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호 공간 & 공감]

영화관에 가고 싶어졌다. 지난 연재 글 ‘2년 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다’(2022년 4월·377호 참고)를 읽고 나니, OTT가 제시하는 수천 개의 선택지 앞에서 헤매는 시간에 대한 각성도 일었고, 또 영화 보며 핸드폰을 하고 싶은 멀티태스킹의 유혹에서 벗어나 온전히 스토리에 몰입하는 시간이 그리워졌다. 깜짝 놀랄 영화값에 망설여졌으나, 신촌에 있는 독립영화관 필름포럼이 독립영화지원정책 중 하나로 평일 3천 원, 주말 4천 원에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왠지 돈 버는 느낌이 들어 냉큼 영화관에 갔다. 그렇게 보게 된 영화 〈스펜서〉는 영국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내면을 담은 영화다. 국가를 위해 두 개의 자아를 가지라는 영화 속 찰스 왕세자의 요구에 다이애나 스펜서가 그리워한 ‘홈’(home)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의 평범한 삶, 또는 규율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두 개로 나뉠 수 없는 다이애나 그 자신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그리워할 곳, 그리운 곳을 생각하니 고민 없이 내 고향 용산 ‘땡땡거리’가 떠올랐다.

용산 땡땡거리. (이하 사진: 백영재 제공)<br>
용산 땡땡거리. (이하 사진: 백영재 제공)

내 고향은 땡땡거리다. 물론,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서 거주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고민 없이 용산이다. 가상세계를 사는 시대에 누가 ‘고향’을 묻겠냐마는 언젠가 삶을 되돌아봤을 때 그리워할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백빈건널목’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지만, 여전히 ‘땡땡거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이곳은 용산역에서 출발해서 청량리 지상 방향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선로와 노량진에서 한강철교를 지나 경의중앙선과 합류되는 화물 운송 선로가 나란히 지나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용산구 한강로동에 있는 작은 동네다.

용산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철도를 개통하면서 교통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역사학자 이익주에 따르면,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용산에 일본인들이 자리 잡게 되었고, 용산 전체 면적의 90%는 일본인 소유였다(〈용산구소식〉 4월호 ― 용산횡성수설 13). 한강로동에 남아있는 오래된 건축물을 보면 쉽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용산역 주변으로는 철도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사가 지어졌는데, 대부분 1960년대 지어진 ‘세멘블록조 구조’ 주택들이다.

이런 용산역 반경 1km 내 위치한 땡땡거리는 1호선, 경의중앙선, KTX와 ITX가 지나갈 때면 “땡땡땡땡” 경고음을 울리면서 가늘고 기다란 막대기가 내려와, 열차가 통과할 때까지 사람과 차량의 통행을 잠시 멈춰 세운다. 어렸을 땐 이 규칙적인 경고음을 메트로놈 삼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과거에는 용산에서 출발해 청량리로 가는 국철(현재의 경의중앙선)과 호남선으로 이어지는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가던 철로가 동네를 가로질렀다. 두 개의 철로를 외줄 타며 누가 떨어지지 않고 더 멀리 가나 내기를 하던 게 일상이었다. ‘고압 전류 위험’ 신호가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른 채 철로 사이를 뛰어놀던 어린 시절, 기차로 발생하는 분진을 막기 위해 심어진 나무들 이파리를 떼어다가 평화롭게 소꿉놀이를 했다. 또 야간에는 석탄과 탱크를 실은 기차가 지나가곤 했는데, 이걸 보는 것이 동네 꼬마들의 작은 구경거리였다. 예민하지 않았던 건지,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서 무뎌진 것인지 모르게 기차가 지나갈 때 들리는 쇠 마찰 소리와 경적 굉음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200m 남짓의 땡땡거리 중심에는 만물상회가 있었다. ‘이마트’ ‘아이파크몰’도 없던 시절, 고무장갑부터 아이스크림, 과일, 봉지쌀… 정말 모든 것을 팔았던 이 상회는 500원짜리 과자를 사면 50원을 돌려받거나, 50원어치만큼의 땅콩캐러멜을 먹을 수 있었다. 요즘의 포인트 적립 방식으로 하는 고객서비스였던 것인지, 구매가격의 10%인 것으로 보아 부가세를 환급해주는 개념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물건을 사면서 무엇인가를 되돌려받는 느낌은 일거양득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만물상회 옆으로는 매일 새벽 하얀 김으로 온 동네를 따뜻하게 덥히는 용산방앗간이 있었다. 덜거덕거리는 기계소음과 적갈색의 고무다라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리듬감이 어우러지는 곳. 기계의 콧구멍에서 새하얀 가래떡이 뿜어져 나오면 방앗간 아주머니는 나무틀 길이에 맞게 가래떡을 잘라 착착 정리해두고, 쌓인 나무틀은 서로 얼기설기 놓아 방금 나온 뜨끈한 떡들이 바람을 잘 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끔 엄마가 묵은쌀을 가져다가 방앗간에 떡을 뺄 때면 쫓아가 혹시라도 방앗간 아주머니의 계산이 어긋나 어쩔 수 없는 여분의 가래떡을 기대했다. 아들 이름을 따서 ‘훈이네’로 불렸던 쌀가게와 철물점, 세탁소, 신발 가게와 선물 가게까지. 이 거리 전체가 백화점이고 마트였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곳은 할아버지 가게였는데, 간판도 없는 이 가게는 단지 할아버지가 운영하신다고 하여 ‘할아버지 가게’로 불렸다. 주인 내외가 거주하시는 방이 안쪽에 딸려있어 손님이 오시면 미닫이문을 열고 나오셨다. 딱지, 종이 인형, 껌과 담배, 돼지 저금통 등을 파는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이었다. 문방구였는지 구멍가게였는지 모를 이곳은 이름도 목적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용돈을 받은 날이면 예외 없이 방문했던 어린 시절의 발걸음이 쌓여있는 곳이다.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다. 만물상회는 문을 닫았고 마트와 편의점이 근처에 생겼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들은 사진관으로 카페로 술집과 치킨집으로 모양을 바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철물점과 방앗간, 식당 한 곳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못하고 여전히 철도청 부지인 땅과 그 위에 세워진 무허가 건축물들이 보존되고 있는 덕분에 서울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이 동네의 매력이 되어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한때 범죄 드라마 배경으로 등장할 만큼 슬럼화된 동네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레트로 열풍이 불고 유명 드라마에 사람 냄새 나는 동네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단체로 출사를 나오기도 하고, 철로를 배경 삼아 웨딩촬영하는 커플도 보인다.

2020년에는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면, 매도자와 매수자는 지자체 허가를 받아야만 부동산을 사고팔 수가 있다. 대개 주택 등 부동산의 투기적 수요가 들끓을 때 과열된 수요를 제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제도이다. 겉보기에는 낡아 보이는 건물이 평당 1억을 오르내리는 현실이다 보니, 정부의 조치가 한편 이해된다. 이 제도를 시행한 시점은 단군 이래 최대 개발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용산정비창 개발이 주목을 받다가 컨소시엄이 해체되고 철도청이 소유권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주택가격 급등 원인이 주택공급 부족이라는 전문가들 말이 보도될 때마다 용산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서울 도심 내 비어있는 땅, 즉 퇴거해야 하는 임차인도 없고, 철거해야 하는 건물도 없는 넓은 공지인 용산정비창은 끊임없이 ‘개발’의 대상지가 되면서, 용산정비창과 철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땡땡거리 역시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1만 세대 주택공급이 이뤄질지, 국제 업무지구가 조성될지 확실한 바는 없다. 그러나 정비창 주변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단독주택의 낡은 건물들은 헐고 도시경관과 교통을 위해 철로는 땅 밑으로 들어가고, 걷기 좋은 공원과 살고 싶은 주택, 일하기 좋은 오피스 공간으로 변경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래되고, 낡고, 낮은 건물을 허물고 새롭게 지으면 더 좋아지겠지 싶으면서도 그리워할 곳에 갈 수 없게 되는 일이 현실이 될 생각을 하니 마음 한켠이 벌써 아릿하다. 실향민은 오죽하랴. 모두 개발이 되려면 수십 년 걸릴 수 있겠으나, 그리워할 곳이 사라질 것이 분명한 지금 내 마음이 쓸쓸함으로 일렁일 때가 있다. 하늘나라를 본향, 돌아갈 곳으로 삼는 우리라지만, 동시에 몸을 사는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경험을 역사로 엮어 의미로 풀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역행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내가 그리워할 무언가를 어떻게 하면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영화 〈스펜서〉의 다이애나는 왕실 전통에 따라 사냥을 떠난 아들들을 구출해 마침내 궁을 떠난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냐는 아들의 질문에 ‘홈’이라고 답하는 스펜서를 보면서 그에게 ‘홈’은 자유였고, 평범한 삶이었고, 꾸며질 수는 있으나 교체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그리운 곳을 지키는 방법일까. 이제 땡땡거리에 분꽃, 나팔꽃이 방진벽 사이에 피고 질 때가 되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할 테지만,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담아 오래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찰리 해이든과 행크 존스의(Charlie Haden, Hank Jones) 〈고잉 홈〉(Going Home)을 들으며 마음껏 그리워할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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