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호 네 생각이 났어]

이 편지 수신자 ‘형석’은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이들을 반영한 가상 인물입니다.

세상에, 형석이 네가 벌써 고3이라니! 작은 입으로 어렵사리 ‘이모, 이모’ 새로 배운 단어를 신기한 듯 되뇌던 네 모습을 본 게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언제나 ‘남의 집’ 자식은 빨리 자라나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도 아주 쉽게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관계적인 정서가 강하지. 사실 따지고 보면 네 엄마와 나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사이가 아니잖니. 하지만 이웃사촌이 된 인연에, 엇비슷한 터울로 또래 남자아이를 키우다 보니 정말 네 엄마와 나는 언니 동생 사이 같았어. 우리가 이사하면서 헤어진 뒤로는 통 연락을 못 했으니 벌써 15년도 넘었구나. 네 엄마 전화는 이미 받았단다. 수시 결과가 좋지 않아 정시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시더구나. 글쎄, 내 조언이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대학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너에게 맞춤형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봐온 많은 사례를 기초로 내 생각을 전할 수는 있겠지. 그냥 조언이라고 생각해주렴. 결국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원했던 전공 대신 선택한 ‘인서울’

수시 여섯 개를 몽땅 영화 관련 학과를 썼다면서? 형석이가 다큐멘터리감독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단다. ‘그럼 그렇지’ 싶었거든. 내가 기억하는 넌 어려서부터 관찰력이 남달랐어. 또래 남자아이들이 자동차나 전자기기 등에 관심을 보일 때 너는 유난히 사람들을 보았지. 어려서 이모 아들과 함께 다닌 미술 놀이클럽 기억나니? 그때도 네 그림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어. 특이하게도 영웅이나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상상 속 인물들을 그리기보다 일상의 사람들을 관계망 안에서 묘사했지. 호박이랑 가지랑 깻잎 농사를 직접 지은 할머니가 앉아계시고 지나가던 우리가 같이 쪼그리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채소를 사는 모습, 동네 놀이터에 딸린 기구들로 운동하면서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에 함박웃음을 짓는 노인들의 모습, 초등학교 옆 문방구 안 한가득 모여있는 아이들이 방과 후 이야기로 재잘대고 그 수다를 열심히 들어주시는 주인아저씨까지. 네 그림에는 늘 너만의 시선으로 관찰한 사실적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했단다. 그래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모는 그런 생각을 했어. 넌 아마도 사회나 인간관계를 관찰하는 그런 전공을 선택하면 좋겠다. 그런 너에게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구체적인 직업군은 정말 안성맞춤이구나.

이모도 마침 이번 학기에는 입학사정관으로 학생 선발에 참여했단다. 수많은 수시 원서들을 읽고 입학 정원 3배수를 뽑고 또 거기서 우열을 가리기 위해 면접을 하고. 누군가의 지난날과 미래를 평가하는 일이 쉽지는 않더구나. 행여 내 주관적인 시선이 오래 준비해온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면 어쩌나. 그래서 집중하고 또 기도했단다. 글쎄, 여섯 학교의 교수님들은 형석이 재능을 왜 발견하지 못하셨던 걸까? 네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갑자기 세부 전공을 정한 거라서 비교과 활동이나 관련 수상 기록 등을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하더구나. 하긴, 연기자와 달리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너에게 실기로 보여줄 기회도 없었을 테고.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크긴 하겠다. 그런데 엄마가 당황하신 것은 네가 수시모집에서 모두 불합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어. 당연히 1년 미만으로 준비한 전공이었으니까. 네 엄마는 형석이 너와 잘 맞는 영역인 것 같아 재수하면서 차근차근 더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셨대. 그런데 정시 원서를 준비하면서 네가 갑자기 그랬다면서? “전공 상관없이 무조건 인서울로 넣을래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수시 여섯 개를 한 전공으로 모두 넣었던 네가 갑자기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모습에 엄마도 혼란스러우셨던 것 같아.

이 편지 수신자 ‘형석’은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이들을 반영한 가상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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