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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페미니스트였어요?”
[336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336호] 2018년 10월 29일 (월) 16:14:50 새말 goscon@goscon.co.kr

“언제부터 페미니스트였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무슨 답변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언제부터 내가 페미니스트였다고 정확히 말할 수 있을까? 자라오면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인식했을 때 난 페미니스트였을까? 그 차별에 분노했을 때? 아니면 내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나는 페미니스트가 된 걸까? 어쩌면 열심히 끓어오르다가 100℃가 되었을 때 기체가 되는 물과 비슷한 것 같다. 페미니즘은 내 안에 있어 왔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발현했다.

나를 억압했던 ‘외모 코르셋’
나는 ‘예쁘지 않은 아이’였다. 머리는 항상 올백에, 안경을 쓰고, 화장하지 않고, 통통했다. 처음 남자아이들에게 뚱뚱하다고 놀림 받았던 건 여덟 살 때였다. 그때쯤 내 몸을 미워했던 첫 기억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고, 난 그걸 딱히 숨기거나 가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즈음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사실 나를 칭하는 표현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이동 수업으로 남학생 교실로 수업을 들으러 가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앉는 책상에 “오크 년아 꺼져”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나를 공격한 그 말을 보고 나는 스스로 무척 부끄러웠고, 나에게 한 말이 아니기를 바라며, 알면서 모른 척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수능이 끝나고 살을 뺐다. 화장을 시작했고, 옷을 샀다. 하이힐을 신고 짧은 치마도 입기 시작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꼈다.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꾸미고 다니리라고 짐작 못하셨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이 “너 정말 많이 예뻐졌다” 말하는 칭찬이 달콤했다. 대학에 와서는 아는 오빠들이 많이 생겼고, 내가 ‘홍일점’이 될 때도 있었다. 그들이 “너 살 빠졌네” “오늘 예쁘네”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 나를 그냥 여자라고 치켜세워주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매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가서 500g 정도가 늘어 있으면 그날 하루 기분이 우울했다. 렌즈를 무리하게 매일 사용하다가 결막염, 각막염에 걸렸다. 편한 옷차림을 하면 내가 못생겼다고 느껴져서 매일 꾸미려고 노력했다. 화장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앞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학교에서의 몇 가지 기억들
초등학교 6학년 때 남자 동급생이 내 어머니에 대한 성적 농담을 했다. 화를 내고 있었는데, 다른 남학생이 시끄럽다면서 내 뺨을 때렸다. 그 애와 몸싸움을 하고 나서 다른 애들이 “걔한테 사과해. 안 그러면 큰일 나. 그리고 아무한테도 이거 말하면 안 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며 사과했다. 그 남자애는 다른 여자애들의 뺨을 그 후 몇 번 더 때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 남자 사회 선생님은 여학생들 등, 팔, 어깨를 쓰다듬었다. 브래지어 끈을 만지기도 했다. 컴퓨터로 여자 수영복 사진을 보고 있는 걸 발견한 적도 있었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옆 기숙사를 쓰던 남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여자 샤워실을 훔쳐보다 현장에서 발각되었다. 하지만 매 맞고 혼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사과문도 없었을 뿐더러 누가 훔쳐봤는지, 그날 들키지는 않았지만 또 어떤 애들이 샤워실을 지속적으로 훔쳐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샤워실을 훔쳐본 남자애들이 우리 몸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생각하면 수치스러웠다. 남자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 들어와 그 사건을 젊은 날의 치기로 이야기하고 넘겼다.

나는 간호학과를 다녔다. 워낙 여자가 취업하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에, 취업을 걱정하지 않기 위해 입학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 ‘여자치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어딘가 새로운 곳에 가서 나를 소개할 때 간호학과라고 말하면 “우와~”라는 알 수 없는 반응을 겪었다. 미디어와 포르노에서는 간호사를 남자 의사의 보조 역할, 비전문적인, 페티시(fetish)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로 그렸다. 한편 간호학과나 간호사의 군기 문화인 ‘태움’을 단순히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로 칭했고, 여자들끼리의 감정 싸움으로 넘겼다.

페미니즘, 꿈틀거리다
사실 내가 여성운동보다 먼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다.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여기고, 성소수자를 배척하며 혐오한다는 사실을 중학생 때 알게 되었고 그것은 나의 죄책감이 되었다.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를 갈 때마다 ‘동성애는 죄인가요?’라는 질문이 꼭 나왔고, 항상 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동성애자를 사랑으로 품고, 차별하면 안 되지만,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옆에서 격려해야 한다는 답변이었다. 그 해석은 잘못됐고 그 자체로 차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말할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2014년 신촌에서 하는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처음 갔다. “사랑은 혐오를 이긴다”라고 외치는 참가자들의 표정은 행복했고 자유로웠다. 퀴어문화축제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축복하는 예배를 드리며 나는 예수가 이곳에 함께한다고 느꼈다.

스무 살 때에는 대학교 교양 수업으로 여성학 수업을 들었다. 기본 개념을 알았고 교수님이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평등한 많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과제를 위해 여남의 성역할이 뒤집어진 가상 사회 ‘이갈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었을 때는 너무 힘들었다. 미러링은 통쾌하기도 했지만 책 바깥에서 내가 당하는 것들이기에 직시하는 것이 힘들었다. 차라리 모르고, 못 느끼고 싶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성별 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평등에 대한 이론입니다.”

스물두 살 때 엠마 왓슨의 UN 연설 ‘He for She’를 보면서 나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겠구나 처음 생각했다. 페미니즘을 심플하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여전히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스물세 살이 시작되던 겨울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에서 같이 간 친구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페미니즘에 의미 있는 지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분노가 기반이므로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친구가 말했다. 다음 날 나는 질의응답 시간에 목사님께 페미니즘에 대해 물었다. 동성애와 비슷하게 페미니즘도 잘못된 것이라는 답변에 충격을 받았고 배신감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진 않았다. 화가 나지만 왜 나는지, 뭐라고 화내야 할지 몰랐다.

   
 

그해 여름, 메갈리아
2015년 4월 방송인 장동민은 JTBC 〈마녀사냥〉에서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는 싫다고 말했다. 공중파 예능에서 잘나가는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했다. 또한 장동민이 MBC 〈무한도전〉 식스맨에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면서 라디오에서 방송된 여성 비하 발언이 드러났다.

“여자들은 멍청해서 머리가 남자한테 안 돼.”(장동민)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야.”(유세윤)
“근데 너 왜 이렇게 헐거워?”(유상무)

나는 분노했지만 내 주변 남성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남자들은 다 그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해” “그 말이 문제이기는 한데 그래도 장동민 재밌어서 계속 봐”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나와 그들의 감정, 생각의 격차가 크다고 느꼈다. 그 뒤로도 장동민은 온갖 TV 프로그램에 아무렇지 않게 출연했다.

그리고 2015년 여름 메르스가 한국에 퍼졌다. 메르스 첫 감염자는 남성이었는데 9일 동안 네 곳의 병원을 돌아다닌 일이 화제가 되었다. 5월 29일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만약 이 감염자가 여자였으면 매우 이기적이라는 욕을 들었을 것이지만 남자였기 때문에 욕을 먹지 않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홍콩에서 메르스 환자와 접촉한 한국 여성 2명이 격리를 거부했다는 오보가 나왔다. 온라인에서는 이 여성들을 비하하며 ‘김치녀’ ‘원정녀’라고 조롱했다.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 이용자들은 여성에게만 비난이 가해지는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지적하며, 인터넷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여성혐오 게시글을 그대로 성별만 바꿔 적기 시작했다. ‘메르스 갤러리’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합해서 ‘메갈리아’라는 이름이 생겼고 화제가 되었다.(페미위키-‘메갈리아’ 항목 참고)

처음 ‘메갈리아’라는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얼마 가지 못할 인터넷의 유행이라고 생각했다. 게시글은 재미있고 통쾌했지만 동참하지 않았고 멀찍이서 바라봤다. 메갈리아에 올라오는 패러디는 나에게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다. 페이스북에서, 각종 기사에서, 방송에서, 노래 가사에서, 집에서, 교회에서 나를 대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항상 하던 말과 실제로 일어나는 범죄를 남성으로 바꾸기만 했을 뿐이니까. 미러링은 현실로 돌아오면 내 이야기였기에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전히 즐거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메갈리아’는 그냥 묻히지 않았다. ‘김치녀’ 글을 SNS에 올리며 낄낄거리던 남성들이 ‘한남충’이라는 단어를 듣고는 화를 내며 금지시켰다. 그 외에도 성별만 바꿔 놓았을 뿐 똑같은 의미의 표현들, 그전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에 보이던 그 모든 것들이, 남성으로 치환되는 경우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우리는 온오프라인에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했고, 나만 이 사회가 불편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가 이제까지 입고 있던 ‘코르셋’, 여자라서 당연히 여겼던 차별을 인식하게 되었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사건, 그리고 2018년 미투운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은 온라인을 넘어 사회의 큰 흐름을 만들고 있다.

   
 

너무 당연한 믿는 페미
여성학자 정희진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가 되고 내 일상은 상처의 연속이었다. 예전엔 인식 못하던 것들을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다. 잘못된 사실을 알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신앙공동체에서 마주하는 여성혐오는 나를 더 많이 아프게 했다. 결혼식장에서 신뢰하던 목사님의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주례를 들을 때, 함께 단기 선교 갔던 형제가 페이스북에 “자매가 짧은 치마를 입고 교회에 오면 형제를 유혹할 수 있다”라는 글을 올렸을 때, 기도 모임에서 “낙태는 여자들이 자신만 생각해서 하는 결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들이 교회에 많이 다니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남자들의 숫자, 아버지들의 숫자”라는 설교를 들었을 때, 퀴어문화축제 인증샷을 SNS에 올렸더니 깜짝 놀란 목사님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내가 교회에 갈 때마다, 신앙공동체에서 나눔을 할 때마다,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차별의 언어에 나는 아팠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성경은 나에게 기뻐하라고 말하지만, 교회 안의 불의한 여성 억압으로 인해, 아파서 신음하는 내 자매들의 통곡으로 인해 나는 도무지 기뻐할 수 없다. 수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의 목소리를 찾고 가부장적인 교회와 싸우며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여전히 아프고 상처받지만 버티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나는 믿는 페미들이 모일 때 함께하시고 위로하시고 언젠가 승리케 하실 하나님을 믿는다. 마라나타. 차별이 사라지고 참 평화가 있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새말(필명)
즐겁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신앙도 페미니즘도 즐겁기 때문에 하고 있다. 진로와 적성, 행복, 먹고사니즘에 대해 고민한다. 현재 ‘믿는페미’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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