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호 커버스토리] 한국과 중국의 빈곤 문제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 조문영 교수

코로나 이후, 우리의 ‘연결망’은 안녕한가? 팬데믹으로 우리는 주변 이웃들과의 ‘어쩔 수 없는’ 단절을 경험했고, 소모적인 진영 싸움, 비대면 사회에 대한 전망, 패닉에 빠진 각종 산업 종사자들의 사연 등, 넘실대는 이슈들에 허덕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이들은 누구일까’ 고민하던 중,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인류학자’로서 빈곤 문제에 천착해온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문화인류학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둘러싼 다채로운 관계가 만들어내는 현상들에 주목하여 연구해왔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가난’과 ‘불평등’을 둘러싼 양상들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7월 5일, 연세대 신촌캠퍼스 연희관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2시간 가까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조문영 교수의 현지조사 및 연구 활동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 빈자들의 형상, 사회 불평등 구조 속에서 더욱 심각해진 고립과 단절의 문제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 등을 들었다.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각자의 연결망을 점검하고,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가 쓴 다음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신앙은 오히려 우리의 공통된 연약함과 취약함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길,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두려움에 남을 짓밟고서라도 나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우리는 모두 서로가 필요함을, 내 이웃의 안전, 안녕이 곧 내 삶의 안전, 안녕과 직결된 문제임을 깨달을 것을 요구합니다.”(《어둠 속의 촛불들 – 코로나 시대의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비아), 195쪽)

조문영 교수는 서울대 언론정보학 학사, 동 대학 인류학 석사, 스탠퍼드 대학 인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The Specter of “The People”》(‘인민’의 유령)(Cornell University Press)을 영문으로 출간했으며, 《민간중국》(책과함께),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21세기북스) 등 공저 혹은 편저로 관여한 책이 다수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한국과 중국의 빈곤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면.

어렸을 적 김포공항 근처 강서구 화곡동에 살았는데, 가정 형편이 좋지는 않았다. 빈곤 문제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식한 계기는 사는 곳과 제법 가까웠던 목동에서 마주한 세입자들의 철거 반대 투쟁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졸업 문집을 만든다고 한 학생당 천 원씩 걷었다. 당시 반장이었던 탓에 내지 않은 친구들에게 돈을 받으러 갔던 곳이 목동이었다. 신시가지로 재개발되기 전인 1980년대 중반, 폭력과 절규의 현장을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렸다. 너무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나이로 이해할 수 없는 사태였고 이해를 돕는 글도 전혀 접할 수 없으니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 대학에 들어와 선배의 꼬임으로 1학년 때부터 서울 봉천동 철거 지역에서 공부방 교사를 3년 정도 했다. 과거 아버지도 시골에서 야학을 한 적이 있고, 언니는 노동 야학을 계속하다가 형부를 만났다. 형부가 노들장애인야학 천성호 교장이다. 가족 영향도 있었다고 봐야겠다.

- 1999년부터 2001년까지의 서울 난곡 지역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석사 학위논문 〈‘가난의 문화’ 만들기-빈민지역에서 ‘가난’과 ‘복지’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썼다. 특별히 난곡을 선택한 이유는?

대학 시절에 했던 빈곤 현장 및 재개발 지역에서의 활동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공부방 교사를 했던 봉천동은 이미 재개발을 시작해 1999년에는 거의 철거 수순이었다. 마침 서울대 자원봉사센터에서 난곡 신림복지관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내가 활동한 공부방 실무자 남편분이 난곡 낙골교회 배지용 목사님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난곡으로 결정하게 됐다. 당시는 IMF 직후로 국가적 위기감이 커진 상황이었다. 결식아동 문제를 비롯한 빈곤 이슈들이 떠오르며 당장 구제가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이 미디어를 가득 채웠다. 정부와 운동 단체들 인식도 비슷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이 진행됐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기초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됐으며, 많은 지원금이 풀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의 재개발 지역이 철거되어 빈민운동 단체들이 어떻게 방향 전환을 할지 고민하던 차에, 문제를 풀어갈 방안으로 ‘복지’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상황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데 IMF까지 터지고 후원과 지원이 쏟아지면서 운동가들과 주민들의 관계가 예전과 달라졌다. 함께 투쟁할 동지로 생각해온 주민들을 클라이언트로 대하면서 지원금과 일자리를 나눠 줘야 했으니까. 막 제정된 기초법 때문에 갑작스럽게 많아진 새로운 수급자 가구를 상대하게 된 동사무소 직원들은 녹초가 되도록 일했다. 단체들 성격이 변모하고, 복지관이 서비스를 넓히는 등 변화들이 중첩됐다. 얼마 남지 않은 서울의 ‘달동네’로 사회적 시선이 쏠리면서 ‘카메라들’까지 상주해, 난곡 자체가 거대한 실험실이 돼버리고 말았다.

- ‘가난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이 난곡이었다는 말인데….

‘가난의 문화’(culture of poverty)는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가 20세기 중반에 중남미 슬럼 지역을 연구하면서 제안한 개념이다. 가난이 세습되어 빈자들이 특정 장소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심리적으로 도태되고 무기력해지는 등, 일정한 문화를 형성해간다는 것이다. 빈곤 연구자들은 보통 이 개념을 폐기하려 한다. 빈자들의 역동성과 활동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나 역시 반감이 컸는데, 수급자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복지관·동사무소 직원분들은 어쩔 수 없이 빈자들이 그렇게 변하는 것만 같다는 이야기를 제법 했다. 의존적이 돼가고 ‘복지병’에 걸린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이 긴장을 들여다보려 했다.

문화적 현상은 관계를 통해 돌출할 수밖에 없다. 내가 착목한 지점은 ‘가난의 문화’가 빈자들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긴다기보다, 빈자와 비(非)빈자 간 관계를 통해 생성돼가는 측면이 분명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디어에서 후원하기 적합한 이미지의 ‘자격 있는’ 빈자들을 고르는 일이 반복되자, 빈자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무대 위로 뛰어들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주변에서도 이에 일조하면서 문화적 현상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류학 조사에서는 연구자 자신도 외부자가 아니다. 상황에 깊이 연루된다. ‘모두가 가난의 문화를 재생산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간단히 쓸 수는 없었다. 다들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사이에 연결망 안으로 흡수됐다. 본의 아니게 어떤 문화적 현상을 만드는 과정에 얽혀드는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주려 했다.

- 논문 발표 후 반응이 어땠는지.

문제가 많았다. 빈민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시원하게 느끼거나 상처를 받았다. 많은 것을 버리고 들어가 장기간 같이 사는 등 삶을 투신하는 빈민운동가가 적지 않다. 가난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의도치 않았지만 ‘달동네 인심’ 등 가난을 미화하는 작업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을 언급했는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스스로 만들어왔던 ‘도덕성’을 침해받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일정한 편집 과정을 거쳐 논문을 완성하는 연구자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 지금의 ‘난곡’은 기사들에서 ‘상전벽해’ ‘환골탈태’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풍경이 달라졌다. 

난곡 달동네 재개발 지역은 2003년을 지나면서 완전히 철거됐다.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예전만큼 폭력적으로 이뤄진 철거는 아니었다. 지자체 선거가 중요한 시기라 구청도 빈자들이 행사할 표에 신경을 썼다. 유학 갔다 와서 10년 만에 난곡을 찾았는데, 윗동네와 아랫동네 상황이 역전돼버린 것을 목격했다. 원래 달동네는 산등성이 쪽에 부채꼴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랫동네에는 ‘국회단지’란 이름으로 재래식 단독주택들이 모여있었다. 달동네에 비교했을 때 잘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달동네 자리에 임대아파트와 상업화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잘사는 지역의 위치가 바뀌었다. 국회단지가 그 자체로 노후화한 것이다.

달동네에 살았던 주민들은 쪼개졌다. ‘뉴타운’으로 지정됐다가 재개발이 안 된 신림6동에 셋방을 얻은 이들도 있었다. 아예 멀리 이사한 사람도 있었고, 국회단지에 방 한 칸 얻거나 지하에서 살게 된 사람도 있었다. 달동네라는 가시적 풍경들이 드러났던 이전과 달리, 빈곤이 분명히 존재하나 보이지 않게 됐다. 이곳저곳으로 숨어들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1980~1990년대 난곡에서 대안적 도서관 운동을 펼쳤던 단체(난곡주민도서관 새숲)는 이제 아파트 주민 대상 모임을 주로 하는 조직으로 바뀌어 지금도 열심히 활동 중이다. 낙골교회와 남부야학 등은 조직이 통합돼 난곡사랑의집이 됐다. 이제 주로 한글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대상으로 문해 교육을 한다. 아이들·청소년, 어르신 대상으로도 교육과 돌봄 활동을 하는데, 주민들 구성도 다양하다 보니 ‘반빈곤’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다. 예전에 난곡에서 지향했던 운동성을 충분히 살리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다. 요즘 빈민·주민 운동 단체들은 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 같다. 후원금을 받는 법인을 만들어 활동을 해도 복지관과 별 차이가 없으니, 어떤 설득력을 갖고 조직을 유지할지, 어떻게 연대를 도모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 20년 전 난곡을 둘러볼 때 ‘가난과 복지의 관계’에 주목했는데, 당시와 비교했을 때 현재의 한국 복지제도에 어떤 변화가 있다고 보는가.

기초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넘었다. 엄청난 운동 성과다. 다만 복지 수급 자체를 ‘권리’로 보지 않는 시각은 여전하다. 가난한 사람조차도 대부분 권리로 안 본다. 수급자를 고르는 과정에서부터 계속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당당하게 살아갈 돈을 벌지 못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크다. 노동자를 ‘생산하는 사람’,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등치해서 보는 태도에 이미 문제가 있다. 생산본위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하고, 노동자 운동에서 이 논리를 재생산해온 측면도 있다.

많은 경우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해줄 때는 ‘장애인은 일하고 싶어도 못 해’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빈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일할 수 있었는데, 왜 못 했어?’ 되묻는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인식이 정부, 기업, 시민, 운동가 등 모두에게 강력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도 비슷한 논리가 언급된다. 좋은 일자리는 계속 줄고 있고, 모두가 다 괴롭고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해도 먹히지 않는다.

복지 영역이 제법 커진 것도 딜레마를 낳는다. 예전에는 정부와 운동 단체가 완전히 구분되었는데, 이제는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게 당연시된다. 많은 단체가 개인 후원보다 정부나 공익재단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운동 단체들이 ‘복지’라는 매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복지 행정에 즉각 대응하는 게 주 업무가 되면서 다른 운동을 상상하는 일이 요원해졌다. 이런 흐름에서, 기초법과 같은 복지제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시민 절대다수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빈곤이 어느 순간 복지 문제로 귀착되고 말았다. 반빈곤 단체에서 계속 정책과 제도 변화를 위한 행정 싸움을 벌여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해있다. 하지만 이 싸움의 구경꾼으로 남은 시민 다수는 스스로를 공정하지 못한 사회의 가장 억울한 피해자로 인식하는 세상이 돼버려서, 복지 문제로 싸우는 이들을 향해 ‘뭘 했다고 계속 돈만 내놓으래?’식으로만 반응한다.

조문영 교수가 엮은 책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br>
조문영 교수가 엮은 책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여러 저술에서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인류학자’로 소개된다. 언제부터 중국에 관심이 있었나.

198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다. 우리 집이 좁아서, 학생 운동권이던 대학생 사촌 언니들 자취방을 자주 들락거렸다. 일본 책을 급하게 번역한 소련·중국 서적들을 많이 훔쳐봤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혁명이나 대장정 스토리를 거의 무협지 보듯 읽었다. 당시 분위기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향한 동경 같은 것도 분명 있었겠다. 그 후 대학 와서 1996년 1월에 처음 중국 땅을 밟았는데, (미국 자본주의 상징) KFC가 천안문 광장 바로 앞에 있더라.(웃음) 당시 이념을 좇아 중국을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돌렸다고 들었다. 중국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커다란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나는 격변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에 관심이 있었고, 중국을 계속 연구하기로 했다.

- 중국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빈곤 문제를 연구했다. 동북에 주목한 이유와 어떤 연구를 진행했는지.

중국 동북은 청나라 때 만주족의 발원지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곳이기 때문에 해방 후 남겨진 공장이 많았다. 인프라가 조금 구축된 상태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됐을 때, 지리적으로 가깝고 당시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땅이 원체 넓어 한날한시에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진행할 수 없으니 동북이 전초기지가 된 셈이다. 국영기업이 많이 건설돼 많은 노동자가 들어왔으며, 이 시기 동북이 ‘공화국의 장자’라는 가부장적 메타포로 표현될 정도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농후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틀고 국영기업을 조정하는 중에 크게 내홍을 겪어, 수많은 동북의 노동자들이 사실상 실업자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중국에서 ‘인민’이라 했을 때 대표되는 존재는 농민과 노동자다. 사회주의 인민의 대표체 계급에 속했던 동북의 노동자들이 빈민으로 전락했을 때 발생하는 변화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중국은 사회주의 독트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데, ‘빈민’이 된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며 이 문제를 중국이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주목했다.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지역 간 불평등 격차가 상당하다. 2013년부터 홍콩과 인접한 중국 선전시의 폭스콘 공장 지대를 연구해보니 지역 격차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더라. 도시 노동자 빈곤을 많이 연구했지만, 절대 빈곤으로 따지면 농촌이 정말 심각하다. 중국은 철저한 도농 이원 구조로 사회주의 경제 틀을 만들었다. 한국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다 서울시민이 되지만 중국은 아니다. 호구가 분리돼있다. 철저하게 농민과 도시민을 구분해 경제·생산력 발전을 이뤄왔다. 개혁개방 이후 농민들의 도시 이주가 그나마 가능해졌다. 농민들이 도시로 올라가면 ‘농민공’이라 불린다. 호구가 여전히 농촌에 있어서 그렇다.

연구 결과를 묶은 저서 《The Specter of “The People”》(‘인민’의 유령)에서 주목한 내용은 이 상황에서 빈민들 간에 벌어지는 마찰이었다. 여러 비참에 동시에 직면하면서도 서로를 같은 종류의 빈자라 생각하지 않으니 갈등이 생긴다. 영화 〈기생충〉에서 빈자들끼리 적대하듯이, 빈자들 간에 연대하지 못하는 문제는 다른 현장에서도 많이 보인다. 다양한 역사적 그물에 얽혀있어서 그렇다. 중국에서 도시 노동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추앙받았고, 도시의 단위 체제하에서 여러 복지 혜택을 누렸다. 반면 농민은 말 그대로 버려졌다. 농민을 등에 업고 혁명을 했지만, 사실상 구조적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니 도시민과 농민공이 서로를 같은 경제적 빈민이 아닌 급이 다른 존재로 여긴다. 이런 빈곤의 역사성을 착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중국 상황과 한국 상황을 연결해서 고민해볼 지점들이 있다면.

단순히 경제적으로 열악하거나 돈이 없는 이들이 그 자체로 국가의 통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 종류의 빈자들이 존재한다. 국가의 시선을 받으려면 특별한 계기, 정치적 사건이 필요하다. 중국의 경우, 농민들이 절대 빈곤에 시달렸는데도 한국의 기초법에 해당하는 최저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시점은 도시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됐을 때다. 한편 최근 와서 대대적으로 시행된 농촌 빈곤 퇴치 사업은 시진핑 체제의 정당성을 구축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정권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 빈곤 통치가 본격적으로 작동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청년이 가장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 국가뿐만 아니라 미디어·학계·기업 등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청년 문제를 논하고, 수많은 채널과 자원을 동원해 청년을 지원하려 하는가. IMF 당시 누가 국가의 빈곤 통치 대상이 됐는가. 이전에 노숙인들은 ‘부랑인’이라고만 불렀다. IMF 때 본격적인 통치 대상으로 다루면서 ‘자격 있는’ 노숙인과 ‘자격 없는’ 노숙인이 나뉘었다. 대기업 부장이던 가장이 갑작스럽게 거리로 나앉은 경우라든지, 스토리가 있는 노숙인들을 보호해주고 케어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노숙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불안정성에서 발생한 ‘실존의 빈곤’, 즉 ‘내가 피해자이고 약자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한국에 많은데,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빈곤 문제를 볼 때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정치·경제적 불안도 연결해서 봐야 한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글로벌 빈곤’에 주목해 해외 봉사 활동을 펼치는 청년들 서사를 논문을 통해 풀어낸 바 있다. 오늘날 대부분 청년이 ‘빈곤’이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빈곤 포르노’라고 비판받는 해외 빈곤 마케팅 이미지다. 오히려 한국에서 빈민운동가나 활동가들이 연대하는 주변의 현장들과는 거리감을 느끼는데,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접근 가능한 자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방 교사로 참여한 계기는 선배들의 권유였다. 빈민봉사활동 기회가 많고, 학과나 동아리에 이 문제를 학습할 자원이 많다면 솔깃해할 수도 있다. 이제 연결망이 달라졌다. 지금 대학생들을 인터뷰해보면 그나마 페미니즘 학회를 통해 사회문제에 눈떴다는 얘기를 간혹 듣기도 한다.

IMF를 지나오면서 ‘개인·조직 경쟁력’ ‘휴먼 캐피털’이 키워드로 많이 등장했다. 대학·기업을 넘어 NGO까지 ‘경쟁력’을 이야기한다. 세계화 흐름 또한 흡수하다 보니 시선이 점점 더 밖으로 뻗어간다. 빈곤을 중심으로 한 연결망이 철거 현장, 재개발 지역 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돈을 풀어서 규모가 커진 국제개발 NGO들이 대학들과 연결되면서 청년인턴 등 해외 자원봉사 기회가 늘어났다. 학생들에게는 스펙이고, 대학들에는 글로벌 사회 공헌 지표이니 모두가 얽혀드는 회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존 형식들은 탈락했다.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습득 환경도 좋아져서 학생들이 자신의 교육·문화 자원을 활용해 좀 더 ‘글로벌’한 기여를 하고 싶어 한다. 커리어를 쌓을 때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롤모델로 한비야 같은 인물이 한동안 주목받았다가 반기문 등으로 넘어가고, 기업을 통해 빈곤 퇴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요즘에는 기업이 여러 면에서 헤게모니를 갖고 있다. 사회혁신이 중요한 매개이자 연결고리로 주목받고 있다. 스타트업·벤처로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플랫폼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글로벌 네트워크·커뮤니티를 강조한다. 소비자들도 친환경, 글로벌 공헌을 많이 언급하니,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지금보다 착해지거나, ‘착하게’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 소위 ‘엘리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나마 사회적 발언권을 갖는 엘리트 청년들이 그렇지 못한 빈자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이 사이에서 어떻게 ‘연결’을 꾀할 수 있을까.

일례로, ‘빈곤의 인류학’ 수업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결과물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21세기북스)가 ‘연결’ 작업의 성과다. 수업하면서 학생들이 생각하는 빈곤이, 스스로 느끼는 ‘실존의 빈곤’ 아니면 국제개발에서 강조하는 ‘글로벌 빈곤’ 정도로 고정돼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용산 참사’를 못 들어봤거나, 시사 상식 정도로 배운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빈민운동이 그만큼 청년들의 연결망에 가닿지 않으니까 의도적 연결이 필요하다고 봤다. 공론장에서 밀려나는 활동가들을 인터뷰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연결 기회가 생기니까 수업이 끝난 후 노들장애인야학, 홈리스행동 등에 자원 교사로 가는 학생들도 등장하더라. 언론사에 취업한 한 학생은 빈곤 이슈를 더 집중적으로 다루게 됐다. 물론 모두가 다 한 방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삶에 새로운 돌출이 생겼으니, 언젠가 새롭게 연결해나갈 여지는 있을 것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부족적 연결망만 강화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시대에, 어쩌면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새로운 현장을 발굴해내고 가닿을 수 있는 ‘액티비즘’이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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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서문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고립과 폭력의 형상에 애써 눈을 감으면서도 ‘도덕적’ 빈자만 좇는 현실이 우리 시대 빈곤의 기이한 풍경을 보여주는 게 아닌지 생각한다”고 언급했는데.

2014년 생활고로 세상을 떠난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기억하나? 평소 빈곤 문제에 관심 없던 사람들까지 다 들고일어났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집세와 공과금 총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남긴 유서 때문이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착한 빈자’의 형상에 부합한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한겨레〉 논조가 같을 정도였으니. 빈곤 연구를 하다 보면 ‘가난하면서 착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난하면서 착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등 난리가 나는 가정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도덕적으로 착해 보이는 것은 정말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빈곤의 연결망들, ‘빈곤 포르노’ 같은 것이 ‘착한 빈자’의 형상을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 그런 점에서 오늘날 빈곤 문제를 풀어가는 일이 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빈자들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시행하려 해도, 비빈자들의 반발로 어려워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동자동의 경우, 공공개발을 하려 하니 소유주들이 난리다. 문제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요즘 사람들이 잘 못 참는 것 같다. 나도 칼럼을 쓰면 악플이 많이 달린다.(웃음) 협박 메일을 받기도 한다. “네가 가난한 사람들 다 데리고 살아!”라는 식으로. 2000년대 이전에는 활동가들과 정부의 대립 구도가 분명했다. 이제는 다르다. 특히 민주화 운동을 거쳐 정권을 잡은 정부와 제도권 정치 영역에는 과거 빈민운동을 했던 분들도 상당수 들어가 있다. 운동 성과를 많이 수용한 측면도 있는 것이다. 쪽방촌이 자리한 영등포나 동자동 지역을 공공개발하기로 한 점은 고무적이다. 30여 년간의 빈민운동이 거둔 중요한 승리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은 같이 살아가는 시민들이 더 무서워졌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사회 속에서의 불안정성이 모든 이들의 삶 전반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제일 억울한 피해자로 생각하는데, 서로서로 적대하고 싸우도록 둘 것인가. ‘취약성’(precarity)이 전방위적으로 퍼져있다. 나는 이 현상을 구분 짓기 위해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와 ‘말할 여력이 없는’ 프레카리아트와 ‘말을 잃은’ 프레카리아트로 나눠서 살피기도 했다.1) ‘전통적 가난’이라 했을 때는 ‘말을 잃은’ 프레카리아트만 보기 쉽다. 사실은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까지 같이 봐야 한다.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에 해당하는 엘리트 대학생들이 향후 어떤 선택을 하느냐, 국가와 동료 시민이 이들의 분노와 불안에 어떻게 화답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작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남긴 소감을 보면, ‘어쩌다 용산 참사를 처음 들어보게 됐을까’ ‘의존하는 사람들을 향한 적대감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겼을까’ 하는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더디더라도 불안정한 조건에 처해있는 다른 이들과 일상 영역에서 연결해나갈 수 있도록 물음을 던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 정부 차원에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시민들이 반대하든 안 하든 ‘선진국’ 한국에서 삶의 기본 조건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없어야 한다. 정부 역량이 중요하다. 영화 〈조커〉(2019)는 ‘가난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등 위협이 됐을 때 사회가 어떻게 되는가’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다. 한국이 지금처럼 ‘내 것만 챙기면 그만’이라며 각자도생의 길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미국을 보면, 많은 사람이 총기를 구입하고 자신들만의 벙커를 만들었다. 한국도 점점 그렇게 돼가는 것만 같다.

전 브라질 대통령 룰라 다시우바는 노동자 출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치안이 너무 안 좋아 기업 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부자들이 룰라를 찍었다.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 되면, 누가 사업을 하거나 자녀를 키울 수 있겠나.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갈 기반을 마련해야 하고, 그렇기에 정부에서 모두가 공생할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도록 분배 작업을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 지금 금융자본의 확산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지구상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기본을 채워주지 못하는 시스템은 여전하다. 지난 5월 돌아가신 동자동 쪽방촌 주민 한 분이 공공개발에 찬성한다면서 남긴 말이 “욕실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였다. 이렇게 풍요로운 나라의 시스템이 이 정도 기본도 못 채우고 있다. ‘모두에게 기본 생활이 갖춰져야 그나마 덜 불안해하면서 살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여당/야당, 진보/보수 중 누가 정권을 잡든 분배 시스템을 확실하게 구축해야 한다.

표심에 따라 흔들리는 정치 공학이 정말 문제다. 중국은 민주화도 안 됐고 인권 탄압도 자행하는 국가라고 비판받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 일당 독재’라서 정하면 추진할 수 있는 것도 많다. 올해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시진핑이 가장 강조한 업적이 ‘빈곤 퇴치’다. 개혁개방 이후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중국 인민 중 7억 7천만 명을 구제했다며, ‘탈빈곤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선포했다. 한계도 많지만, 빈곤 퇴치를 위해 국가에서 천문학적 액수를 들인다.

- 몇몇 거대 이슈만 중점적으로 부각하는 한국 언론들도 책임이 있겠다.

미디어 환경이 조금만 달랐어도 좋았겠다. 그나마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이슈화된다. ‘말할 여력이 없는’ ‘말을 잃은’ 프레카리아트들은 다 소진되고 파편화될 따름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마포구 5km 반경에서의 논의들만 대한민국 이슈가 된다고까지 말하더라.(웃음) 언론에 나오는 청년 세대 논의도 지나치게 서울 중심이다. 기후 정치, 동물권 다 중요한데, 이 이슈까지 생각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 역시 경청할 필요가 있다. 지방 대학 졸업생들의 일자리 문제 등 여러 복잡한 이슈가 있을 텐데, 지방의 문제는 같은 비중으로 이슈화되지 않는다. 이 현상은 앞으로도 심해질 것이다.

나중에라도 충분한 정도의 분배가 정착되면 청년 세대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산업화 세대가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좇지 않으려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미친 듯이 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다’ ‘연애·결혼·출산 등 생애주기 각본을 따라 살고 싶지는 않다’ ‘소소하게 지구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탈성장의 길로 가려는 이들이다. 이들이 모이는 곳이 지방이 될 수도 있다. 홍성, 원주 등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힌 지역들이 있지만, 아직 돈이 없으면 내려가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지금 청년 세대에게 장기적 지속가능성이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교수님은 여러 글을 통해 코로나 이후의 ‘연결망 축소’ 문제를 지적했다. 지난 5월에 KBS 〈시사직격〉 ‘죽어야 보이는 사람들 – 청년 고독사 보고서’ 편을 보면서 많이 체감했다. 한 일용직 청년은 코로나로 일자리가 끊긴 채로 연결 없이 버티다가 결국 목숨을 끊었다. 이 선택 자체도 안타까웠지만, 다큐를 보면서 나의 연결망이 축소됐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재택근무를 비롯해 주변 환경 및 생활 변화에 적응하기 바빠 나도 모르게 평소 관심 있던 사회문제들까지 잊고 지낸 것이다. 코로나 이후 ‘빈곤’ ‘고립’ ‘불평등’ 문제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고 보는가.

기존에 연결돼있던 이슈들에서조차 단절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변화다. 우리 시대 빈곤은 특정 이슈를 통해 드러나는데, 이렇게만 나타나는 현실도 문제적이지만, 한때 사건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결조차도 끊어지는 것이다.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돌베개)를 보면, 영국의 공공 도서관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 서비스를 이용하는 가난한 아이들이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집에서 가능하면 일찍 도망쳐 나오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빈곤 문제에 개입하는 데 일차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 공공인데, 공공이 코로나에 가장 예민하잖나. 코로나로 가장 먼저 문을 닫게 되니 공공과 잇닿은 빈자들이 가장 빨리 연결에서 끊어진다. 한국의 경우, 코로나 이후 자영업자 지원 이슈가 많이 부각됐다. 일과 소득이 중심인 사회이기에, 소득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세금 내는 집단이 아니면 국가에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빈자와 비빈자가 만나면서 이뤄지는 연결망들에 주목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인테리어를 통해 사적 공간을 단단하고 안전하고 쉴 수 있게 만드는, 자신들만의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산층이 많았다. 반면, 빈자들은 고립 문제를 심각하게 겪을 수밖에 없다. 쪽방촌 주민들은 너무 춥거나 덥다 보니까 쪽방 자체에서 살 수가 없다. (평상이라든지) 바깥 공간을 활용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데, 코로나로 이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거리두기로 차단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코로나가 계속 이어지는 국면에서 어떤 연결을 새롭게 맺을 것인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 교수님은 물질적 빈곤이든 비물질적 실존의 빈곤이든 ‘나의 빈곤’과 ‘우리의 빈곤’을 연결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연결’을 가로막는 조건들이 적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만날 환경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SNS만 봐도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연결돼있다. 온라인 여초/남초 커뮤니티 등, 사용하는 말과 레토릭이 한정된 곳에서 주로 연결을 이어간다. 사회 자체가 섞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지역/공간의 계급화가 심해졌다. 지역별로 갈라지고, 학교별로 갈라지고, 심지어 아파트 단지별로도 갈라진다. 관심의 원을 넓히기보다 계속 좁히면서 끼리끼리 문화를 이어간다. 한국 사회 모습이 그냥 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섬 같다. 미디어가 어떤 섬을 수면으로 부상하고 연결하는가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부상한 그 섬도 우리가 사는 세계의 파편일 뿐이다.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다. 대안 미디어를 만드는 작업도 끊임없이 있어왔다. 교육현장에서도 기존 연결을 낯설게 보고 다른 이들과 연결하는 노력들을 충분히 계속해가야 한다. 어려운 점은 예전처럼 계몽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데 있다. 무슨 말을 할라치면 바로 ‘꼰대’가 돼버린다.(웃음)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 특정 집단을 의식화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기에 더 몸을 사린다. 모두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지쳐가는 것 같다. 누구 한 사람도 철저하게 외부에 있을 수 없는 구조다. 모두 연루돼있다. ‘우리 모두가 외부자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같이 깨지고 고민하면서, 새로운 연결을 제안하고 만들어내는 움직임들을 부단히 시도할 필요가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 현장에서 연대하는 일 못지않게 많은 고민과 학습이 필요하겠다. 빈곤 문제와 관련해서 추천 도서들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동자동 사람들》(빨간소금), 《노랑의 미로》(오월의책), 《사당동 더하기 25》(또하나의문화), 《가난의 문법》(푸른숲), 《하틀랜드》(반비) 정도 언급할 수 있겠다. 빈곤 통치와 관련해서는 《빈곤자본》(여문책), 《가난을 팝니다》(오월의봄)를 추천한다. 민망하지만 내가 번역한 《분배정치의 시대 - 기본소득과 현금지급이라는 혁명적 실험》(여문책)도. 특별히 《아이들의 계급투쟁》(사계절)이 인상적이었다. 가난한 영국 토박이들과 이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탁아소 아이들과 부모들을 통해 보여준다. 은유 작가가 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도 괜찮다. 많은 이들이 가난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나는 수급자가 아니야’ 하면서 논의의 장 바깥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기 쉬운 현실이다. 빈곤 문제를 ‘수급자’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 청년, 실업계 고등학생, 비정규직, 성매매 여성, 장애인 등의 삶을 보여주는 책들을 다양하게 봐야 한다.

부르디외가 쓴 《세계의 비참》(동문선)은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세 권짜리 책이다. 프랑스에서 비정규직, 소위 ‘프레카리아트’들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고, 이주자 프레카리아트가 많아지던 때 이야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복지사와 빈자의 갈등, 같은 공간에 사는 빈자와 비빈자의 갈등 등을 인터뷰로 엮어냈다. 2000년대 초반에 봤을 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화하기 이전이었다. 지금은 너무 이해가 잘 가서 학생들에게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이다.

■ 각주

1)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precarious’(취약성/불안정성’)와 ‘proletariat’(무산 노동계급)의 합성어다. 노동시장 유연화로 보호받기 어려운 ‘불안정 노동자’로, 삶과 노동의 불안을 느끼는 다양한 집단을 포괄한다. 조문영 교수는 ‘말할 수 있는’ ‘말할 여력이 없는’ ‘말을 잃은’ 프레카리아트를 대표하는 형상으로 “교육·문화자본을 갖춘 청년과 비정규직 노동자, 홈리스와 쪽방 주민”을 내세운다.


진행 강동석 기자 kk11@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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