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호 커버스토리
살면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 없었다. 크고 작은 생의 굴곡이 없었던 건 분명 아닌데, 한없이 외로운 처지에 놓이더라도 그냥 주어진 삶이니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때그때 태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견디며 버텼던 것 같다.
돌파구가 없다
코로나도 그렇게 지나갈 줄만 알았다. 조금 불편해질 뿐이지 버티면 되겠지. 그런데 둘째를 출산하고 5개월쯤 되었을 때였나. 코로나가 전국으로 확산한 2020년 봄, 거의 모든 외출이 전면 금지됐다. 남편은 출근과 재택근무를 오갔고, 첫째의 유치원 등원도 무기한 미뤄졌다. 맞벌이를 증명할 문서가 없으면 어디에도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누군가는 방학이 좀 길어진 것으로 여기라 했지만, 맘 놓고 문밖을 나갈 수도 없으니 잔인한 말이었다. 겨우내 미세먼지와 추위 때문에 외출이 어려웠던 둘째는 봄이 되어서도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집에서 신발을 신고 걸음을 익혔다.
온 식구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행복해야 하는 건데, 애석하게도 항상 그렇지는 못했다. 매일 삼시 세끼 밥을 차리는 일이 고역이었다. 종일 붙어있는 아이 둘을 데리고 장을 보기도 어려워서 ‘새벽배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중노동을 감당하는 배달업 종사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올 때면 죄책감에 시달렸다. 우습지만 첫째 때 기저귀와 분유 등을 구매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로켓배송’의 편리함을 포기하는 데도 아주 큰 용기와 단호함이 필요했다. 로켓배송을 어렵게 포기했지만, 식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다른 쇼핑앱을 기웃거렸다. 식사 준비도 쉽지 않았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첫째, 아직 이유식을 해야 하는 둘째, 혈당 관리가 필요한 남편. 식구들 모두 다른 식단이 필요했다. 잘해 나가다가도, 전혀 그렇지 못한 날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 날들이 쌓여가던 어느 저녁,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고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 순간 ‘버겁다’는 마음이 엄습했다.
정말 그랬다. 너무 버거웠다. 근데 무엇이? 밥하는 것?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 내 아이들을 돌보는 것?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 황당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랬다. 정말 한순간도 쉬지 않고 육아와 집안일을 했다. 육아단축‘근무’ 중인 남편이 종종 함께해주긴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그의 ‘부캐’에 불과했다. 마침 직장에서도 더한 책임을 맡게 되어 이전보다 가정일에 함께하지 못할 때가 많아져 더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블랙코미디의 어느 장면처럼 설거지하다가 울었다. 그리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아무래도 육아우울증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고립은 ‘너무 과하게, 오랜 시간 가족과 함께 있어’ 찾아왔다. 열악한 환경에서 홀로 지낼 수밖에 없는 분들에겐 너무나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나는 그랬다. 정말 너무 과하게 함께 있어 외로웠다. 나를 잃어버린 듯했다. 괴로웠고,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간은 나 스스로 상황이 어떠하든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 생각했다. 견디는 건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나는 내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그리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고 ―출산과 육아 등의 경험 때문인가, 나이 듦 때문인가, 혹은 호르몬의 변화인가― 아니면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제는 버티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고, 변화가 절실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아주 익숙해진 ‘함께하는 고립’
사실 이건 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확진자 수가 다소 줄어들고 다시 외출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만났던 동네 이웃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주부 ―그들은 대다수 ‘엄마’였고, ‘아내’였다― 가 우울증을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커피 한잔 제대로 마실 여유가 없는 하루’였다. 어쩌다 운이 좋아 커피 한잔이 내 앞에 놓여있을 때에도 무심결에 홀짝거리다 비어버린 잔을 보면 ‘언제 내가 이걸 다 마셨지?’ 싶었다. 마신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셔‘버린’ 것이었다.
주부들은 그렇게 정신없이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버티고 또 버티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우자의 삶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주부들은 더 열심히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했다. 더 안전한 마스크를 구매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아이들 손을 닦이는 일도 주부의 몫이었다. 굉장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일, 코로나가 잠식한 일상에서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일들을 가정을 지키는 주부들이 하고 있었다.
같은 동 505호는 아이가 넷이다. 코로나로 학교 수업이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던 작년에 그 집 첫째는 중학교 2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6학년, 셋째는 4학년, 그리고 막내가 2학년이었다. 온라인 수업이 익숙하지 않던 초반에는 정말 막막했다고 한다. 당장 스마트 기기가 절실했다. 컴퓨터, 노트북, 태블릿까지 집에 있는 모든 기기를 동원해도 모자라 중고로 기기를 두어 대 더 사들인 것으로 안다. 한번은 모두가 온라인 수업을 하는 오전에 잠깐 그 집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두 명은 거실 테이블에서 또 다른 아이는 방에서, 막내는 엄마가 있는 주방 가까이에서 각자의 스마트 기기를 앞에 두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짓과 발짓을 하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야말로 코로나가 가져다준 진풍경이었다.
505호 부부는 맞벌이라, 아이들을 집에 두고 출근해야 할 때 걱정을 많이 했다. 전날 밤이나 이른 아침이면 아이들 식사를 끼니별로 준비해두고, 간식거리도 더 쌓아두어야 했다. 어쩌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면, 뒤처진 학습 진도를 봐주기 위해 아이들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주말에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삶. 교육기관의 줄어든 역할이 고스란히 부모에게 짐으로 얹어졌다. 비단 어른들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바깥에 나가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들은 그럴 수 없어서 그저 집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언가를 하면서 효율적이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대부분은 무용의 시간으로 흘러갔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의 이유 없는 짜증도 크게 늘었다고 했다. 우리 집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는 아이들은 집안에 갇혀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종종 가기 싫다고 투정하던 유치원도 이제는 언제 가냐며 손가락을 꼽을 만큼 그리운 곳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고립의 시간은 부모의 짐과 아이들의 그리움을 더욱 가중했다.

아주 짧았던 봄
올해 3월이 되면서 동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다시 정상 등원을 시작했다. 첫째는 다니던 유치원에 다시 갈 수 있게 되었고, 두 돌이 채 안 된 둘째도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이토록 긴 기다림 끝에 다시 시작되니 정말 꿈 같았다. 우리 집의 일상도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 전에는 아침마다 등원하기 싫어하는 아이와 늘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유치원 갈래” 하는 낯선 아이의 모습을 본다. 마스크에 익숙하지 않던 둘째는 이제 외출 준비를 하면 으레 마스크를 먼저 챙긴다. 어쩌다 마스크 없이 문밖을 나서면 먼저 내게 “마스크!” 하고 외친다. 잘 적응해준 아이에게 고맙다가도, 집 밖에 마스크 없이 단 한 번도 외출해본 적 없는 아이의 현실이 참말 슬프다. 이젠 하원 후 마스크를 낀 채 동네 놀이터를 점령한 아이들 모습이 익숙하다. 급한 일만 아니면, 큰비가 쏟아지지만 않으면 아이들은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어울려 시간을 보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니까, 그리웠던 시간이니까. 마스크 모양대로만 하얗고 나머지는 까맣게 탄 얼굴의 첫째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며칠 전,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유치원에서 알람이 왔다. 원아의 가족 중에 한 분이 코로나 확진이라서 ‘모든 아이를 긴급 귀가조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일터에 급히 연락하고 유치원으로 뛰어가 아이를 데려왔다. 그리고 혹시 몰라 어린이집에 있던 둘째도 사정을 알리고 하원시켜 집으로 왔다. 집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점심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급히 가스불에 물을 올리고 미역을 불려 국을 끓였다.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그날 하루는 유치원·어린이집과 소통하는 스마트폰 앱에서 알림이 계속 날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학원에서 시작된 코로나 확진이 주변 학원들을 중심으로 추가 발생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코로나 델타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전국의 확진자 수가 천 명이 넘었다는 보도가 나온 날이었다.
다시 적막감이 드리운 동네에서
생기가 넘치던 동네 거리가 정말 삽시간에 적막해졌다. 놀이터엔 접근금지 테이프가 칭칭 감겼고, 몇몇 학원도 휴관에 들어갔다. 두 아이가 다니는 기관에선 확진자 소식이 더 있지 않았지만, 꽤 많은 아이가 등원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출근하는 날 외엔 최대한 가정보육을 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다. 기관마다 최선을 다해 상황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지 알기에,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더 간절히 바라게 된다.
며칠 놀이터를 가지 못한 첫째는 벌써 심통이 났다. 코로나로 보낸 그 길고 외로운 시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겠지 싶다. 둘째도 현관을 서성이며 자꾸만 “나갈래요” 외친다. 언제쯤 마스크 없이 두 아이 손을 잡고 문밖으로 자유롭게 나설 수 있을까. 마스크를 낀 채로 처음 만났던 새로운 이웃들은 가끔 우연히 마스크를 벗은 서로의 모습이 낯설어 흠칫 놀란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나. 조금씩 돌파구가 보여 깊은숨을 내쉬었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다시 엄습할까 봐 두렵다. 삼시 세끼 밥하는 건 사실 이제 오히려 익숙해져 괜찮을 것도 같다. 그래도 이 상황이 싫다.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살 수 없는 것이 싫다. 엄마라는 자리가 다시 버겁게 여겨질까 봐 ―앞으로도 숱하게 만날 그 버거운 순간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싫다. 내가 육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재택근무하며 방문을 닫고 있는 남편을 애꿎게 미워하게 될까 봐 싫다. 고맙고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까 봐 너무나도 싫다.
오늘(7월 9일) 아침, 중대본 회의에서 수도권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유·초·중·고 수업이 2주간 전면 원격수업으로 진행된다고 하니 사실상 긴 여름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이 엄마인 내게 더 있으니, 당장 나가던 일터에 양해부터 구해야 한다. 어쩌면 이전보단 조금 익숙할지도 모르지만, 그 끔찍한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오늘도 밖에 나가지 못한 둘째는 오열하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요즘은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다. 보육/교육 기관, 그 어떤 공동체의 실제적 도움 없이 인간은 살아가기 힘들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고립은 내게 그렇다. 아이를 안고, 업고, 부대끼는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 행복하지만, 그로 인해 숨 쉴 여유가 없다면, 내게 그런 짧은 혼자만의 순간을 도와줄 누군가가 없다면, 그 소중하고 행복한 모든 순간이 순식간에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닫는다.
부디 이 동네의 적막함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잠식한 바이러스가 이 세상을 더는 황량케 하지 않기를, 세상의 모든 엄마, 주부들이 이 재난 앞에서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 부담을 홀로 지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이들을 돌보고 키워내는 일이 참말로 값지고 경이롭다는 사실이 기억 속 아득한 곳으로 숨지 않기를.
도화영
일곱 살, 세 살 아이의 엄마. 하나소교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