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호 비하인드 커버스토리]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 / 길버트 화이트 지음 / 박정희 옮김 / 아카넷 펴냄 / 38,000원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 / 길버트 화이트 지음 / 박정희 옮김 / 아카넷 펴냄 / 38,000원

18세기 영국 남부의 작은 마을 셀본(Selborne)에서 평생 동식물을 관찰한 성공회 사제 길버트 화이트(1720-1793)의 책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아카넷)은 지난 2백여 년간 3백 종이 넘는 판본으로 출간된 고전이다. 영국에서는 성경, 셰익스피어, 《천로역정》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다. 실제로 이 책은 찰스 다윈, 헨리 데이비드 소로, 윌리엄 워즈워스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길버트 화이트 전기’를 쓴 리처드 메이비에 따르면,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이 책을 두고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모호한 책이지만, 저자의 어떤 무의식적 장치를 통해 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 문을 통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평했다.

작은 마을의 식물, 동식물, 날씨, 그리고 교구의 인구 변화 등을 지루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기록한 이 책이 어떻게 사랑받는 고전이 된 것일까? 번역본에 실린 ‘윌리엄 자딘 경 판본’ 서문에는 ‘시골 성직자의 글을 좇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시골 성직자의 글을 좇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실을 제외하고는 미화하지 않고, …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가치 있는 사실들에 관한 단순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적절한 제약하에서 연구가 마음에 전하는 영혼의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대자연에서 보이듯 창조주가 생명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대로 자신도 생명체들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인 의무를 꾸준히 염두에 두었습니다. (13쪽)

“창조주가 생명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대로 자신도 생명체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쓴 글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일까. 저자 길버트 화이트는 자기가 머무는 자그마한 교구의 역사(parochial history)를 기록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는 “교구의 역사는 유물들뿐 아니라 자연의 산물과 사건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 믿음에 따라 셀본의 동식물을 상세히 연구하고 기록했다. 아쉽게도(?) 기독교 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을 쓴 길버트 화이트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을 쓴 길버트 화이트

이 책은 길버트 화이트가 동물학자 토머스 페넌트, 박물학자 데인스 배링턴와 주고받은 서신, 셀본 소수도원의 역사, 박물학 달력과 시로 구성됐다. 거의 다 소교구 셀본 관련 내용으로, 그는 평생 교구를 떠나지 않고 현장의 생명들을 면밀하게 관찰했다(찰스 다윈보다 1세기 전에 지렁이를 자세히 연구했다).

선생님, 수해를 자주 겪는 땅은 늘 척박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렁이가 모두 익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대수롭지 않은 곤충과 파충류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연의 살림살이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크기가 작고 그 수나 번식력이 주목받지 못하는 데 비해 그 효과는 엄청납니다. 지렁이는 작고 던적스러워 보이지만 자연의 소중한 사슬 역할을 합니다. 지렁이가 사라지면 자연의 사슬에 커다란 틈이 생길 것입니다. 지렁이는 식물의 위대한 기획자여서 지렁이가 없다면 절반 가까운 새들과 그 새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몇몇 네발짐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목도 잘 자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83쪽)

특히 그는 조류에 큰 관심을 갖고, 새의 습성과 이주 등을 깊이 연구했다. 객관적 사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의문, 추측, 상상을 덧붙이기도 하는데, 대자연을 지키는 청지기의 면모가 물씬 풍긴다.

선생님, 짐승들에게는 성적인 애착과는 별개로 놀라운 사교성이 있습니다. … 겨울에 집단 서식하는 새들의 모임이 한 가지 놀라운 예입니다. … 황소와 젖소는 혼자서는 살이 찌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좋은 목초도 무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무시할 것입니다. … 이러한 성향이 같은 종의 동물들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 사슴이 젖소의 젖을 먹고 암사슴으로 성장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49쪽)

그가 젊었을 때 말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당시 때마침 외로운 암탉도 한 마리 길렀습니다. 이 두 마리 어울리지 않는 동물들은 외로운 과수원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 점차 외딴곳에 함께 사는 이 두 마리 개체들 사이에 분명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금류는 유유자적한 소리를 내며 네발짐승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비벼댔습니다. 말은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조그만 동료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서로는 상대의 허전한 시간을 위로하는 듯 보였습니다. 따라서 밀턴이 아담의 입속으로 다음과 같은 감정을 불어넣은 것은 다소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새가 야수와 함께할 수 없고, 물고기가 가금류와 함께할 수 없듯,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원숭이도 황소와 함께할 수 없나니.’ (350-351쪽)

내륙과 고지에 살았던 길버트 화이트는 “운 좋게 제가 해변 근처나 어떤 커다란 강가에 머물 수 있었다면, 자연적인 성향대로 저는 그곳의 산물들에 친숙했을 것”이라며 어류학에 심도 있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데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같은 시대 지구 어느 편에서 (운이 좋아서는 결코 아니지만) 해변 근처에서 해양 생물을 관찰한 인물이 떠올랐다. 조선 후기 흑산도 연해의 해양 생물을 기록해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펴낸 정약전(1758-1816)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전라남도 흑산도로 유배되어, 학문 연구보다는 현지 주민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데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그가 장덕순이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쓴 책이 《자산어보》이다.

수산 생물을 상세히 서술한 책으로, 기존 서적을 참고하면서도 유배지에서 발견한 어류 등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조사한 내용이 충실하게 담겼다. 2백여 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오늘날에도 어족이나 자연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이 참고하고 인용하는 ‘백과사전’이다. 초판은 그림 없이 글(한문)로만 되어있었으나, 지금은 여러 판본으로 전해진다.

그의 동생은 유명한 정약용이다. 둘 다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였으나 정약용은 ‘형님의 험한 섬 생활’을 더 걱정했다. 두 사람의 유배 생활을 대비하며,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달랐음을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예를 들면, 영화 〈자산어보〉). 정약용이 정치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비장하고 왕성한 글쓰기를 하는 동안, 형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대표작으로 남겼다. 당시에는 유학자가 어패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무척 가볍게 치부되었던 때라 그가 어족에 관한 책을 썼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가 크다. 그는 《자산어보》가 “여러 사람들에게 참으로 응당 밑천이” 되기를 바랐다.

이로 인해 후세의 군자들이 이를 보완한다면 이 책이 병을 치료하고 이롭게 활용하며 재화를 다스림에 여러 사람들에게 참으로 응당 밑천이 될 것이며, 또한 이로써 시인(詩人)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널리 참조하는 데 보탬이 되게끔 하고자 할 뿐이다.1)

책의 본문은 비늘이 있는 종류, 비늘이 없는 종류, 껍데기가 있는 종류, 기타 바다 생물로 분류해  2백여 종을 탐구한다. 있는 그대로 탐구 대상을 묘사하면서도, 맛은 어떤지 어떤 병에 좋은지 등을 덧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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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길버트 화이트는 독자들이 “너무나 쉽게 일상적인 사건들로 간과했던 창조의 기적들에 조금만 더 주목할 수 있다면” 책을 쓴 목적은 충분히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혹여 혼신을 바친 이러한 탐구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신의 섭리하에서 노인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의 영혼을 건강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라 덧붙인다.

길버트 화이트와 정약전은 지구상에서 약 35년을 공존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에게 관찰에 대한 흥미와 기쁨을 주는 그 모든 대상을 오직 한 손이 빚어냈다는 것, 그리고 동일한 힘이 그것들의 지속과 변화를 관장한다”2)는 사실이다.

대자연 속 동물과 나의 거리를 헤아려본 이번 커버스토리에서 창조주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 주

1) 정약전 지음, 권경순·김광년 옮김, 《자산어보》(2021, 더스토리)
2)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 ‘윌리엄 자딘 경 판본의 서문’ 중에서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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