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호 내 인생의 한 구절]

얼마 전 어떤 기독교인과 한문 고전에 관해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순자》(荀子)에 대해서, 그중에서도 ‘관상 보는 것을 비판함’(非相)이란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년 가을쯤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나비약과 뼈말라족’ 편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면서 저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키에서 125만큼을 뺀 몸무게를 ‘뼈말라’ 상태라고 하는데 요즘 10대들 사이에서 그런 몸무게에 도달하는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방송은 몸무게 달성을 위해 ‘나비약’이라고 불리는 향정신성 식욕억제제까지 찾는 청소년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들은 거식증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지향한다. 이들은 약물 때문에 우울해하고 극단적 생각을 하는 등 정신적 문제를 겪더라도 스타킹을 신었을 때 헐렁해질 정도로 마르는 데 목표를 두기 때문에 식욕이 없어지는 게 좋다고 말한다.

충격적이었다. 외모 추구가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인가? 시술과 성형은 일상이 된 듯하고,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말이 당연한 듯 횡행한다. 얼굴에서 몸까지,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은 이제 더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과연 외모지상주의로 흐르는 물결을 그대로 둬도 괜찮을 것일까. 착잡한 마음을 토로하며 순자 이야기를 꺼냈다.

순자.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br>
순자.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순자가 말한 인간의 본성

순자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그러니까 기원전 300년경에 살던 인물이다. 이때도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했던 모양이다. 순자는 그런 식으로 외모에 혹하는 세상을 참으로 답답해했다. 옛 훌륭한 성인들 외양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사례를 들고, 오히려 폭군들 외양이 훌륭하고 보기 좋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일을 하는 데에는 그 사람의 키가 작나 크냐 몸집이 건장하냐 왜소하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몸무게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찌 키나 체격 준수한 얼굴 따위 외모를 논할 것인가? … 배우는 자들은 사람의 뜻을 논하고 사람의 글을 비교해야 할까, 아니면 단지 키를 비교하고 얼굴의 곱고 추함을 따져서 그것으로 쓸데없는 자랑을 늘어놓을 것인가? … 요즘 세간에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백성들과 시골의 경박하고 약삭빠른 젊은이들은 모두 여인네처럼 아름답고 요염하며 기이한 옷차림으로 자신을 꾸미고, 행동마저 연약하고 애교스레 움직인다. 여인들은 이들에게 열광하여 부인들은 지아비로 삼고자 하고, 아가씨들은 연인으로 삼고자 해서 자기 부모와 가정까지 버리고 이들에게 도망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평범한 수준의 군주라도 신하로 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평범한 수준의 아비라도 자식으로 삼기 부끄러워하며, 평범한 수준의 형이라도 아우로 삼기 부끄러워하고, 평범한 수준의 사람이라도 벗으로 삼기 부끄러워한다.

결국 얼마 못 가 사고를 쳐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되면 그때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자기에게 닥친 현실을 슬퍼하고 거기에 발을 들였던 첫 순간을 후회한다. 그런데 이것이 외모가 초래한 재앙인가? 아니다. 그가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적어서 논의의 수준이 저속한 데 따른 결과이다. 그러니 배우는 자들이여, 인물을 알아볼 때 앞으로 과연 무엇을 기준 삼아 살피는 것이 옳다고 할 텐가?

사실 외모를 보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의 특별한 자세라면, 눈에 보이는 모습 이상의 것과 그 이면을 보는 데 있을 것이다.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하다’라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한 것으로만 유명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자의 학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누를 힘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 능력은 바로 인지능력이다. 인지능력을 통해 배울 수 있으니, 이기심이 자기 삶과 사회를 망가뜨리게 됨을 알게 하고, 그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게 하면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당연히 순자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맹자.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간의 가능성을 본 맹자

대화를 나누던 분도 순자의 글을 보니 성악설을 말했던 사람이라고만 알았던 순자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성악설로 알던 순자와는 좀 다르네요. 멋있어요. 기독교인이 성악설에 익숙하기는 하죠. 기독교적으로 보면 성악설이 맞잖아요.” 순간 내게 성경 구절이 하나 떠올랐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 새번역)

그리고 답했다. “그렇기도 하죠.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기도 했죠.”

기독교에서는 대체로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도 죄를 강조하며 성악설을 말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잘 믿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순자의 반대편에 성선설(性善說)을 말한 맹자가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맹자가 기독교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한다면 인간 안에 내재한 가능성을 말한 맹자의 견해가 옳다고 볼 수 있다. 《맹자》(孟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우산장’(牛山章)이다. 이 대목은 《맹자》 중에서도 인간의 가능성을 가장 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나라 도성 근처에 우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은 풀마저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다. 모든 사람이 쓸모없는 산이라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나 맹자는 우산이 원래 아름다운 산이었다고 말한다. 다만 근교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아무 때나 들락거리며 자기들 필요한 대로 나무를 베었고, 새싹이라도 조금 올라오려고 하면 자기네 가축들을 그곳에 풀어 다 먹어치워서 이렇게 민둥민둥한 산이 되어버렸다고. 지금 이 모습만 보면서 사람들은 원래 저 산에 좋은 재목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냐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간다.

사람 안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사람으로 올바르게 행하려는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 타고난 좋은 마음을 놓쳐버린 것이 나무에 도끼질을 해서 매일매일 베어내는 것과 같으니, 그러고서는 도저히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그 타고난 좋은 마음은 밤낮으로 자라고 새벽의 맑은 기운으로 적셔지는 것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즉 선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것은 낮 동안 하는 짓이 그 마음을 억눌러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억눌러 사라지게 하는 일이 반복되면 차분한 밤에 자라난 착한 마음은 보존될 수 없고, 밤사이 자라난 착한 마음이 보존될 수 없으면 곧 짐승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짐승 같은 행위만 보고 그에게 처음부터 좋은 마음이란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그 사람의 본성이겠습니까?

정말이지 잘만 길러주면 잘 자라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제대로 길러주지 못하면 어떤 것이든 사라지고 말죠. 공자께서 ‘잘 붙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려서 나고 드는 데 정해진 때가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는 건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위로를 얻는다. 세상이 모두 지금의 내 모습만 보고 몰아세울 때, 맹자는 아니라고, 너는 참 아름다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다만 너를 둘러싼 환경이 잔인했던 거라고, 보호받고 성장할 기회를 조금만 가질 수 있으면 너도 튼튼한 나무가 우거진 멋진 숲이 될 수 있다고 강하게 위로하고 설득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당연히 우리 안에는 무한히 아름다운 가능성이 가득하지 않겠는가? 맹자는 그래서 교육을 강조한다. 내 아름다운 본성을 가리고 있는 문제들을 발견하고 극복해내기 위해, 진짜 나를 찾기 위해 배우고 수양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선언

맹자와 순자는 성선설과 성악설로 놓고 보면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맞닿는 부분도 있다. 교육을 통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문제를 깨우쳐 알게 하면 인간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선언은 바로 이 두 사람의 관점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욕망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다. 자신과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순자와 맹자는 인간의 가능성도, 인간의 망가진 측면도 모두 보았다. 그리고 쉬지 않고 노력해서 그런 망가진 자신을 극복해낼 것을 권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을 가진 기독교라면 더욱 나 자신과 너,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죄의 문제가 있는 것도 물론 맞지만, 예수님이 영단번에 해결하셨음에도 우리는 죄를 말하느라 인간의 가능성에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인간을 되살릴 수 있다고 말하며 되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옛날 학자들 노력에 대해 읽고 공부하고 있노라면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우리 조금 더 열정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에 뛰어들어도 좋지 않을까. 

임자헌
잠시 미술 잡지 기자로 일했으나 한학의 매력에 빠져 진로를 변경했다. 《일성록》 번역을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조선왕조실록》 현대화사업에 참여해 실록을 번역하고 있다. 깨어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사료와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과거와 오늘의 상호 교차를 통해 ‘지금-여기’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중서도 썼다. 역저서로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군자를 버린 논어》 《오늘을 읽는 맹자》 《시민을 위한 조선사》 《마음챙김의 인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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