각의 남녀 관계의 특수성뿐 아니라, 임신을 유발한 바로 그해당 성관계의 특수성을 따져야 하는데 그야말로 천 가지, 만 가지의 특수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 모든 임신과 관련하여 임신의 원인과 책임을 따져서 임신중단의 이기성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임신중지를 태아의 생명권을 빼앗고자 하는 여성들의 이기적인 자기결정으로 비난하는 전통적 입장은, 여성주의가 오랫동안 지적해왔듯이 여성의 생명 감수성과 이타성을 깨우치게 하려는 인류의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임신의 원인과 임신중단의 상황에 대한 남성 파트너의 마땅한 책임을 교묘하게 은폐하려 했던 불순한 의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여성에게만 이기적이라는 도덕적 비난을 퍼붓거나, 나아가 형법상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라고 규정해 온 기존의 관례는 여성의 존재론적 위치를 언제나 남성보다 못한 제2등 시민으로 묶어 놓는 가부장적 사회의 무수히 많은 관습과 제도, 그리고 법과 탄탄히 얽혀 인간으로서 여성의 생명과 삶에 대한 권리를 전방위에서 차별하는 결정적인 악습이자 악법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고백해야 할 것은 가부장적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권이 이러한 악습과 악법의 탄생과 유지에 상당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가부장적 경향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전통 신학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첫 범죄에서 여성 하와에게 책임의 상당 부분 혹은 전부를 돌려 탓하는 비겁한 면모를 매우 오랫동안 보여 왔습니다.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낙태법 폐지 반대운동은 태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신앙의 행위이기보다 여성의 존재를 남성의 성적 유혹자로서 폄하하고 여성의 존재 목적을 출산과 양육의 기능으로만 단순하게 해석해 온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태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창조주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다면, 입양 문화를 혁신적으로 개선하거나 미혼모·비혼부 가정을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환대·지지하고, 나아가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사회적 여건을 획기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 정책을 정부가 만들어 내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힘을 모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할 수 있는 대안적 활동을 진지하게 펼쳐보려는 태도 없이, 낙태법 폐지 반대운동에 간단히 서명하는 일이 태아를 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일은 결국 서명서를 모아 정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보수적 교권 세력에 동조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여성들의 상황을 냉정하게 외면하여 불법적이고 위험한 음성적 낙태술로 내모는 잔인한 일일 뿐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교 자체의 불의한 정치 권력화의 역사를 더욱 확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환대를 위한 첫 걸음, 낙태죄 폐지
둘째, ‘임신의 책임이 실제로 50% 이상 남성 파트너에게 있다고 해도, 태아가 한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곳은 결국 엄마의 자궁이니 출산하는 의무가 모태에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윤리신학적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은 시간의 첫 시작에 하나님(하느님)이 모든 생명을 직접 창조하였으며 그렇기에 생명에 대한 주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제외하고는 인간 어느 누구도 여성의 몸을 빌리지 않고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는 (가톨릭이건 개신교건 간에)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생명 창조 사역에 여성의 몸이 수동적으로 도구 역할만 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심지어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육체적 기능이야말로 (‘이성적 능력이 탁월한 남성과 구분되어) 여성이 세상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라고 가르치는 고대 희랍의 이교도적 이원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가부장적 성서 해석과 교회의 교리를 다시금 성찰하는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도구가 아니라 그의 창조 사역에 참여할 것을 초대받은 상호적 주체입니다. 이러한 상호적 주체의 원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여성이 바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성서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아직 미혼의 여성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예언합니다. 이 장면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창조주의 생명 창조의 의지를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여성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여성신학적으로 다시 읽어 보면, 마리아는 예수의 잉태에 대한 예언을 어떠한 고뇌도 없이 숙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임신을 하는지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수동적 복종이 아니라 주체적 참여’(전통적으로 말하자면 자발적 복종’)로 예수 잉태를 받아들입니다. 특히 그 유명한 마리아 찬가는 처녀 마리아가 미혼모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의 어머니 됨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나아가 출산에 대한 자발적 의지를 스스로 확고히 북돋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이 단순히 모태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본능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순응의 과정이 아니라, 임부가 적극적으로 태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환대하는 주체적 태도로써 가능한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마리아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어머니 되기에 있어 자기 몸속에 잉태된 생명을 인정하고 환대하는 일, 나아가 그의 삶을 책임지기로 마음먹는 일에 모태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결정적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 반대로 이러한 의지가 (각자의 다양한 이유로 인해) 자발적으로 생기지 않는 여성에게 어머니가 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인지 역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현재 페미니즘 학자들과 여성계에서 주장하는 여성의 재생산권과 연관되어, 창조주는 생명을 선물로 주지만 여성은 그 생명을 선물로 받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거부할 수도 있는 실존적 자유를 지닌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비록 이러한 실존적 자유가 법적으로 대한민국 여성에게 여전히 보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미 대다수 현대 여성들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이러한 자유 위에서 정립하였습니다. 나아가 양성평등 제도와 문화가 확립된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이러한 자유는 실행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이미 낙태법의 헌법 불일치를 선언하였는데, 정부와 여당은 낙태법이 통제하는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호소를 외면합니다. 법의 개선을 핑계 삼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낙태는 윤리적이고 형법적인 죄임을 확인시키는 법적 조치들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법안을 발의함으로써 원치 않는 임신의 고통과 공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보수 정치세력과 야합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위대한 스승인 사도 바울은 참된 신앙이란 절대적인 신의 권위에 대한 굴욕적이거나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에 근거한 자발적 순종에서 생긴다고 가르쳤습니다. 여성의 재생산권을 주장하는 일은 임신과 출산을 거부하겠다는 불의한 주장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해석할 때, 이러한 주장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창조주의 뜻에 여성이 거부할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할 수 있음에도 자발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실존적 자유의 토대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입니다.

실제로 낙태죄 전면 폐지를 실시한 서구 국가들에서는, 임신중절 여성에 대한 범죄자 취급과 처벌에 쓸 사회적 비용을 안전한 의료행위로서의 임신중절술과 적극적 피임교육, 나아가 출산과 양육에 대한 보편적 지원을 늘리는 일에 돌림으로써 오히려 건강한 모성을 확대하는 실용적 결과를 보여준 선례들이 존재합니다. 이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낙태죄를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법안의 통과를 통해 오히려 더 많은 여성들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사회적 편견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되기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원해서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문화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낙태죄 폐지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
물론 낙태죄 전면 폐지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민은 있습니다. 먼저, 낙태죄 전면 폐지를 통해 여성이 자기 자궁에 생긴 태아를 세상에 신생아로 낳아,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세계-존재로 만들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의 결정권을 최종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볼 때 그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선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점에 있어서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타종교 혹은 세속적 여성주의자들과는 출발선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잉태의 예언을 부인하고 거부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결론에 이른 마리아처럼, 저는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한 사람들이라면 결국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받는 결정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교 윤리에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 역시 아기를 낳아 기를 수 있는형편이 되는 중산층 기혼 여성이자 엘리트 성인 여성으로서 존재론적 한계에서 나온 섣부른 판단일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합니다. 갈릴리 예수의 용서와 화해의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자발적으로 따를 형편이 되지 못해 죄인이라 낙인찍혔던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회도 모든 생명이 소중함을 강력하게 강조해야 마땅하지만, 자기 배 속에 있는 생명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선택의 우선순위를 따질 수밖에 없을 만큼 비참한 실존에 처한 비가시적여성들의 상황을 인정하고 그들의 선택을 위로하고 감싸는 선교를 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교회가 아니라, 국회에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신의 도성이 아니라 인간의 도성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여기 모여 논하는 낙태죄에 대한 찬반 진술은 종교 윤리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다수의 시민들을 규제하는 형법적 죄의 유무를 따지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 윤리가 인간의 도성에도 더 널리 퍼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는 데에 참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윤리를 복음으로 선포하고 전도하는 일과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법제화하는 일은 전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법은 법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누구나 예외 없이 따라야 하는 강제력을 동반합니다. 이와 달리, 윤리적 행위는 곧 윤리 행위자의 자유 영역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결단에서 비롯되기에, 법으로 강제하는 순간 그 행위는 더 이상 윤리적이지 않게 됩니다.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 윤리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원주민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이 되게 했을 때, 그 법은 결국 제국주의 폭력의 도구가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 전체의 실존이 악에 물들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100% 순결한 윤리적 무결점 상태에 이를 수 없다는 인간 실존의 한계를 고백합니다. 특히 모든 이들이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형법적 제도에 있어서는 100% 순결한 윤리성이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피임에 신경을 써도 결국 임신하게 되는 여성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 아니 아무리 국가가 성교육을 체계화하고 피임에 대한 비용을 지원한다고 해도 국가 복지와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 여성과 장애인 여성, 청소녀 등이 불평등한 성적 관계에 노출되는 일을 100% 막을 수 없다는 사실, 나아가 어느 누구도 타자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어느 누구도 타자 여성의 출산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 심지어 대신 양육해 줄 수는 있어도 양육이 시작되도록 세상에 내어 놓는 출산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임신을 중지할 안전한 의학적 기술이 이미 인간의 손에 주어졌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들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인간 실존의 딜레마 앞에 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전통적인 가부장적 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보수적 그리스도교인들의 표를 계산하며 낙태죄 존치라는 구시대적 결론으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윤리학적으로 말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은 늘 우선적으로 보호받고 환대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윤리가 아닙니다. 정치는 윤리를 고려하되, 이해 당사자들 간의 형평성을 정의의 관점에서 우선 고려하고 이후 공동체가 소외된 이들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현재보다 확대할 수 있는지 그 묘안을 정책적으로 고안하고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특히 윤리가 사랑의 영역인 반면 정치는 권리의 영역이기에, 정치가 잣대로 사용해야 할 우선적 정의는 먼저 태어난 인간(임신한 여성)의 생명권과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존엄성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어쩔 수 없이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낙태죄 일부 존치로 가닥 잡힌 현재의 정부 입법안은 시끄러운 정국에서 그 고통의 책임을 이전과 같이 여성에게만 차별적으로 부담하여 온 전통을 유지하겠다는 매우 보수적인판단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국민인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국민이 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윤리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정치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미 국민인 사람을 먼저 선택하여 앞으로 국민이 될 사람까지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정치의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은밀하게 재생산하는 주체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균형 있게 초청받지 못한 수많은 의학, 페미니즘, 사회 정책 분야 전문가들은 이미 낙태법 폐지가 오히려 이 불법적 임신중절술로 인해 생명과 건강을 잃는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으며, 임신중절을 의료행위로 인정함으로써 원치 않은 임신의 중지 시기를 혁신적으로 더 빨리 앞당겨서 불법적 임신중절술이 태아에게 초래하는 잔인함을 최대한 줄이는 차악이자 최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아가 임신중지에 대한 형법적 정죄 없는 공론화야말로, 역설적으로 임신중지에 대한 장려의 문화가 아니라, 임신과 양육의 무게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제대로 된 성평등한 성교육 기회를 갖게 하는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낙태죄 존치에 대해 아무 의문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조금도 죄에 물들지 않고 순결하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일은 사실 가장 쉬운 길입니다. 저와 함께 낙태죄 전면 폐지를 지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쉬운 길을 놔두고, 일부러 불편하고 죄스러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신약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결한 자가 아니라, 죄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기 위해 브라질 빈민 여성들과 평생을 함께 해온 해방신학자이자 여성신학자이며, 가톨릭교회의 수녀인 이본 게바라의 말을 빌려 진술을 마치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낙태의 비범죄화와 합법화를 옹호하는 이유는 예수 복음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들을 부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러한 가르침들을 인간 역사의 모순 상황 안에 받아들이기 위함이고, 생명에 대항하는 폭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 David Molineaux, “Rome moves to silcence Brazil‘s Gebara”, National Catholic Reporter, 1995. 5. 16., https:// www.questia.com/magazine/1G1-16997297/rome-moves-to-silence-brazil-s-gebara, 검색일 2020. 12. 07.   

 

김혜령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개신교신학부에서 개신교 윤리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의 조교수로, 나눔·인권·환대·생명 교육을 맡고 있으며 더불어 사는 시민사회를 위한 사회윤리와 젠더 폭력, 소수자 혐오 비판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해오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마을공동체운동과 마을교회(2013), 폴 리쾨르의 선물경제개념으로 살펴본 사랑과 정의(2015), 폴 리쾨르의 종말론적 지평 속에 나타난 용서 개념 연구(2018), Me too의 시대성폭력의 범죄성과 기독교 성윤리의 새 기준(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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