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호 무브먼트 투게더] 대통령 선거 이후의 소회와 제언

본지는 ‘무브먼트 투게더’ 꼭지를 통해, 2022년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한 입장과 앞으로의 과제를 살피고 있다. 이 글은 ‘이제는 ‘민주당 복음주의’를 떠나보내야 할 때’(구교형, 4월호), ‘우리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강을 건너자’(박현철, 5월호)에 이어지는 글이다. ― 편집자

선거 끝난 벽보.

이것만큼 덧없는 물건이 또 있을까. 점진적 끝없는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하지만 집요한 시민으로서 이번 선거는 심대한 패배다. 심신의 충격을 추스르면서, 그 패배의 자리에서 반개혁 세력과 다시 맞설 일이 바쁘다. 낯설지만, 미리 알 만했던 현실은 취임 전부터 ‘의식이 공간에 지배당하는’ 당선자 부부의 세계와 그렇게 고르기도 힘들 것 같은 최악의 인선이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는 정권이든 직장이든 저질의 힘 앞에선 싸우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고, 자존감도 반쯤은 건질 수 있었다.

선거 직후에 내가 소환된 토론회1)를 마치자 동년배들은 그걸 ‘1:3 배틀’이었다며 깔깔대는 위로를 건넸다. “그걸 미리 알았어?” 했더니 “그것도 몰랐냐” 한다. 난 연령이나 세대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것이 거북하고, 이데올로기도 들여다보되 현장을 더 중시하는 인생이라 어떤 작위적 구도가 있다 해도 외면하고 열린 대화만 바랄 뿐이다. 토론회에선 주로 60-80대 ‘선생님’들이 선거기간에 내놓은 말과 글을 해명해달라고 요구받아 그렇게 했다. 줌(ZOOM)으로는 길게 말한다는 질책도 있었다고 들었다. 당일 ‘1: 3이어서 시간을 더 드렸다’라는 취지의 사회자 멘트가 그래서 나온 것 같다.

선거 이전이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그런 토론이 정치(政治)다. 주장뿐 아니라 거기 이르게 된 경위, 즉 구조도 함께 밝히는 것은 건설적인 소통의 전제 조건인데, 논자들이 어느 정도 그렇게 했으므로 ‘복음주의’라는 느슨한 띠를 긍정한다. 반면, 정치 아닌 것은 갈라치기와 외마디 선동, 왜곡, 대중을 향한 심리전이다. 성별, 세대, 장애 유무 … 하나 끝나면 또 하나 찾아내 공동체를 파괴하는 패악질과 ‘선제 타격’ ‘여가부 폐지’ 식의 선동이 정치의 자리에 있다면 ‘사이비’라는 접두어를 반드시 붙여줘야 한다.

탄식과 긴장의 순간들

토론자들 모두가 지적하는 ‘이세벨 문건’을 처음 봤을 때의 ‘억’ 하는 목멤을 기억한다. 젠더 감수성이 연약한 분들은 못 느끼겠지만, 그 텍스트는 번안(飜案) 없이 쓰면 탈 나는 ‘날것’이었다. 축자적(逐字的) 묵상에 익숙한, 영향력 있는 목회자와 ‘사모’라고 불리는 그 배우자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는 얘기는 통한 부분이겠다. 탈은 텍스트에 ‘여자’라고 쓰여있더라도, 문제의 본질이 성별에 있지 아니함을 표시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했다. 이 문건은 SNS 포스팅 형식으로 돌았는데, 모바일 화면에 흘려 보는 상황은 발표 시점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고, 거기 연명한 인사들 중 일부와 다른 분들이 숙고하여 작성하고, (서명자들의 실명을 밝힌) 다른 문건들과 동일시하게 된 것 같다. 이전 호(2022년 4월·377호)에서 구교형 목사는 〈뉴스앤조이〉 구권효 기자의 두 글에 대해 ‘시기가 적절치 않다’ ‘거칠다’라는 반론을 짚으면서도 ‘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대체로 동감한다. 다만 구 기자의 두 글은 집단 저작 문건을 연명자 개인들의 SNS에 나타난 특정 후보 지지를 근거로 넘겨짚어 비판한 점, “윤석열 후보와 김건희 씨가 오랜 기간 도사·법사로 불리는 이들과 교류한 정황은 농후하다”라면서도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국가조찬기도회’ 등 무리한 대척점을 끌어들인 점, “민주당이 재집권하면 뭐가 더 잘될 거라고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는 표현으로 적대감을 드러낸 점, ‘민주당 기독교지부’ ‘지식인의 몰락이요, 한 시대의 종언’이라는 최종 판결 같은 표현 등은 반론이 가능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감정을 쏟아낸 것으로 다가온다.

구 기자뿐 아니라 이상철, 최현종 등 몇몇 학자와 목회자들은 “종교 간 대화를 말하던 이들(진보)은 무속을 비하하고, 무속에 발끈하던 이들은 침묵한 점은 정파 행동”이라며 양 진영 모두를 비판하였는데, 뒷부분만 타당하다고 본다. 종교 간 대화와 상호 존중하자는 입장과 어떤 포괄적 교리가 열린 논의를 회피하면서 공동체의 권위 체제에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입장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타 신념 체계에 배타적이던 부류가 반성 없이 그 입장을 버렸다면 자기모순이기에, 정파적 편향에 의한 표리부동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비론적 비판은 표피적 연상작용이나 뭐라도 대척점을 찾으려는 습관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옥성득 교수는 선거기간 개인 SNS에서 “무속, 무교, 미신, 주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판”한다며 비판자들을 비판하고 교정하려 노력했다. 개념과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학자로서의 의욕은 일견 이해가 되지만, 비판의 일차 대상이 그렇게 명확한 개념이나 경계를 가진 존재가 아니며 공론장을 회피하여 영향력을 미치려는 의도가 명확했다. 또한 ‘남을 해코지하지 않는’ 기복과 그렇지 않은 주술을 구분하라는 요구도 뭉뚱그려 나타나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서, 결국 그의 노력은 허공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회 모임의 흔한 ‘기도 제목’은 부동산을 사고파는 타이밍이고, 팔아 남긴 이득은 실수요자의 주머니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해코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법정에 갇힌 사고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무속 논란을 정치 국면에 끌어들인 것은 윤석열·김건희 부부였고, 그들을 둘러싼 집단은 옥 교수가 구분을 주문한 개념들에 불교까지 더해서 뭉뚱그리는 대혼란을 드러냈다. 그들은 취임 이후에도 정치기구로서의 청와대, 국방부, 외교부 등 주요 정치 자원들을 흔들어대는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다.

“대선에서 누구를 뽑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된다”라는 언술과 “이명박 안 뽑으면 생명책에서 지운다”라고 했던 ‘어떤 목사의 말’, “동성애 찬반 여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겠다는 반동성애 진영의 논리”를 동일시한 것 역시 무리한 동일시와 표피적 대척점 설정으로 본다. 필자는 김세윤 교수로부터 “이번 선거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간의 선택과 같다”는 취지의 말을 직접 들었을 때 잠시 당황했었다.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천국(천사)’과 ‘지옥(마귀)’의 비유가 용인되는 것은 북한을 비난할 때뿐이었고, 북한 역시 거울상으로 그랬던 과거가 있지만, 사회운동가나 학자들에겐 금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재차 물었을 때, 김 교수는 거짓과 속임수, 불공정한 법 적용, 대중에 대한 조롱에 무속 관련 혼란까지 대놓고 드러내는 태도를 ‘묵시문학적 상황’으로 인식한다고 하였다. 통상 공직에 나서는 자는 설사 그러한 본질이 있더라도 그것을 감추어야 할 부끄러움으로 인식하면서 악을 선양한다는 자리매김은 회피하는데 윤석열 후보는 그 선을 넘었으며, 그런데도 지지율이 나오는 현실을 개탄하여 선지자적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 영상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편집본을 재배포했고, SNS에 공유되었는데 그 자리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러 전화를 걸어 격려하는 분들도 있었다.

합당한 불일치를 이루려면

민주주의 자체가 합당한 불일치(존 롤스)를 전제로 한다. 어떤 불일치도 불편이나 비진리로 몰아가는 성향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남아있지만, 일치하지 않는 입장들의 공존은 엄연한 현실이며, 상호 존중, 즉 합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공동체의 유지 조건이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주장하는 바에 이르게 된 논리적 구조를 내놓고, 맥락을 상호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신학자의 언명과 ‘이세벨 문건’, 혹은 뭉뚱그려져 비판받은 문건들을 유효한 설득으로 받아들인 부류들이 있었다면 이를 가능하게 한 맥락을 포용함으로써 이후 더 광범위한 합당성을 향해 논의를 진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수는 자기 인식의 구조를 밝혔으므로 다른 입장은 그에 대한 자신의 성경 읽기와 상황 읽기를 제시하는 것이 비난보다 앞세울 일이다. 이러한 주고받음의 누적이 바람직한 관계이자 정치로 인정될 것이다.

선거 전후에서 복음주의 활동가, 학자들 간 상황 인식의 불일치는 최종 선택을 달리할 정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필자는 ①절박성 수준 ②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평가 ③비판의 정밀도와 형평과 분량 ④독과점 언론의 영향 ⑤교회에 대한 절망과 희망 등의 측면에서 그러한 불일치를 느꼈다.

2021년 10월, 서울행정법원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에 대해 “채널에이 사건에 대해 적법하게 개시된 감찰을 중단시키고 대검 인권부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다” “… 소집요건을 갖추지 못한 전문수사자문단의 소집을 직접 지시했고,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및 대검 부장 회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해 국가공무원법 제59조 등을 위반한 것”이며, “정직 2개월의 징계처분은 양정기준에서 정한 징계양정 범위의 하한보다 가볍”고 “… 양정기준에 따르면, 면직 이상의 징계가 가능하다”라고 판시했다.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은 거기 오래 몸담은 정치인일수록 일반 국민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특성이 있는데,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파면 대상이자, 검언유착에 개입한 전직 공직자를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그 당과 후보 모두가 이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느끼기에 충분했고, 그 위기감은 당선 후 현실이 되고 있다. 선거 기간에 그 절박성 인식은 국민 50대 이하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최종적으로는 투표 직전 20대 여성들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우리 토론회에서 비판과 해명의 대상이 된 복음주의 ‘선생님’들은 60-80대가 주축이었으므로 같은 세대 유권자 중에서는 특이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은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있어온 의제뿐 아니라 수렴대에 있는 의제(예를 들면, 소수자, 지구 환경 등)까지 퇴행시킬 것으로, 즉 비민주/반국힘 유권자들 의제도 빼앗을 것으로 예견되었다. 이는 윤석열 후보가 ‘선제 타격’ ‘여가부 폐지’ ‘성범죄 무고죄 강화’ ‘탈원전 기조 폐기’ 등으로 이미 공표했으니, 유권자도 달리 판단할 이유는 없었다. 이 대목에서 ‘대운하’에는 반대하면서 그걸 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이명박을 지지하던 교우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대운하를 정말로 하겠어요?”라는 대답이 떠오른다. 아마 평생 잊기 어려울 성싶다. 이명박은 당선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즈음 여러 교수에게서 한나라당의 20년 집권론을 직접 들었었다. 속이는 자와 적극적으로 속아주는 자들의 만남은 말글로 이뤄진 문명을 비웃는다. 여가부 폐지론자가 여가부장관 후보로 인사 청문에 응하고, “동성애는 치료” 대상이며, ‘위안부’ 피해 보상금(배상금이 맞다)을 “밀린 화대”라고 하는 자를 ‘다문화종교비서관’에 임명한 상황을 보면, 우리가 투표로 ‘대혼란’을 선출한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김성회 대통령실 종교다문화비서고나은 논란이 커지자 5월 13일 자진 사퇴했다. ― 편집자).

정치에 대한 숙고, 그리고 소통

누구나 정치 얘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치 고관여층이 많아 보이지만, 검사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정치관이 박약한 것이 한국 사회다(1995년, 서울지검 장윤석 검사. 17대부터 한나라당-새누리당 소속 3선). 어떻게든 권좌를 탈취하면 사법은 그 시녀라는 선언이, 이후 정치인이 된 검사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것이다. 정치는 모든 구성원에게 보장된 참여 자체이기에, 누구도 소외되거나 어떤 이유로든 갈라치기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선거는 그 과정의 일부로, 정치와 권력의 제자리를 확인하는 장이지 사술(邪術)이나 ‘법꾸라지’라 불리는 잔재주로 깃발을 차지하는 게임이 아니다. 이번 선거 전후로 보여준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의 갈라치기와 혼란은 ‘영악한 정치’가 아니라 정치 아닌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 사태다. 우리의 논객들이 그런 것도 정치의 한 장르로 인정하는 만큼 공동체의 쓴 뿌리도 대를 이을 것이다.

독과점 언론의 폐해는 더 중요한 의제를 밀어내려고 만들어진 구도에 답하고 논박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에너지와 집단적 기억용량을 고갈시킨다. 이는 언어, 이미지 자극에 진지하게 답하려는 이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복음주의 논자들의 말글에서 숙고되지 않은 대척점을 발견할 때, 직접 후보나 정책을 분석하기보다는 언론이나 특정 계보가 찍어준 논점들을 맴돌 때, 사안의 선후경중(先後輕重)을 뒤집어 대응할 때 그런 어두움을 느낀다. 마치 성층권 가까이에 있는 오존은 지구 생명 출현과 유지의 절대적 존재이지만 지표로 내려오면 ‘주의보’가 나오는 위험물이듯, 정치나 정당에 대한 비판은 시기와 국면까지 고려해야 빛이 나며 결과와 영향까지 염두에 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불과 수년 전까지 국정원의 공작 대상이었던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과점 언론이 별안간 기억장소에 내리거나 올리는 행동 자체를 관찰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그토록 입에 달고 살던 ‘경제’를 내리고 ‘소상공인’을 끼워 넣은 것은 경멸할 일이었다.

교회에 대한 절망 상태는 ‘민주당 기독교지부’라는 비난에서 느껴졌다. 소수자 문제에 대한 소극적 태도, 정파 행동으로 비난받을 더 큰 줄기에 대해 ‘국힘당 기독교지부’라는 비판이 있을 법한데 그런 네이밍은 아예 없었다. 그 이유는 대표성을 차지한 교회들과 국힘당에 대한 절망이 아예 말을 걸지도, 비판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본다.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 장면인데, 안타깝게도 진지한 비평가들의 지지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파벌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래도 말이 통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나 두들겨 패자는 심리로 무엇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그보다는 ‘민주당을 점령’하자는 20대 여성들이 훨씬 나은 해법을 제시하는 것 같다.

토론회 참석자 중 진보당 당원이었다고 밝힌 분이 소수 개혁정당들 내부에도 성 문제가 있었음을 환기했는데, 발제자들이 주로 민주당의 성 문제와 감수성 부족, 차별금지법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지적한 데 대한 반론 성격이었고, 나의 기억장소도 일깨웠다. 인류의 폭력성과 약자에 대한 착취는 매우 중요한 정치 의제임이 분명하지만, 특정 정당과의 싸움으로 치환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더 깊은 소통이 필요해 보인다.

불의와의 싸움은 각자의 수명만큼 할당되어 있다. 2015년 김영란 전 대법관은 ‘독재형 부패’(1단계), ‘족벌형 부패’(2단계),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3단계), ‘시장 로비형 부패’(4단계)라는 마이클 존스턴 교수의 부패 유형을 소개하고 우리를 3단계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이번 선거에 그 카르텔의 실체가 극명하게 나타난 듯하다. 단계론에 따른다면 그 뒤에 더 교묘한 부패와 싸워야 하고 현실에서는 이 유형들이 모두 복합된 변이로 나타나 싸움에는 끝이 없을 것이며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 이 논의를 왜 할까.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고 본다. 이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우울함에 빠지거나 몸에 탈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 보자면 한 줌도 안 돼 보이는 복음주의, 그중에서도 선거에 아무 변수도 안될 것 같은 활동가나 논객들은 왜 지난한 논의를 하고 있을까. 그것 역시 정신 건강을 위해서다. 서로 불일치를 확인하고도 최종 판결은 맨 뒤로 미뤄두고 서로의 맥락을 포용하고 미래를 기다려주는 일. 그것이 저잣거리에서 주워 배운 권력 획득의 사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 주 

1)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성서한국, 청어람ARMC, 희년함께가 진행한 ‘기독교 운동과 정치: 대선 이후의 대화’ 집담회(4월 5일, 청어람홀)를 말한다. 


윤환철
기독 시민 활동가이며, 〈복음과상황〉, 사단법인 남북나눔운동, 한반도평화연구원(KPI)에서 일했다. 북한과 경제협력, 인도적 지원, 개발 협력을 진행하는 실무자로서 평양, 신의주, 개성 등지를 왕래했다. 성공회대에서 NGO를, 연세대에서 통일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으로 탈북민 장학, 취업 창업지원과 대북인도적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