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호 무브먼트 투게더] 기독교 사회운동에 요구된 것, 하지 못한 것

본지는 ‘무브먼트 투게더’ 꼭지를 통해, 2022년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한 입장과 앞으로의 과제를 살피고 있다. 이 글은 ‘이제는 ‘민주당 복음주의’를 떠나보내야 할 때’(구교형, 4월호)‘우리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강을 건너자’(박현철, 5월호), 정신 건강을 위한 정치(윤환철, 6월호)에 이어지는 글이다. ― 편집자

들어가며: 혐오 전쟁으로 변질된 대선 정국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전에 없이 자극적인 언론전과 선동이 난무했다. 정치 세력은 시민의 혐오 정서를 표심으로 이용하려 했고, 그 결과 시민들은 선거뿐 아니라 정치 자체를 냉소하는 데 이르렀다. 이번 대선에서 최대 승부처는 2030세대 표심이었고, 이들의 표심은 거대 양당과 진보 정당으로 분산되면서, 어떤 후보도 미래세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1) 대선 결과가 박빙이었다는 점은, 그만큼 여론과 민심이 양분된 현실을 반영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 국민통합, 사회적 갈등 봉합이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선 전 거대 여당이 20대 여성을 ‘구원투수’로 내보낸 것은 파격 인사였지만, 수개월이 지난 현시점에서 보자면 이는 30대 ‘공정 원리주의자’인 야당 당대표에 대한 안티테제에 가까웠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다른 형태의 이미지 정치에 소비된 것은 아닐지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양당에서 내세운 대선 공약 중에 기억에 남는 ‘정책’은 거의 없다. 이보다 더 성의 없을 수 없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의 페이스북 메시지로 자신의 부동 지지층에게 어필하는 야권 대선 후보의 행태는 국정운영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21세기 한국 정치의 요지경이다.

서로를 흠집 내는 과정에서 대선 후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 세력들은 수십 년간 한국 사회가 ‘피, 땀, 눈물’로 만들어온 많은 성취를 혐오 전쟁의 땔감으로 가져다 썼다. 제20대 대선의 차고 넘치던 혐오 발언과 폭력적 발화는 특정 정당에 국한할 수 없다. 대통령 (예비)후보 배우자의 과거를 둘러싼 추문을 생산하고 이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국모(國母)의 품격’과 연결했던 이들이 누구던가. 2008년 호주제 폐지라는 역사적사건 이후 실질적으로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를 떠나 주체적으로 존재함을 법적으로 보장해 왔음에도, 2022년 한국에서는 남편의 격을 떨어뜨리는 ‘정숙하지 못한 여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정치적 촌극이 벌어졌다.

엉망진창인 대선 한복판의 기독교인

이렇게 혐오 전쟁으로 얼룩진 이번 대선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이명박 전 대통령을 ‘장로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우고 대놓고 지지하던 일부 목회자, 교회 지도자들은 이번 대선 정국에도 선거법 위반을 넘나드는 발언을 강대상에서 쏟아냈을 것이다. 예측 가능한 행보였고, 어찌 보면 참 일관적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동안 극우 정치화된 개신교의 균형 잃은 모습과 발언을 비판해오던 이들의 행보에 있다. 민주화운동이 ‘운동’으로 역동하던 시절, 복음주의 진영에는 민중신학이나 사회참여운동 등으로 이들과 뜻을 함께하던 기독교인과 단체가 있었다. 기득권이 되기 전, 거대 정당이 되기 전 민주화운동의 동지들을 지지하던 많은 기독교사회단체,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그 정당에 지지를 보냈다. 어쩌면 정당을 향한 지지가 아니라, 세력화되기 이전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던 과거 동지들의 모습을 덧없이 지금의 그 정당에서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싶다. 혹은 ‘온갖 좋은 것의 총합’으로 보이는 그들의 정치 구호가 ‘PC’(정치적 올바름: politically correct)해보여서 기대를 걸어봤는지도 모른다. 본 기획의 앞선 글 “이제는 ‘민주당 복음주의’를 떠나보내야 할 때”(2022년 4월호·377호)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민주당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다 보니, 대선 시기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은 거대 양당 중 한쪽에 ‘선한 것’이 있다는 종용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 교회와 카톡방에서는 특정 정당 후보가 당선되면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것이고 한국 기독교가 목숨처럼 지켜오는 모든 가치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전달되기도 했다. 2007년 발의된 이후 최근의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두 번이나 민주당 집권 시기를 지났는데도 차별금지법은 15년째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어느 쪽이 집권하느냐의 문제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듯하다.2) 아이러니하게도, 차별금지법 논의를 정치적 땔감으로 쓰지 말라고 호소하는 다양성과 평등을 옹호하는 이들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한국 현실 정치는 차별금지법을 포함한 평등, 다양성, (진짜)공정, 자유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운동에 요구된 것, 하지 못한 것

어느 쪽이든 지금의 상황은 마치 기독교인과 교회는 세상 권력이 실현해주는 가치와 이념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독교인과 교회, 기독교 사회운동이 현실 정치의 영향력을 무시하거나, 냉소적으로 관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말은, 그야말로 세상을 비추고, 맛이 나게 하고, 썩지 않게 보전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투표 순간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전후로 대선과 국내외 정치를 바라보는 기독교인, 기독교 사회운동의 눈이 어디로 향하느냐다.

이번 대선에서는 정권 창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형식적으로 다뤄지거나 정당의 부동층을 거스르지 않고자 의식적으로 정책을 배제하는 움직임, 진보에 역행하는 주장이 비일비재했다. 오죽하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기대가 안 된다. 차악을 뽑는 것 같다”라는 푸념까지 이어졌겠는가.

이번 대선에 처음 투표권을 가진 50만 명의 만 18세 ‘고3 표심’이 화제가 되었는데도3) 여전히 청소년 정책은 곧 고교정책, 입시제도로만 여겨진다. 학교 밖 청소년이 40만 명에 육박하는 현시점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정책으로 청소년 정책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 권리보장 운동도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출근길 시위를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대선 직전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었음에도, 지구상 몇 안 되는 휴전 국가 대한민국에서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에 대한 논의는 여러 국정과제 중 하나로만 다루어질 뿐이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이 감동적인 장면 연출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후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을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정당을 초월해 생존의 문제고, 미래세대가 살아갈 터전의 문제다.

현실 정치와 권력 창출에 눈을 두는 이들에게는 개성공단을 재가동하는 것, 장애인이 원활히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 학교 밖 청소년도 건강하고 행복한 10대를 보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길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눈과 손은 거기에 있어야 한다.4) ‘기독교 사회운동’에 요구되는 것, 나아갈 방향은 ‘사회운동’과 달라야 한다. 사회운동이 자유시장경제, 자율경쟁과 민영화의 효율성을 추구하거나 정치 민주화, 경제민주화의 가치를 좇을 때 그들의 이념체계, 이해관계의 자장에 들지 못하는 삶의 영역, 생활세계를 좇아야 한다. 기독교 사회운동은 한국 시민의 성숙하지 못한 자본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부동산 투기, 주식시장의 과열 속에서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용기(정직), 법망을 피하려고 법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책임을 두는 담대함(책임), ‘잘난 부모를 둔 것도 능력’이라는 어이없는 수저론이 진리인 양 여겨지고, 진보적 지식인조차 사회적자본·명예·지위 세습의 덫에 빠져있을 때 ‘정의롭게 손해 보는 삶’(정의)을 실천해야 한다.

나가며: 다시 ‘Quo Vadis’, 한국교회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대사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욕을 먹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어쩌면 사회에 정직, 책임, 정의 가치를 세우겠다고 나서는 기독교 사회운동 주체들에게는 ‘유체 이탈 화법’을 구사한다는 비난이 날아들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결함’이 요구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2014년에 개봉한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쿼바디스〉는 한국 개신교를 향해 ‘침몰하는 배’라고 일갈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재정 배임·탈세 혐의로 법정에 들어서는 조용기 순복음교회 원로목사를 향해 “교회가 당신들 영업장입니까?”라고 외치고, 대형교회의 목회 세습 문제와 부동산 투기를 통한 재산 불리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8년 전, 이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낸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에서 한국 기독교인은, 교회는, 기독교 사회운동은 얼마나 변화했고, 어떤 미래를 계획하는가? 결국 지금, ‘한국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quo vadis)’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대면 예배 집합 금지, 신천지를 매개로 한 집단감염, 교회 모임에서 나타난 부주의함으로 대규모 확진이 일어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교세가 기운 교회도 많고, 온라인 예배의 ‘맛을 본’ 교인들을 다시금 교회 공동체로 귀환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 중에 한국교회는 지역사회 돌봄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환경의 교회 공동체를 상상하고 시도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교회가 코로나19 이전으로의 완전한 회귀에만 방향성을 두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2년이 넘는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한국교회가 잃은 것, 할 수 있었던(그리고 못 했던) 것에 집중한다면, 대선의 혐오 전쟁을 거친 혼란한 정국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한국교회가 잃은 것은 ‘내가/우리 교회가/우리 목사님이 지지하던 후보의 승리’가 아니다. 기독교인, 교회, 기독교 사회운동이 세상의 격랑 앞에서 보였어야 할 ‘빛과 소금’의 모습이고 태도다. 그래서 대선, 지방선거, 총선, 그리고 현실 정치의 각 장면은 기독교인 모두가 패자인 혐오 전쟁으로 그칠 수도 있고, 모두가 고루 승리하는 상생의 정치적 경합이 될 수도 있다. 기독교 사회운동이 정치 공학을 뛰어넘어 정당을 향해 기독교의 생명 중심 관점에서 동물권을 보장하기 위한 접근을 요구하고, 미래세대가 살아갈 삶의 터전을 위해 안전한 원전 폐기와 지속가능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예산 투자를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다음 대선을 기대해본다.

■ 주

1) “대선 ‘2030’이 갈랐다···20대 여성 ‘혐오정치’ 심판”, 〈경향신문〉(2022. 03. 10.)
2) “‘누구도 죽지 않길’...차별금지법을 외치는 이유”, 〈뉴스타파〉(2021.12. 31.)
3) “‘만 18세’ 헌정사상 첫 대선 투표... 여야 ‘50만 표, 고3 표심’ 촉각”, 〈뉴데일리〉(2021. 12. 09.)
4)  정직, 책임, 정의는 필자가 활동하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의 핵심가치이다.

 

신하영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믿는페미’로서 눈물과 고뇌로 한국교회 안을 바라보고, 공감과 위로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쓴다. 현재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상임집행위원과 청년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교육정책, 시민학습, 소수자정책과 젠더 이슈이다. 학습을 통한 인간의 변화, 변화를 이끌어내는 교육에 관심이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